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최근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 유세 현장에 연한 분홍색과 파란색이 조합된 '대통령'이라는 글자가 등장했다. 이는 트랜스젠더의 자긍심을 표현한 '길벗체' 중 하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한다는 윤 후보의 유세에 길벗체가 사용된 것을 보고, 길벗체 제작자 중 한 명인 '제람'은 페이스북에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출발점이 될 차별금지법 제정에는 눈길도 주지 않으면서 퀴어 자긍심의 길벗체를 오·남·악용하는 건지"라고 적었다.

길벗체는 무지개색으로 된 기본 서체를 비롯해 트랜스젠더를 상징하는 서체와 바이섹슈얼(양성애자)을 상징하는 서체까지 총 3가지다. 다른 서체들과는 달리 모든 글자에 색상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독특하고 아름답다. 윤석열 후보 캠프나 지지자들은 아마 이 서체가 그저 예쁘기 때문에 사용했을 것이다. 제작자들이 바라는 대로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이 서체가 왜 만들어졌는지, 어떤 것을 상징하는지 모른 채 사용한다면 어떤 경우는 '오·남·악용' 사례가 될 수 있다.

윤석열 후보 뒤로 보이는 피켓에 등장한 '대통령'이라는 글자는 트랜스젠더 길벗체다. 페이스북 갈무리
윤석열 후보 뒤로 보이는 피켓에 등장한 '대통령'이라는 글자는 트랜스젠더 길벗체다. 페이스북 갈무리

길벗체가 제작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와 관련이 있다. 시각예술 활동가 '제람'과 서체 디자이너 '숲'은 2020년 1월, 한국교회에 만연한 성소수자 혐오·차별 사례를 아카이브해 전시회를 열었다. 나흘 동안 360명이 다녀갔는데, 몇몇 관람객이 전시회에 쓰인 무지개색 서체를 배포해 달라고 했다.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서체 제작에 들어갔고, 2021년 1월 15일 성소수자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서체이자 한국 최초의 완성형 전면 색상 서체 '길벗체'를 공식 출시했다.

길벗체는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을 고안한 미국의 길버트 베이커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영문 서체 '길버트체(Gilbert Typeface)'의 한글 버전이다. 영문보다 한글 서체 구조가 복잡한 탓에 3000자 이상을 실험하고, 색상을 구현하기 위해 흑백 서체 제작 과정보다 3배 많은 단계를 거쳐야 했다. 제람과 숲을 비롯해 474명이 제작에 참여했다. 국내 최초 성소수자 인권 단체 비온뒤무지개재단의 적극적인 지원도 있었다. 그렇게 8개월 만에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2월 16일 서울 용산 길찾는교회에서 길벗체 제작자 '제람'과 '숲'을 만났다. 이들은 길찾는교회 교인이기도 하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2월 16일 서울 용산 길찾는교회에서 길벗체 제작자 '제람'과 '숲'을 만났다. 이들은 길찾는교회 교인이기도 하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길벗체'라는 이름은, 다양한 소수자를 존중하는 사회를 만드는 '길'에 함께하는 '벗'이 된다는 의미다. 한마디로 길벗체를 사용한다는 건 '길벗'이 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길벗체는 성소수자 당사자에게는 '자긍심', 지지하는 이들에게는 '연대'의 의미를 담고 있다. 2월 16일 서울 용산 길찾는교회에서 만난 숲은 "서체를 통해 혐오·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는 성소수자들이 자신을 표현하고, 그들과 연대하는 일이 어렵고 낯선 것이 아니라 가깝고 편안하다는 걸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함께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당사자'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희석하거나 그 사람밖에 할 수 없는 고유한 이야기를 막는 게 아니라, 연대의 목소리가 더 커질 수 있도록 장을 넓히는 거라면 당사자는 많아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앨라이'는 스스로 당사자가 되겠다는 개별적인 선언이다."(제람)

"길벗체가 의미 있는 이유는 당사자인 제람이 있었고 앨라이인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 문제에 있어 당사자성도 중요하지만, 곁에서 연대하는 사람도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길벗체가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앨라이들이 활동할 수 있다는 하나의 사례가 됐으면 좋겠다."(숲)

길벗체는 "누구나 쓸 수 있도록" 무료 배포됐다. 출시 직후 길벗체로 이름표를 제작해 주는 온라인 행사에 1000명이 넘게 신청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소셜미디어상 '이름표 인증샷'을 시작으로, 문화·예술계, 정치권 등 주요 사회 영역에서 사용됐다.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국회의원들은 길벗체로 플래카드를 만들었고, 전국 동네 책방 100여 곳은 길벗체로 된 팻말을 제작했다. 제람의 고향에 있는 제주도립미술관은 길벗체로 쓴 전시 현수막을 도 전역에 내걸기도 했다.

"너무 소중하면 가격을 못 매긴다고 그러지 않나.(웃음) 많이 쓰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다양한 소수자를 존중하는 길에 모든 사람을 초대하고 싶었다. 서체는 언어가 시각화한 모습이자, 가장 직접적으로 생각과 감정, 꿈과 바람을 담을 수 있는 도구다. 어떤 의미를 담느냐에 따라 서체의 생명력과 정체성이 결정되는데, 길벗체가 빠르게 확산할 수 있었던 건 지금 이 시대의 필요를 반영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람들이 길벗체를 통해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새로운 형식의 연대가 구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길벗체를 사용한 사람·공간이라면 안전하고 평등한 관계를 지향할 것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제람)

길벗체 3종 세트. 길벗체에는 누구나 명랑하고, 씩씩하고, 용감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사진 출처 <길벗체해례본> 
길벗체 3종 세트. 길벗체에는 누구나 명랑하고, 씩씩하고, 용감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사진 출처 <길벗체해례본> 

제람과 숲은 기존 무지개색 길벗체에 더해, 트랜스젠더·바이섹슈얼을 상징하는 색상을 조합해 '트랜스젠더 길벗체', '바이섹슈얼 길벗체'도 만들었다. 길벗체를 단순히 미국의 길버트체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역동성 있는 운동이자 확장된 연대"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가족(family) 서체'라고 이름 붙인 이들 서체에는, 퀴어 범주에 포함되는지를 두고 논쟁이 있었던 트랜스젠더·바이섹슈얼을 지지하는 의미를 담았다.

길벗체는 성소수자 운동을 넘어 여성·장애·이주민·난민·기후 운동 등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 권리를 지지하는 영역에서도 폭넓게 활용됐다. 2021년 3월 19일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 촉구 행진에서는 무지개색 길벗체로 쓴 현수막 6개가 도심 한복판을 가로질렀다. 제람은 이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며 "길벗체가 서로 다른 이들과 창의적으로 연결하는 매개가 됐다. 만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제람과 숲은 올해 1월 15일 <길벗체해례본>도 출간했다. 조선시대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뒤 <훈민정음해례본>을 만들었던 것처럼, 길벗체의 탄생 과정과 의미, 제작 기법, 사용례 등을 자세히 담았다. <길벗체해례본>은 소책자 여섯 권으로 제작됐다. 제람은 "제작 과정은 '길', 함께한 사람은 '벗', 서체 자체는 '체', 의미 해석은 '해', 예시는 '례', 제작자 인터뷰는 '본', 이렇게 해서 여섯 개로 만들었다. 길벗체는 연대하는 글자이기 때문에, 책도 다 함께 모여야 한 권이 되는 형식이다"라고 말했다.

"길벗체는 작은 목소리를 대변하는 서체다. 이 서체가 앞으로도 잘 쓰이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고, 이 서사의 기원과 최종 편집권을 차별·혐오 세력이 아닌 우리가 갖는다는 의미에서 기록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만들게 됐다. 으스대려는 건 아니지만 <길벗체해례본> '반포'라고 표현하고 싶다. 모두의 보편적인 글자로 만들어진 훈민정음에 '다양성'을 상징하는 색상을 더하니, '처음'이라는 의미가 다시 생겼다."(제람) 

2021년 3월 19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 촉구 행진에 사용된 길벗체. 사진 출처 <길벗체해례본>  
2021년 3월 19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 촉구 행진에 사용된 길벗체. 사진 출처 <길벗체해례본>  
"피난처·사랑 등 교회가 지닌 소중한 가치,
길벗체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길"

두 사람은 <길벗체해례본>을 펴내면서 작업의 발단이 된 한국교회를 다시 떠올렸다. 숲과 제람은 대학 시절 한 선교 단체에서 진행하는 공부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이들은 성소수자 크리스천에 대해 공부하고, 신앙 안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고민해 나갔다. 하지만 숲은 앨라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겪으며 제도권 교회에서 떠나 성소수자를 환대하는 교회 공동체로 '피신'해야 했다. 그는 "기성 교회에서는 성소수자를 보호할 수 없다고 느꼈다. 제람과 함께할 수 있는 신앙 공동체를 찾게 됐다"고 말했다.

제람은 '안전한 공간으로서의 교회'를 바란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제람은 '안전한 공간으로서의 교회'를 바란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제람도 유독 교회와 관련한 아픈 기억이 많다. 복음주의권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했지만, 단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쫓겨나다시피 교회를 떠나야 했다. 폭력적인 전환 치료도 겪었다. 그럼에도 제람은 여전히 '안전한 공간으로서의 교회'를 꿈꾼다. 제람은 "거기 있던 사람들이 자꾸 떠오른다. 교회에서 정말 많이 사랑받고 배웠다. 교회가 줬던 피난처로서의 느낌, 나를 성장하게 했던 토양, 대가 없이 선의로 사랑받았던 경험, 그런 소중한 가치들을 계속해서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난민과 관련한 활동도 하는데, 가끔 난민 이슈로 기독교 대안 학교에서 강연할 기회가 있다. 거기서 학생들에게 '성소수자와 난민을 친구로 받아들이고 싶은데, 기독교인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질문을 받는다. 많은 기독교인이 시대에 반응하며 낯선 이들을 사랑할 준비가 돼 있다. 문제는 내부 결속을 위해 성소수자라는 외부의 적을 상정하는 교회 구조다.

 

교회가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람이 교회 안에서 진정한 그리스도 정신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에서 가장 어렵고 핍박받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안전할 수 있다면, 교회가 지금 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곳이 되지 않을까."(제람)

숲은 길벗체가 성소수자 이슈에 관해 주변 기독교인들과 대화할 수 있는 매개가 됐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숲은 길벗체가 성소수자 이슈에 관해 주변 기독교인들과 대화할 수 있는 매개가 됐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숲은 여전히 한국교회 안에 차별·혐오가 팽배하지만, 이번 작업을 통해 성소수자 이슈에 침묵하던 주변 사람들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낀다고 했다. 길벗체가 교회 안에서 사회적 소수자에 관한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게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길벗체 작업을 하면서 기독교 배경을 가진 20대 시절 친구들에게 '성소수자를 대변하고 그들이 편하게 목소리 낼 수 있게 하는 서체를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선입견을 깨는 사람도 있었다. 교회에서 성소수자 이슈에 쉬쉬하는 이유는 성소수자 친구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이 길벗체 같은 사례를 접한다면 다양한 방식으로 연대가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숲)

제람과 숲의 바람처럼, 교회 공간을 평등하고 안전하게 만들기 위한 '약속문' 혹은 '환영문'에 길벗체를 활용해 보는 건 어떨까. 제람은 "퀴어 문화 축제를 반대하시는 분들이 동성애자였던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에 맞춰 부채춤을 췄던 것처럼, 길벗체도 얼마든지 써도 된다. 심미적으로도 훌륭한 데다가 '공짜'다. 그렇게 교회 안에 길벗체가 스며들면, 자연스럽게 '다양한 사람을 존중하고 자긍심을 갖자'는 길벗체의 의미에도 공감하게 되지 않겠나. 길벗체는 교회의 경계에서 반짝반짝 손을 흔들고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길벗체 3종과 <길벗체해례본>은 사용을 원하는 누구나 비온뒤무지개재단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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