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섬돌향린교회에 방문했던 날을 기억한다. 귀국한 지 2년여가 지나도록 몸담을 신앙 공동체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처음 참여한 퀴어 퍼레이드와 성소수자 인권 활동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나로 인정받는 해방감을 알게 된 후 더는 나를 감추고 살 자신이 없었고, 교회 내 성소수자로서 소외감과 죄책감을 품은 채로도 주일마다 교회 붙박이로 살던 시절이 거짓말인 것처럼 교회가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임보라 목사님을 알게 된 후에도 꽤 많은 주일 아침을 망설임으로 보낸 뒤에야 어렵사리 섬돌에 방문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기독교인이자 동시에 성소수자로서 온전히 환대받았다.

임보라 목사님을 처음 본 것은 2014년 여름이었다. 신촌 퀴어 퍼레이드 당시 나는 갓 활동을 시작한 퍼레이드 기획단원이었고, 목사님은 행진 참가자들을 위해 축복식을 하고 계셨다. 그 모습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행사 현장을 침범하는 혐오 세력에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무전기에서는 길 한복판에 드러누운 사람들로 지연된 행진 상황에 대한 공유가 쉴 새 없이 오갔다. 다만 그 소란한 와중에도 내가 믿는 신의 이름을 빌린 축복은 또렷하게 들렸고, 맑은 하늘에 흩날리던 꽃가루와 무지개색 영대를 맨 목회자의 모습이 긴 잔상을 남겼다.

상근활동가가 된 후 목사님과는 예배당보다 길에서 더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됐다. 내가 가는 퀴어 퍼레이드나 시위·연대의 현장에는 어김없이 그가 있었고, 내가 잘 모르는 연대의 현장에서도 늘 그의 이름이 들려왔다.

그러니 내가 아는 사람 중 목사님만큼 바쁜 이가 손에 꼽을 지경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만날 때마다 늘 내 손을 꼭 잡고는 "그렇게 바빠서 어떡해요, 몸 아픈 건 괜찮아요?"라며 다정한 안부 인사를 물어 주는 사람이었다. 소셜미디어에 투정하듯 올린 작은 어려움에도 진심 어린 염려와 함께 "기도할게요"라던 사람. 당신 눈이 닿는 모든 약자와 핍박받는 이들의 편을 들고 안녕을 구하던 사람이니, 목사님의 기도는 아주 길었을 것이다. 섬돌의 성찬이 고난에 처한 이웃들을 하나하나 호명하고 기억하느라 늘 길었듯이, 그렇게. 어쩌면 그보다 더.

2018년 비온뒤무지개재단이 진행한 '종교인 앨라이 인터뷰'에 참여했던 고 임보라 목사. 사진 제공 비온뒤무지개재단
2018년 비온뒤무지개재단이 진행한 '종교인 앨라이 인터뷰'에 참여했던 고 임보라 목사. 사진 제공 비온뒤무지개재단

임보라 목사님의 장례식장에 갔을 때, 아주 새삼, 그의 기도 속에 얼마나 많은 이름이 담겼을지 떠올렸다. 작지 않은 장례 공간을 가득 채우고도 계속해서 밀려들던 조기와 조화와 사람들. 그리고 울음소리. 크고 번듯한 교회 건물도 없고, TV에 나와 웅장한 설교를 하는 것도 아닌, 출석 교인 100명을 넘지 않는 작은 교회 목회자의 장례가 이렇게 번잡하려면, 그는 얼마나 많은 것은 베풀고 살았다는 뜻일까.

나는 그 자리의 많은 이가 나처럼 그에게 기도 빚을 졌으리라 짐작해 봤다. 어디 나뿐일까. 그의 존재에 기대어 교회 공동체에 남을 수 있었던 성소수자 교인들이, 구럼비를 지키던 제주 사람들이, 철탑 위의 노동자들이, 낙인찍힌 신학생들, 쫓겨난 상인들,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 여성과 장애인들, 이주민과 난민들이, 유기된 동물들이 모두 그의 기도 속에 있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이들이 채워야 할 그의 빈자리들을 보며, 그가 짊어졌을 무게가 아득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우리는, 이 사회는, 그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진 것일까.

언젠가 주일예배를 마친 뒤 삼삼오오 모여 친교를 나누던 때였다. 누구 님, 하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옆에서, 그는 조금 서운한 듯도 한 얼굴로 "저도 목사님 말고 그냥 '보라 님'으로 불러 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목회자를 이름으로 부른다는 게 영 낯설고 멋쩍었고, 다소 송구한 기분마저 들어 그렇게 부르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은 어쩐지 보라 님, 하고 불러 주고 싶었다. 아무도 장로나 집사로 부르지 않고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가 원하는 이름으로 불리는 평신도 교회. 그 가운데 유일하게 이름으로 불리지 않던 한 사람. 늘 크고 단단하게만 보였던 우리 목사님이 처음으로 작고 외로워 보였다.

그 후 어디서건 목사님을 만나면 "보라 님!" 하고 부르며 손을 힘껏 흔들어 인사했다. 다른 교인들과 그랬듯이. 그러면 목사님도 환하게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 인사해 주셨다. 그 작은 호명 하나가 내가 목사님에게 드린 가장 좋은 것이라 마음이 아프다. 나는 그에게 받은 것이 이토록 많은데, 내 생에 더없이 큰 위안이고 위로였던 이에게 나는 제대로 돌려준 게 없다. 이제는 갚을 길조차 영영 요원해졌다.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고 사흘이 흘렀다. 여전히 기도의 첫머리에 주님, 하고 부르고 나면 한숨 같은 울음이 쏟아진다. 이 그리움과 미안함과 상실감과 슬픔을 다 삭이려면 얼마의 시간이 흘러야 할지 아직은 아득하기만 하다. 그저, 목사님이 그토록 애달파했던 이들을 나 또한 힘껏 사랑하는 것으로 그에게 받은 사랑을 한 줌이라도 갚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하여 훗날 주의 부름을 받아 돌아갈 때, 당신 없는 세상에서도 당신에게 보고 배운 대로 사랑하며 잘 살아 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목사보다 그저 한 인간 임보라로 불리길 바랐던 보라 님. 당신의 별칭처럼 초록이 무성한 큰 나무로, 작은 새와 동물과 곤충과 지친 나그네의 쉬어 갈 그늘이 되어 주신 우리의 초록나무 님. 이제 그 고단했던 짐을 모두 내려놓고 평안을 누리세요. 차별도 혐오도, 빈곤도 고통도 없는 세상에서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꽃잎처럼 팔랑팔랑 춤을 추며 편히 쉬시기를 빕니다.

선영 / 비온뒤무지개재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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