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때쯤 연세 드신 신부님들께서는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셨는지 이사회에서 '앞으로도 10년 동안은 사목원(사목신학연구원)에 여학생은 입학할 수 없다'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어느 날 갑자기 여학생들 입학 시기가 다 다른데 한꺼번에 졸업하라고, 나가라고 통보를 받고 나오게 됐죠. '졸업장은 주겠다' 이렇게 결정이 났었어요."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22년. 대한성공회 최초 여성 사제 민병옥(카타리나) 사제가 신학교를 졸업한 후 성직자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그는 1977년 신학교를 졸업했지만 1999년에야 부제 서품을, 2001년에 사제 서품을 받을 수 있었다. 유명희(테레사) 사제는 1989년 신학교 졸업 후 사제 서품까지 15년이 걸렸다. 이들은 대한성공회 여성 사제 서품 20주년 기념 영화 '여성 사제'에 출연해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덤덤히 이야기했다.

서울주교좌성당에서 9월 4일 열린 대한성공회 여성 사제 서품 20주년 기념 감사 성찬례에 참석한 유명희 사제(사진 맨 앞). 뉴스앤조이 구권효
서울주교좌성당에서 9월 4일 열린 대한성공회 여성 사제 서품 20주년 기념 감사 성찬례에 참석한 유명희 사제(사진 맨 앞). 뉴스앤조이 구권효

여성 사제 서품은 그냥 얻어지지 않았다. 그 역사는 곧 대한성공회 여성 신학생들과 신자들의 투쟁기다. 여성도 사제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여성성직연구회·여성정책협의회 등을 만들어 자료를 수집하고 서명운동을 벌이고 여성 사제 서품을 청원했다. 그리고 '버텼다'. 전국여성성직자회 회장 민숙희(마가렛) 사제는 영상에서 말한다.

"끝까지 버텼기 때문에 가능했다, 단순하게. 그렇게 생각합니다. 막달라마리아가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은 여러 가지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저는 간단하다고 생각해요. 돌아가시고 나서까지 예수님 곁에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이 누가 있어요. 당연히 막달라마리아가 첫 증인이 되겠죠. 그런 것처럼, 선배님들도 이런 열악한 조건에서 자리를 떠나지 않았어요. 그분들이 눈물로 섰지만, 십자가의 빛을 우리에게 비춰 주신 선배들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한성공회 여성 사제 서품 20주년 기념 감사 성찬례 '우리들의 사제'가 9월 4일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열렸다. 여성 사제 10명과 이경호(베드로) 의장주교를 포함해 사제와 신자 40여 명이 모였다.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 사회복지시설에서 일하는 여성 사제들은 참석하지 못했다. 감사 성찬례 후 행사에서는 여성 사제 서품 20주년 기념 영화를 상영하고, 기념집 <우리들의 사제>(성공회출판사)를 소개 및 축복했다. 전국여성성직자회·여성성직자후원회·여성활동단체협의회 등 대한성공회 여성 단체들이 모든 과정을 준비했다.

이경호 주교는 감사 성찬례를 집전하기 전 "그동안 이 교회를 위해 헌신했던 여성들의 수고를 기억한다. 여성들의 헌신과 희생이 교회 안에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기억하고 감사드린다. 뿐만 아니라 여성 사제가 서품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들의 사제>를 축복할 때는 "(책을 통해) 여성들이 얼마나 교회를 위해 애쓰고 수고했는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지,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는지 다시 한번 살펴봤다. 한편으로는 남성 사제라는 것, 남성 주교라는 것 때문에 약간의 죄책감도 가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감사 성찬례는 대한성공회 이경호 의장주교가 집전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감사 성찬례는 대한성공회 이경호 의장주교가 집전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설교를 맡은 민숙희 사제는 "여성 성직이 허용됐다는 것은 단지 여성이라는 하나의 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소외된 작은 자들에게도 하느님께로 이르는 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 사제가 생겨났다는 것은 이미 만들어져 있던 견고한 울타리를 뛰어넘겠다는 선포다. 세상이 만든 울타리, 관습적인 교회가 말하는 경계, 이것을 넘어서라는 주님의 부르심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여성 서품을 가능하게 했던 모든 사람에게 감사를 전했다. 특히 여성 성직자를 자식으로 뒀다는 이유로 눈치 보고 가슴 졸였던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감사를 전할 때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감사 성찬례 후 축하 행사는 기념 영화 '여성 사제'를 상영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15분짜리 짧은 영상에는 여성 서품을 이끌어 낸 여성들의 노력이 담겼다. 마지막 부분, '사명'이라는 노래와 함께 여성 사제들의 사진이 스쳐 가는 장면을 보며 많은 참석자가 눈물을 훔쳤다.

민숙희 사제가 설교를 전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설교하는 민숙희 사제. 뉴스앤조이 구권효
참석자들은 함께 '여성 사제'를 시청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참석자들은 함께 '여성 사제'를 시청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우리들의 사제>를 대표 집필한 박미현(도미니카) 사제는 사역지인 일본 오키나와에서 영상을 보내왔다. 그는 대한성공회 여성 사제 '2호'로, 신학교 졸업부터 사제 서품까지 15년이 걸렸다. 박 사제는 "이 책은 대한성공회 모든 여성의 이야기로, 그들이 저자이자 주인공이다"라며 "여성 성직의 역사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활동하신 전도부인들로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에 전도부인들 이야기를 하나라도 더 찾아내 기록하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우리들의 사제>는 대한성공회 전도부인 역사에서 시작해 2020년 사제 서품을 받은 여성들 이야기까지 실려 있다. 여성 조직 결성 과정, 이들의 연대 활동 등도 비중 있게 담겼다. 중간중간 여성 서품 초기 사제와 선교사 등으로 활동한 여성들이 직접 쓴 이야기도 들어가 있다. 부록으로 박미현 사제가 쓴 논문 중 일부를 정리한 '성서는 여성 성직을 반대하는가'라는 글과 '세계 성공회 여성 성직의 신학적 근거와 현황'이 수록됐다.

국내외에서 축하 인사를 보내왔다. 대한성공회 대전교구장 유낙준(모세) 주교, 부산교구장 박동신(오네시모) 주교, 일본성공회 동경교구 첫 여성 사제인 사사모리 사제, 미국성공회 LA교구 다이앤 브루스 부주교, 영국성공회 첫 여성 주교인 리비 레인 주교가 영상으로 대한성공회 여성 사제 서품 20주년을 축하했다. 이들은 여성 사제들에게 주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계속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가라고 격려했다.

<우리들의 사제> / 대한성공회 전국여성성직자회 지음 / 성공회출판사 펴냄 / 198쪽 / 1만 4000원
<우리들의 사제> / 대한성공회 전국여성성직자회 지음 / 성공회출판사 펴냄 / 198쪽 / 1만 4000원
감사 성찬례에 참석한 여성 사제들과 신학생, 이경호 의장주교. 뉴스앤조이 구권효
감사 성찬례에 참석한 여성 사제들과 신학생, 이경호 의장주교. 뉴스앤조이 구권효

대한성공회 여성 사제 서품 20주년 감사 성찬례와 행사는 유튜브로 중계됐다. 대한성공회 여성선교센터 채널에서 다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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