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밀러의 <재즈처럼 하나님은>(복있는사람)을 처음 읽었던 십여 년 전을 잊지 못한다.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형형색색의 질문에 답변이라곤 오로지 '기도와 말씀 읽기'라는 모노톤으로 귀결되는 '답정너' 같은 기독교 문화 속에서 이토록 진솔한 질문과 창의적인 하나님 탐색이라니. 기독교 세계의 전형 안에 자리를 점하지 못하고 겉돌던 내게, 밀러는 태평양을 건너 도착한 마이너 감성 충만한 동료 '성도'였다. '성도'. 그래, 2000년대 성도는 이렇게 현대적 문화 속에서 누구나 사용하는 길거리의 언어로 방황하고 질문하며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발견해 내는 것이지. 예수님에게서 '후광'이 아닌 '주름'을 읽어 내며 삶의 진실을 찾아내는 그런 방식.

언제 떠났고, 떠난 이들은 누구인가

그렇게 참신하고 혁신적인 언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했던 밀러도 오늘 이야기할 책 <도널드 밀러의 오색사막 순례 이야기>(잉클링즈) 같은 언어를 구사한 시절이 있었다. 이 책은 20대 초반 두 청년이 구형 폭스바겐 캠핑 밴을 타고 떠난 도로 여행 순례기다. 여기서 두 청년은 도널드 밀러와 그의 친구 폴. 이 순례기는 텍사스에서 출발해 우여곡절 끝에 첫 번째 목적지인 그랜드캐니언에 도착해 하이킹을 해내고, 라스베이거스를 거쳐 오리건의 목장에 안착해 단기 알바를 하다가, 생의 다음 스텝을 밟으러 다시 떠나기까지 3개월간의 여정을 담고 있다. 도널드 밀러라는 매력적인 저자에 '오색사막 순례 이야기'라는 아름다운 제목의 '여행기'라니! 어떻게 이런 책을 기대 없이 펼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해도 될 조합인 이런 책을.

역시나 어떻게 해도 될 조합인 책이었으므로, 책을 읽는 동안 "삶이란 옷과 자동차, 새로운 치약 맛 이상의 것이며 공동체와 창조, 아름다움과 인간성에 대한 것"(150쪽)임을 깨닫는 돈(도널드 밀러)과 폴의 여정은, 지금 내가 안주하고 있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어디서 구형 스타렉스라도 구해 떠나고 싶을 만큼 마음을 설레게 했다. 무엇보다 삶은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엮어 내는 필연의 태피스트리라는 걸 보여 주는 장면들은 삶의 비밀 한 가지를 알려 주는 비기祕器였다. 가령, 구형 폭스바겐이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정확한 타이밍에 '정비공'을 보내 주시는 기도 응답이나, 필요한 때에 딱 알맞은 부품을 찾을 수 있었던 그들의 일화에서 덩달아 하나님을 느끼게 되는 희열을 경험했는데, 이는 오로지 떠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길 위의 신비이자 기쁨일 터.

<도널드 밀러의 오색사막 순례 이야기 - 길 위에서 만나는 빛, 아름다움, 그리고 하나님> / 도널드 밀러 지음 / 허진 옮김 / 잉클링즈 펴냄 / 396쪽 / 1만 6000원
<도널드 밀러의 오색사막 순례 이야기 - 길 위에서 만나는 빛, 아름다움, 그리고 하나님> / 도널드 밀러 지음 / 허진 옮김 / 잉클링즈 펴냄 / 396쪽 / 1만 6000원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읽고 조금 심란해졌다. 이 책에 나오는 20대 초반 두 청년이 2022년 현재 50대가 됐다는 점에서. 이 말은 이 이야기가 30년 전 20대 미국 남자 청년 둘의 순례 갬성이라는 것. 책을 읽는 내내 깜짝깜짝 놀라며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하는지 시험(!)에 들곤 했던 이유는, 지난 30년간 "유머와 진지함"의 위치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리라. 얼마 전 읽은 리베카 솔닛의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창비)에서 솔닛이 작가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했던 부분이 생각났다. 작가의 목소리가 고유성을 가진다고 할 때, 그 기준 중 하나가 "유머와 진지함"이라고 했던 부분.

"흔히들 작가의 목소리는 그 사람 혼자만의 것이라고 한다. 한 작가를 누구와도 다른 바로 그 사람이라고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그 목소리다. 이것은 문체의 문제라고는 할 수 없고, 어투나 주제의 문제만도 아니다. 글쓴이의 개성과 원칙, 그의 유머와 진지함이 어디에 있는가, 그가 무엇을 믿는가, 왜 쓰는가, 누구와 무엇에 대해서 쓰는가, 누구를 위해서 쓰는가의 문제다."1)

30년 전, 20대 도널드 밀러 특유의 "유머와 진지함"은 2022년 독자에게 그리 효과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왜'라는 질문을 잃고, '어떻게'의 문제에 매몰된 종교 체계를 지적하는 그의 진지함은 지금도 충분히 의미 있는 태도지만, 그가 '왜'라는 질문의 답을 찾아 가는 여정 속에 구사한 유머는 성실하게 그 진지함을 퇴색시켰으므로. 이는 책 초반부의 진지하고 나름 솔직한 문제 제기부터 그 전조를 드러낸다.

"아마도 내가 휴스턴을 떠나고자 한 이유는 부분적으로 이러한 신비를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무의미한 질문에 대답하려 애쓰느라 나의 삶, 내게 주어진 선물을 낭비했다. 최근에 나는 방법에 대한 의문, 즉 어떻게 하면 돈을 벌까, 어떻게 하면 여자랑 잘까,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 어떻게 하면 즐길 수 있을까 따위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30쪽)

방법에 대한 의문의 예로 "어떻게 하면 여자랑 잘까" 같은 예시를 든 게 어느 시절에는 진솔한 자기 고백이었을지 몰라도, 이 책을 읽는 여성 독자가 이런 구절을 읽고 느낄 생각 같은 건 유념하지 않은 게 분명해 보인다. 이 문장을 '전조'라고 한 이유는, 이 책이 끝날 때까지 그 톤이 일관성 있게 유지되기 때문이다.

먼저, 전 여자친구에 대한 언급들(헤어진 연인이나 유곽 없으면 시 못 쓰는 다수의 한국 남성 시인들처럼)과 길에서 만나는 거의 모든 여성에 대한 얼평(다른 남자친구들과 사적으로 여자 얘기하는 장면은 넘어간다 쳐도, 우연히 만난 여성들에 대해 빠짐없이 외모 평가하는 건 20대 남성 청년의 특권이 아니랍니다).

"갈색 머리에 날씬하고 꽤 예쁜 여자는 이런 일에 익숙한 듯하다." (98쪽)

"앞치마를 두른 중년 여자가 주문서와 연필을 내려놓고 우리에게 메뉴판을 건넨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을 뿐이다. 손톱에는 짙은 갈색 매니큐어를 칠했고 커다란 결혼반지를 끼고 있다. 머리는 금발이지만 뿌리 쪽을 보니 원래는 회색인 것 같다. 그녀의 얼굴은 라스베이거스와 캘리포니아의 중간쯤이다. 아마 주말이면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팁으로 받은 돈을 도박에 쏟아부을 것이다." (249쪽)

압권은 마트에서 계산하는 여성을 희롱한 일을 유머로 넣은 장면이다. '이 계산대에서는 아홉 개 이하나 20달러 이하만 계산할 수 있다'고 말한 여성 계산원에게, 이 가게에서 20달러로 아홉 개 품목을 사는 게 가능하냐고 묻는 두 20대 청년. 계산원이 혼란스러워하자 "아주머니, 여기 아홉 개 품목 이하나 현금 20달러 이하라고 쓰여 있잖아요. 그럼 제가 물건 아홉 개를 고른 다음에 20달러만 내면 되나요?"라고 되묻는다. (내가 계산원이었다면 그를 경멸의 눈빛으로 쳐다보며 무시했을 것이지만) 친절한 계산원이 다시 자세히 설명해 주자, 밀러는 카트에 잔뜩 쌓아 둔 물건을 금세 비우고 다시 나타난다. 그 상황에서 이런 대화.

"'카트에 있던 물건들 다 어떻게 했어요?' 여자가 묻는다.
'타바스코 많잖아, 돈.' 폴이 나에게 말한다. '케첩은 필요 없어.'
'카트에 있던 물건들 어쨌냐고요?' 여자가 다시 묻는다. 나는 케첩을 컨베이어 벨트에 놓으면서 우리는 빵과 케첩과 피넛 버터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내가 여자에게 눈이 참 예쁘다고 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케첩을 스캐너에 가져다 대고, 전화기를 들어 매니저를 찾는다. 여자가 전화를 끊자 폴은 그녀에게 무슨 샴푸를 쓰느냐고 묻는다." (239쪽)

휴. 온종일 서서 계산하고 있을 여성 계산원에게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며 힘을 빼고, 카트에 잔뜩 싣고 온 물건을 어딘가에 투척하고 온 그에게 계산원이 물건들은 제자리에 두고 왔느냐고 묻자, 눈이 참 예쁘다며 딴소리를 하고(얼평 좀 그만해!), 폴은 무슨 샴푸를 쓰느냐고 묻는다(어디서 여성에게 이런 소리 하시면 안 됩니다). 점입가경. 이런 유머들 너머로,

"충분한 시간 동안 가만히 멈춰 서서 우리가 돈을 쓰게 만들려고 하는 말이 사실이 아님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마침내 일출을 보고, 바닷바람의 축축한 냄새를 맡고, 높이 6킬로미터, 너비 16제곱미터의 폭포에 지지 않을 만큼 웅장한 소나기에 감탄하고, 연못 수면 위를 전진하는 오리가 헤엄치는 원리에 놀라며, 달 표면에 드리워진 태양의 그림자를 즐긴다. 그리고 이게 바로 내가 하도록 되어 있는 거야, 난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만들어진 거야,라고 깨닫는다. 삶은 나에게 주어진 선물이고, 빛은 은유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려고 이런 일들을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33~134쪽)

같은 도로 순례길의 깨달음이 유려하게 펼쳐졌지만, 저런 유머들에 조금은 진이 빠져 버렸음을 고백해야겠다.

여성 역할에 대한 확신 있는 고정관념과 낡은 비전 또한 마음에 걸린다. 길에서 우연히 만나 아무 대가 없이 밴을 고쳐준 '벤 아저씨'를 정말 멋진 삶을 사는 사람이라 여기며, 온종일 집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를 가진 그를 롤 모델로 여기는 장면.

"온종일 일한 다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 그보다 더 나은 삶은 없겠지." (69쪽)

온종일 일한 사람을 집에서 온종일 기다리는 아내를 보면서도 '그보다 더 나은 삶은 없다'고 여길지 의문이어서.

모든 사람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20대부터 읽던 저자와 함께 나이 들어 가며 저자의 변화와 성숙을 따라 함께 호흡하는 독자로 산다는 건 일종의 독서 순례인가 보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글이 밀러가 가장 최근에 쓴 '작가의 말'인 걸 보니.

"그때는 모든 사람이 떠나야 한다는 것을, 계절처럼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 말이지요. 계절은 내가 계속 변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임을 알기에 항상 변해 가고 싶습니다. 평생 동안 나는 변해 왔습니다. 아기에서 아이로 변했고 부드러운 장난감은 가짜 칼이 되었습니다. 십대로 자라나 자동차를 운전했고, 노동자가 되어 돈을 썼습니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편으로, 내 아이를 사랑하는 아버지로 변할 것이고, 물가에서 그리고 다시 산 근처에서 살기 위해, 또 친구들 가까이 살기 위해 집을 바꿀 것입니다. 또 아내와 함께 계속 변화하면서 우리의 사랑도 거듭 죽고 계속 다시 태어나게 할 것입니다. 사계절에 따라 계속 변하는 정원처럼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통기한이 끝나 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모두 떠나야 합니다. 집을 떠났다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이유로 다시 자신의 집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11쪽)

맞다. 그는 평생 동안 변해 왔다. 내가 앞서 언급한 그의 책들에서는, 이 책에 등장하는 심란한 유머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어쩌면 앞서 번역된 책들을 읽었던 시절의 나는, 위에 언급한 유의 유머들이 책을 가득 채웠다 하더라도 그걸 예민하게 읽어 낼 눈이 없는 독자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저자와 독자는 함께 변해 간다.

지난주에 참여했던 메리케이 윌머스의 신간 <서평의 언어>(돌베개) 북토크에서 정희진 선생님이 했던 말이 마음속을 맴돈다.

"사회는 독자에게 달려 있다. 독자들이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대선 결과가 달라진다. 편집자의 안목이 그 사회의 흥망성쇠를 결정한다. 독자들이 원하는 대로 업계가 흘러간다."

도널드 밀러와 나의 관계, 그리고 이 책에 대한 이야기 같아 생각이 많아졌다. 혹시 이전에 도널드 밀러를 읽어 온 또 다른 독자 중, 나와는 달리 이 책이 술술 읽히고 그의 유머에 함께 웃고 있을 분도 계실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내가 저자와 함께 성장하고 변화하는 독자인지, 혹시 제대로 집을 떠났다 돌아온 적이 없어 여전히 30년 전 그대로인 독자는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봐도 좋겠다. 책의 의미 혹은 독자의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든 것만큼은 <도널드 밀러의 오색사막 순례 이야기>가 효과적으로 수행한 게 분명해 보인다.

박혜은 / 단 한 번도 책 그만 사라고 말씀하신 적 없는 부모님 덕에 몇천 권의 반려책과 올림픽공원 옆에 거주한다. 사무실 내 책상 주변으로 책더미가 가득가득 쌓여 있는 걸 장려하는 일터에서 십만여 권의 책을 가까이에 두고 한강 옆에서 책을 고르며 일하고 있다.


1) 리베카 솔닛,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창비), 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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