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는 2012년 출범 이후 선거 때마다 '공공 정책'이라는 명분으로 보수 교계의 의견을 정치권에 전달해 왔다. 사진은 2017년 기공협 19대 대선 공공 정책 발표회. 뉴스앤조이 이용필
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는 2012년 출범 이후 선거 때마다 '공공 정책'이라는 명분으로 보수 교계의 의견을 정치권에 전달해 왔다. 사진은 2017년 기공협 19대 대선 공공 정책 발표회. 뉴스앤조이 이용필

[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기공협·소강석 대표회장)는 선거철마다 주요 정당·후보에게 보수 기독교적 색채를 띤 정책을 제안해 오고 있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도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생명 존중의 날 국가 기념일 제정' 등 10대 정책을 담은 질의서를 주요 정당에 보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기공협 10대 정책에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답변을 보냈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도 정책 질의서를 받았지만, 일부 정책 중 논란이 있다며 답변하지 않았다. 정의당은 기공협이 '생명 존중의 날' 제정 근거로 든 '임신 중지' 등을 문제 삼았다.

기공협은 국민에게 생명 존중 정신을 심어 주기 위해 국가 기념일을 제정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함께 임신 중지 문제가 사회적으로 심각하므로 낙태 관련 모자보건법 개정 등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은 동성애·동성혼을 부추긴다며 반대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정의당은 2월 9일 "질의서에 따르면, 생명 존중의 날 기념일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자살, 낙태, 세월호 참사, 묻지마 살인과 각종 학대, 산업재해 등의 이유가 언급됐다. 그러나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낙태가 언급되고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현재 정부가 추진 중인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에 반대하고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의 의의를 부정하는 내용이 주되게 언급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재명·윤석열 후보가 생명 존중의 날 제정을 찬성한 것과 관련해 정의당은 "두 후보는 낙태를 이유로 생명 존중의 날이 제정되는 것에 찬성하는지, 여성의 삶의 문제와 직결되는 낙태 문제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히길 촉구한다"고 했다.

이재명 후보는 기공협에 보낸 답변서에서 '낙태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계가 제안한 대로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매년 4월 셋째 주 수요일을 '생명 존중의 날'로 삼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자는 취지에 적극 찬성한다"고 했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자살, 낙태, 묻지마 살인, 각종 학대 등 생명의 존엄성과 소중함을 잃어 가는 사회 풍토에 깊이 우려하며, 생명 존중 문화 확산이 필요하다는 교계의 의견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고 했다.

"생명 존중의 날 제정, 사실상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것"
"기공협 정책, 기독교 가치에 부합하는지 의문"
'생명 존중'은 보수 교계의 낙태죄 폐지 반대 논리다. 정의당은 기공협의 정책 제안서 중 일부 내용이 임신 중지를 불온시하고, 헌법재판소 헌법 불합치 결정의 의의를 전면으로 부정한다고 비판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생명 존중'은 보수 교계의 낙태죄 폐지 반대 논리다. 정의당은 기공협의 정책 제안서 중 일부 내용이 임신 중지를 불온시하고, 헌법재판소 헌법 불합치 결정의 의의를 전면으로 부정한다고 비판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기공협은 임신 중지, 동성애·동성혼, 학생 인권조례, 사립학교법 반대 등 보수 교계의 주장을 '공공 정책'이라는 명분으로 정치권에 요구해 왔다. 2012년 18대 대선을 앞두고는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국가 자격시험 일자를 일요일에서 토요일로 변경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번 정책 제안서도 2020년 21대 총선 당시 더불어민주당·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정의당·국민의당에 보낸 것과 대부분 유사한 내용이 담겼다.

성적권리와재생산정의를위한센터셰어 나영 대표는 기공협의 일부 정책은 국민의 실질적인 생명·안전 보장과 무관하다고 지적했다. 나영 대표는 2월 10일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생명을 소중히 다룬다는 것은 추상적인 가치를 수호하는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폭력이나 차별을 어떻게 해소해 나갈 것인지 구체적인 정책을 만들어 나가는 문제다. 따라서 임신 중지나 유지를 원하는 모두가 차별받지 않고, 제대로 된 임신과 출산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보장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명 존중의 날을 만들겠다는 건 사실상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는 "기공협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정책에 개입하는 등 영향을 미치고,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에 주도적으로 목소리를 내온 단체다. 이런 일부 종교 단체의 입장을 마치 사회 전체의 의견인 것처럼 공식화하고 수용하는 것은 편향된 인터넷 여론을 반영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특정 종교의 입장에 따라 국가정책을 결정하는 일은 이제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

지난해 10월 5일 △생태 문명 △평화통일 △경제 정의 △평등 문화 △민주 개혁 등 5가지 정책 방향을 제시한 박득훈 목사(2022기독교대선행동 상임대표)도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기독교인들이 공공 영역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에 부합한 정책을 제안하는 것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권리다. 관건은 그들이 제시하는 정책을 뒷받침하고 있는 기독교적 가치가 올바르냐는 거다. 과연 이 정책들이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고 차별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고통을 회복해 주는 것인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박 목사는 "보수 교계가 공적 영역에서 계속 목소리를 내는 건 슬픈 일"이라면서 "오늘날 대다수 보수 교회들은 율법에 가장 충실한 사람들이 예수를 귀신 들렸다고 이야기한 것과 같은 병폐를 앓고 있다. 결국 기득권 세력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성경과 기독교 신앙, 하나님나라를 왜곡시킨 결과"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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