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돼지 탈을 쓴 사람'. 동물권 단체 DxE(Direct Action Everywhere Korea) 활동가 '사이'는 소수자들과 연대하는 현장에 종종 돼지 분장을 하고 나타난다. "우리는 모두 연결돼 있다"는 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할 때도 있다. 돼지의 모습을 한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열악한 사육 환경에서 길러지고 고통 속에서 도살되는 동물의 현실에 관심을 가져 달라는 외침에만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익을 우선시해 타자를 착취하고 폭력을 저지르는 '인간'을 대신 고발하고, 뿌리 깊은 종차별주의(speciesism)를 벗어나 같은 고통을 겪는 '동물'로서 연대한다는 차원에 더 가깝다.

그도 처음부터 동물권에 관심을 가졌던 건 아니었다. 학부·대학원에서 생명과학과 생태학을 공부하고, 물푸레생태교육센터에서 생태 교육가로 활동했다. 지역 공동체에서 자연과 생태 교육에 주력한 데는 '신앙인'이라는 정체성이 한몫했다. 자연의 회복을 통해 인간이 회복되고, 다시 인간의 회복을 통해 자연이 회복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 7년의 활동 끝에, 소외되는 이들이 중심이 되는 '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019년 기독연구원느헤미야 목회학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신학'은 생태주의자였던 그를 동물권 운동가로 만들었다. '인간도 동물'이라는 과학적 이해에 탈인간중심적 신학이 더해지자,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새롭게 보였다. 사이는 "기존에는 인간이 생태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감성 정도를 갖고 생태 운동을 했다면, 신학을 공부한 뒤에는 동물권 운동을 하는 것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국 곳곳의 육식당이나 동물원 등을 찾아가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방해 시위'를 하고, 농장에서 돼지·소 등을 공개 구조하는 등 비폭력 직접행동을 해 오고 있다. 그가 본명 대신 사용하는 '사이'라는 이름도 '새', 즉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존재'라는 의미다.

지난 3년간 신학을 공부한 그가 내놓은 소논문의 제목은 '동물의 구원을 어떻게 볼 것인가'다. 그가 말하는 동물의 구원이란, 창조의 동등성 속에서 개별 동물이 주체가 되는 것이자, 동물로서 함께 연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목사 안수 과정을 준비하는 그가 상상하는 교회의 모습도 '동물의 교회'다. 아직 한국교회는 동물권 개념이나 동물신학이 생소한 형편이지만, 폭력을 넘어 생명을 지닌 종들의 연대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DxE 사이 활동가와의 인터뷰는 1월 13일 서울 중구 희년평화빌딩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마장동 먹자골목에서 '방해 시위'를 하는 사이 활동가. 사진 제공 DxE동물행동소모임
마장동 먹자골목에서 '방해 시위'를 하는 사이 활동가. 사진 제공 DxE동물행동소모임
'인간 구원'은 '동물 구원'의 일부다

- '동물권'이나 '동물신학'은 한국교회에서 상당히 낯선 주제인데,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됐나.

일단 '동물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부터 짚고 싶다. '동물'이라고 하면 비인간 동물을 떠올리기 쉬운데, 인간도 동물에 포함된다. 이러한 생태학적·과학적 관점은 신학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구원을 떠올릴 때 개인의 영혼 구원만 생각하는데, 이는 근대 혹은 그 이전 사고방식이다. 현대 신학에서는 구조악으로부터의 구원이 무엇인지도 다룬다.

그런데 구조악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자신을 구원을 이뤄 가는 '개체'로 이해하지, '관계적 존재'로 인식하지는 못한다. 관계가 개별 존재의 근간인데도 말이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개인 구원이나 구조악으로부터의 구원뿐만 아니라 '관계적 구원'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동안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인간에게는 '동물'이라는 관계적 근간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동물의 구원'을 주제로 논문을 쓴 것도 흥미롭다.

이번 소논문을 쓰고 소셜미디어에 공유했는데 "늘 갈증을 느끼던 주제인데 감사하다", "기독교인들에게 동물권을 이야기할 때마다 힘들고 속상했는데 소중한 글이다"라는 유의 댓글이 달렸다. 반응이 반갑기도 했지만, 신학적 배경에서 동물(권)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장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주류든 비주류든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서 동물신학을 논의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이야기가 거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제 만들어 가야 하는 단계라는 생각도 든다.

만약 내 소논문이 실제 신학계에 공유됐다면 크고 작은 부침이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현실 사회는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나 포스트휴머니즘과 같은 다음 단계의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그 이전 논의로 돌아갈 뿐, 현실에 대한 충분한 응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아직 소수지만 '탈인간중심주의'를 이야기하는 동물신학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시대에 응답할 수 있는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 대다수 기독교인은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창세기 말씀에 따라 다른 동물보다 인간의 삶을 최우선 가치로 여긴다. 동물신학이 이야기하는 '탈인간중심주의'는 어떤 점이 다른가.

생태신학에는 '청지기론'이라는 것이 있다. '청지기'라는 단어에는 우리에게 맡겨진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인간 위에 신이 있고 인간 아래에 자연이 있는 '위계'를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위계적 이분법에 저항하지 않으면, 자연을 타자화하는 시혜적 접근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면서 '인간이 죄에서부터 회복됐을 때에야 피조 세계도 회복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은,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돈다고 생각하던 시기에 형성된 논리다.

우리가 그동안 동물에 대해 가졌던 태도는 '힘없는 동물에게 잔인하게 굴면 안 된다'거나 '동물 같은 약자에게 함부로 하면 인간에게도 함부로 하게 된다'는 식의 윤리적 태도에 그쳤다. 그렇기에 동물이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비인간 동물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동물 해방과 인간 해방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테면, 도살장에는 저임금 이주 노동자가 대부분이고, 비인간 동물이 착취당하는 곳에서는 가난한 인간도 착취당한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탐욕 때문에 과거 '공룡 대멸종'과 같은 속도로 오늘날 생태계가 급격히 파괴되고 있고, 그 피해는 오롯이 빈곤한 이들이 감당하고 있다. 비인간 동물이 착취당하는 곳에서 인간도 착취당하는 일은 우연이 아니다. 인간이 포함된 동물이 갖는 '관계'가 무엇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동물을 '비인간 동물'로만 환원하면 이러한 문제들이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인이자 동물권 활동가인 사이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위계적 이분법을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사진 제공 DxE동물행동소모임
기독교인이자 동물권 활동가인 사이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위계적 이분법을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사진 제공 DxE동물행동소모임

- 동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일각에서는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데,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시각이다. 오히려 인간 구원은 동물 구원의 일부다. '동물의 구원'이란 창조의 동등성 속에서 개별 동물이 주체가 되는 구원이자, 동물의 관계적 구원을 의미한다. '인간·동물 이원론'과 '인간중심주의'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고, 동물의 구원을 상상하지 못하게 한다. 동물 이해가 새로워지면 동물의 구원에 대한 이해도 새로워질 수 있다. 인간과 비인간 동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개·돼지 등의 종이 있을 뿐이다. 창조자가 개별 동물을 동등하게 지었다면, 모든 피조물에게 각자의 구원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해다.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개별 동물들도 당연히 구원도 받을 수 있다.

- '관계적 구원'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나.

동물·생물은 단순히 분리돼 있는 개체가 아니라 자신만의 온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일례로, 국립공원 같은 보호 지역에 최상위 육식동물을 복원하면, 생태계 균형이 맞춰져 동·식물의 생물 다양성과 생물량이 늘어난다. 개체적으로만 인식하면 육식동물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약육강식'만 보이지만, 관계적 관점에서 보면 동물의 관계를 통해 동등한 운명 공동체 안에서 풍요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일이기도 하다. 어떤 육식동물이 인간의 가치관에 따라 '선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운명 공동체 안에서 그다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형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신성모독이라거나, 인간을 열등하게 여긴다며 반발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관계적 사고를 한다고 해서 인간만의 고유성과 개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걸까. 사이 활동가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은 모든 존재가 운명 공동체 안에서 그다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진 제공 DxE동물행동소모임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걸까. 사이 활동가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은 모든 존재가 운명 공동체 안에서 그다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진 제공 DxE동물행동소모임

- 논문에서 "예수가 돼지고, 돼지는 예수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 표현은 "예수가 민중이고, 민중이 예수다"라는 이해와 함께한다. 누가 민중인가. 돼지는 일생 동안 감금당하고, 이빨과 꼬리를 잘리고, 정신이 온전하지 않을 정도로 약에 절어 있다가 6개월 만에 살해당한다. 강제 임신으로 태어나 평생을 학대당하다 맑은 공기를 처음으로 마신 그날 기계에 잘리는 것이다.

나는 도살장에서 죽기 직전 동물들의 모습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비질(Vigil)' 활동도 하고 있다. 비질 현장에서 목격한 돼지는 우리와 같은 '동물'이 아니다. 인간이 누릴 잠깐의 미각적 쾌락을 위해서 도구화된 '상품'이다. 탄생의 존엄뿐만 아니라 죽음의 존엄까지 빼앗긴 가장 가난한 존재다. 그렇다면 예수가 이 땅에 왔을 때 누구와 동등해지고 싶어 하겠나. 예수야말로 성문 밖으로 가서 가장 가난하고 내몰린 이들과 평등한 공동 식탁을 차린 분이다. 그렇기에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의 주류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진정으로 가난한 존재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반려동물에게 안수 기도를 하거나 축복식을 하는 교회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인간종에 대한 안수나 축복도 동물종에 대한 안수·축복에 속해 있는 것이다. 위계적 이분법을 극복한 개념으로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한 인간의 개별 안수·축복이 있다면, 다른 비인간 동물의 개별 안수·축복이 있을 것이다. 또한 개별의 안수·축복 측면뿐 아니라 관계적 차원의 안수·축복이라는 이해도 필요하다.

억눌린 삶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해방
사이 활동가는 '탈육식'이 비인간 동물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사이 활동가는 '탈육식'이 비인간 동물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 동물권 활동가로서 채식을 실천하고 있다. 동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육식을 멈춰야 할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인간이 동물로서 가져야 하는 관계를 궁극적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비인간 동물도 인간에게 상해를 가하거나 인간을 잡아먹는 경우가 있다. 종말론적으로 완성된 사회가 오면 '인간이 비인간 동물을 먹는 것'도 건강한 관계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우리가 운명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향점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육식을 멈추는 것은 비인간 동물의 권리를 보장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육식주의 문화로는 위계적 이분법이 극복되지 않고, 공장식 축산 등이 야기하는 지구 생태계 파괴도 막을 수 없다. 당장 모두가 육식을 멈추지는 못하더라도, 공공 급식에서부터 채식을 확보하고, 공장식 축산과 동물원을 폐쇄하고, 세금을 더 부과해야 한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대안을 끊임없이 고민해 나가는 동시에, 우리가 이뤄 가야 하는 궁극적인 비전에 눈을 맞춰야 한다.

- 도살장 문을 가로막거나 육식당 등에서의 '방해 시위'를 두고 "폭력적이다", '선을 넘었다"는 반응도 있는데.

폭력이 무엇인지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과거 미국에서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흑인이 이용할 수 있는 좌석·화장실·식당을 따로 만들곤 했다. 그런 사회에서 흑인이 백인의 자리에 앉는다는 건 용납될 수 없는 '폭력'으로 여겨졌다. 일부 흑인들마저도 그런 생각에 동조했다. 그런데 정말 흑인이 폭력을 저지른 걸까. 백인들이 시혜적 관점을 가지고 위계적 이분법으로 나누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폭력이 반사된 것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정한 인간·동물의 위계적 이분법하에서는 '동물 해방 운동'이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억눌린 삶의 자리, 내몰린 위치에서 내는 목소리가 없다면 어떠한 해방도 성립할 수 없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동물권 운동을 하다 보면 차가운 반응에 부딪힐 때도 있다. 사이 활동가는 "폭력이 무엇인지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고 했다. 사진 제공 DxE 동물행동소모임
동물권 운동을 하다 보면 차가운 반응에 부딪힐 때도 있다. 사이 활동가는 "폭력이 무엇인지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고 했다. 사진 제공 DxE동물행동소모임

- 동물권보다 인권을 먼저 챙겨야 한다는 이들에게는 어떤 말을 전하고 싶나.

소수자 운동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일부 사람들은 자국민의 인권도 부족한데, 어떻게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을 챙길 수 있냐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국내 인권은 인권에 대한 국제적 합의가 있어서 생긴 것이다. 노예, 전쟁, 지배·피지배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국제적 인권 개념이 국내 인권을 촉진한 배경이다. 하지만 우리는 손쉽게 국내 인권과 국제 인권은 다르고, 국내 인권이 충분히 다 갖춰졌을 때 국제 인권도 신경 쓸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이런 사고는 관계성이 결여된, 위계적 이분법에 근거한 것이다. 동물의 관계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동물로서 인간의 권리, 즉 인권 역시 동물의 권리를 바탕으로 해서 나온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과 동물을 나누고, 인간은 당연히 동물이 아닌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비인간 동물의 현실이 나아졌을 때 정말 인간이 더 살기 힘들어질까. 때론 변화가 더딘 것처럼 보이고, 인간이 피해를 받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 역시 인간이라는 동물로서 인간종을 우선시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앙인이라면, 우리가 운명 공동체 안에 있고 함께 회복돼 가는 것을 소망해야 한다. 동물권 회복은 언제나 인권 회복의 가장 빠른 길이다. 인간의 권리는 동물의 권리가 보장될 때 함께 보장될 수 있다.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나는 동물권 활동가이자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동물의 교회'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교회를 세워 가고 싶다. 동물 해방을 얘기하는 것이 인간 해방을 얘기하는 것과 분리돼 있지 않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이해하는 교회, 남성·여성, 부자·빈자, 장애·비장애, 인간·동물 등의 위계적 이분법을 극복하고, 동물 해방을 위해 함께하는 공동체를 구체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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