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 보이셨는데 오늘 본문은 세 번째 나타나신 기록입니다.

14절에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했습니다. 나타나셔서 제자들과 아침을 드신 다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하시면서 베드로가 그렇다고 대답할 때마다 한 가지씩을 당부하셨는데 첫 번째는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셨고 두 번째는 "내 양을 치라" 하셨고 세 번째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질문하신 내용을 살펴봅시다.

△15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16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17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게 세 번을 물으셨는데, 요지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이런 질문을 한 번만 하시고 지나갔으면 그냥 그러려니 할 터인데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하고 그것도 매번 질문할 때마다 베드로가 그렇다고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는 것은 그 질문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일을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으므로 예수님이 세 번 사랑하느냐 물으심으로 베드로의 마음을 다독거려 준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걸리는 데가 있습니다. 17절,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라는 말이 그런 해석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근심하여 라는 말 대신에 '베드로가 안심하여 가로되' 라든가 '베드로가 희색이 만면하여'라고 해야만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을 예수님이 아시고 마음을 다독거렸다는 해석이 맞는데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사랑이라는 말이 원어, 희랍어에서 다른 단어로 쓰인 것을 가지고 무언가 찾아내려고 시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사용한 단어는 '아가파오'였는데, 베드로는 '필로'를 사용하여 대답하였다. 흔히 전자는 하나님의 사랑, 신적인 사랑, 숭고하고 헌신적인 사랑, 완전히 이타적인 사랑을 가리킨다고 보며 후자는 인간적인 사랑, 조건적인 사랑, 친근하고 우정에 가까운 사랑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물었는데 비해 베드로는 자신이 실패한 경험도 있고 해서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고 단지 그보다는 다소 차원이 낮은 사랑 즉 인간적인 우정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대답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을 따르자면, 베드로가 예수의 물음에 대해 '그러하외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이의를 달지 않고 있다는 점이 걸립니다.

따라서 이런 두 가지 해석은 모두 다 흡족할 만한 해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각도로 이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다. 부부 간의 대화를 예로 들어 봅시다.

아내가 남편에게 묻습니다. 당신 나 사랑하지? 남편이 대답합니다. 그럼,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다시 아내가 묻습니다. 당신 나 사랑하지? 남편이 대답합니다. 그럼 사랑하지, 사랑한다니까. 다시 아내가 세 번째로 묻습니다. 당신 나 사랑하지? 이렇게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그냥 지나가는 질문이 아니라, 무언가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질문을 받는 입장에서는 무언가를 생각해 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부인이 세 번째 같은 질문한 것에 대하여 남편이 대답합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니까? 이때 남편은 혹시 아내가 자기 사랑을 의심할 만한 어떤 것을 느꼈을까 봐 걱정을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째 하셨을 때 "베드로는 근심하여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근심하여'라는 말은 '고통을 느끼다, 서운하다'의 뜻으로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같은 말을 자꾸 물어오면 나를 믿지 못해 그런가 하며 서운해 하기도 하고 혹은 나의 행동이 부족하지는 않았는가 하며 근심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베드로가 근심할 만큼 철저하게 베드로의 마음을 확인하시고자 하셨는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랑을 집요하게 확인하는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름 아니라 그 다음에 어떤 중요한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이유는 보다 중요한 어떤 말을 하기 위한 전 단계인 것입니다.

말을 풀어 보자면,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는데, 아니 부탁할 일이 있는데 그전에 하나 확인할 게 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만일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게 확실하다면 너에게 부탁을 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굳이 입 아프게 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 뜻인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신 다음에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말씀을 세 번 하셨는데, 요약하자면 '내 양을 먹이고 보살피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부탁을 해 가면서 그렇게 양을 먹이고 보살피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양을 맡기면서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만 양을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목숨까지도 바치며 사랑하는 양을 누구에게 맡겨야 하겠는데 자기를 사랑하는 자라야만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양이 있는데 그 양을 누구에게 맡길까? 그렇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내 양을 사랑해 줄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고 자기의 양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양을 먹이고 보살피는 그 이유와 원인은 어떤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억지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이렇게 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15~16절)." 그리고 세 번째 대답인 1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양을 먹이고 보살피려면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저는 베드로가 그 해변 가에서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실 때 얼마나 처절하고 비참한 심정으로 벌벌 떨면서 대답을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연이어서 내 양을 먹이고 보살피라는 부탁의 말씀을 하실 때에 얼마나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들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이런 공식이 성립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야 예수님의 양을 먹이고 보살피게 된다. 그러니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양들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보살피지 못한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자면, 예수님의 양들을 먹이고 보살피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대로 먹이지 못한다면 어떤 말로도 변명하지 못할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됩니다. 또한 목회자가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보살피지 못했다면 그것 또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입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수없이 고백하여도 성도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요즈음 우리 교계를 돌아보면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던 베드로처럼 우리들이 그렇게 대답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아니, 입으로는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그 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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