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에는 뜻이 있다.' 때로는 이 말에 '아멘' 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신을 올바로 찬양하는 행위일 수 있다."

비아 출판사가 펴낸 <바다의 문들: 상처입은 세계와 하느님의 구원>을 읽고 마지막 페이지 여백에 적어 본 메모다. 저자는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David Bentley Hart, 1965~). 동방정교회 신자로서 대단히 주목받는 신학자이자 박학다문과 예리한 필력을 갖춘 문예비평가다. <바다의 문들>은 그의 주저主著는 아니지만, 쟁점을 에두르지 않고 사안의 본질 속으로 육박해 들어가는 그의 강단剛斷, 그리스도교 '정통(orthodoxy)'이 담지한 철학적 깊이 및 미학적 숭고를 공세적으로 시전하는 그의 활수한 스타일이 십분 발휘된 책이다.

'바다의 문들'이란, 하나님이 욥에게 하신 말씀에 나오는 표현이다. "바다가 넘지 못하게 금을 그어 놓고, 바다를 가두고 문 빗장을 지른 것은, 바로 나다. '여기까지는 와도 된다. 그러나 더 넘어서지는 말아라! 도도한 물결을 여기에서 멈추어라!' 하고 바다에게 명한 것이 바로 나다(새번역, 욥 38:10-11)." 바다가 제멋대로 땅을 덮쳐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끔 바다를 문 닫아 가두셨다는 말씀이다. 세상(cosmos)을 혼돈(chaos)이 뒤덮지 못하도록.

그런데, 그 문이 뜯겨 나간 듯 보인 일이 있었다.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서부 해저에서 발생한 초대형 지진으로 3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사망자 대부분은 지진이 일으킨 쓰나미로 목숨을 잃었다. 바다가 넘어온 것이다. 그어진 금을 넘어, 문빗장을 부숴 버리고서.

<바다의 문들 - 상처 입은 세계와 하느님의 구원> /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지음 / 차보람 옮김 / 비아 펴냄 / 196쪽 / 1만 3000원
<바다의 문들 - 상처 입은 세계와 하느님의 구원> /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지음 / 차보람 옮김 / 비아 펴냄 / 196쪽 / 1만 3000원

"그날, 신은 어디에 계셨는가?" 가공할 참사를 겪거나 목도한 인간은 묻게 된다.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든 있다고 믿는 사람이든 '인간'이라면 하게 되는 물음이다. 이 물음을 신학적·철학적으로 다루는 담론을 '신정론(theodicy)'이라고 한다. "만일 신이 있고, 그에게 악을 제거할 의지와 능력이 있다면, 어째서 이 세상에 악이 있느냐"는 물음에 답하려는 시도다. 여기서 '악'은 인간이 저지르는 죄뿐 아니라 자연재해 같은, 모든 '나쁜' 것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왜 악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을 그리스도교가 수세기 동안 그저 제쳐 두거나 억눌러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실 그는 진지한 신정론 토론장에 들어올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한 성격 하는 벤틀리 하트는 그런 수준을 여실히 드러내는 이들, 이를테면 인도양 쓰나미 사건 직후 대중매체에 기고한 이들을 향한 짜증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바다의 문들>의 주요 타깃은 그런 이들이 아니다. 벤틀리 하트가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것으로 보이는 이 책의 타깃은 오히려 그리스도교계에 속한 일부(대다수?) 설교자·신학자들, '짜증'을 넘어 '분노'를 자아낸 이들이다.

무엇이 벤틀리 하트를 분노한 이유는 그들이 '악에 분노하지 않는', '분노할 줄 모르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악이 있다는 건 곧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없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고함치는!) 이들은 적어도 악을 보며 경악할 줄 아는 이들이며, 그런 경악은 사실 그들 자신도 모르는, 그들 심부에 형성된 그리스도교적 에토스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고난을 두고서 자애롭고 전능한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거칠고 조잡하게 대항하는 무신론은 [사실] 가장 깊은 차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에 의해 형성된 것"(36쪽)이며, "무신론자가 도덕적인 이유로 신을 믿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한다면, 그는 사실상 그리스도교에서 선포하는 하느님께 예를 표하는 것"(39쪽)이다. 

반면, 많은 설교자·신학자들은 하나님을 '변호'한다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한다. 인도양 쓰나미 참사 후,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교훈"을,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운운하며 하나님을 옹호했다. 벤틀리 하트에 따르면, 이런 식의 신정론은 결국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든 악에 연루돼 있다는 말과 다름없다. 물론 하나님은 선하시지만, 선을 이루기 위해 악(죽음·고통·눈물)을 필요로 하셨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벤틀리 하트는 단호하다. 악은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일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요일 1:5)".

신을 절대적으로 선하고 전능한 존재로 보는 믿음은 인간이 자연이나 역사를 관찰해 이끌어 낸 결론이 아니다. 그럴 리가 만무하다. 세상은 '희생'의 논리가 지배한다. 자연의 순환과 역사의 진보를 위해서는 희생이 불가피하다. 이것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타락'한 질서로 규정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고후 4:6)이 우리 마음에 비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연과 역사의 내적 논리에 복종하지도 않으신다. 오히려 그분은 '빈 무덤'이라는 (자연 질서와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부조리, 혹은 격노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에게로 향하는 길을 열어젖히신다(138쪽)".

벤틀리 하트는 악을 대가로 실현되는 신의 구원과 영광을 거부한 이반[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반역'을 "참된 '반역자'인 그리스도를 칭송하는 기이한 성가"(64쪽)로 평가한다. 이반은 잔혹하게 살해당한 아이의 죽음 같은 비극이 종국에는 해명되리라고 믿었지만, 결국 '한 소녀의 눈물'이라는 대가를 치르고서야 실현되는 그런 종류의 조화·화해·행복을 온몸으로 거부하게 된다. 무고한 아이의 고통을 의미 있고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한다. 벤틀리 하트는 신에 대한 이반의 '반역'을 절대주권자로 상정된 신 앞에 부복하는 이들의 '경건'보다 더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본다.

그리스도교에서 악은 해명돼야 할 무엇이 아니라, 격퇴해야 할 것이다. 형이상학적 '문제'가 아니라 영적 '원수'다. 벤틀리 하트는 (많은 신학자를 불편하게 만들겠지만) "분명 신약성서에는 일종의 '잠정적인(provisonal)' 우주적 이원론이 있다"(92쪽)고 말한다. 이 책의 신학적 핵심은 다음 구절에 담겨 있다.

"복음의 핵심에는 뿌리 뽑을 수 없는 승리주의, 하느님의 뜻은 궁극적으로 패할 수 없으며 이미 악과 죽음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다는 확신이 존재한다. (중략) 그러나 이 승리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승리다. 현재 우리는 어둠과 빛, 거짓과 진리, 죽음과 삶의 투쟁 가운데 살고 있다. (중략) 하나님의 영광은 우주 혹은 인간의 역사에서 곧바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영광은 역사 앞에, 역사와 나란히, 역사 너머에, 혹은 지연된 상태로 있다." (97~99쪽)

현 세상(aeon)은 전쟁 중이라는 신약성서의 언어를 단순한 비유로서 아니라 신학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직접적·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 하지만 섭리란 그 어떤 악도 하나님의 목적을 좌초시킬 수 없다는 말이지, 하나님의 목적이 이뤄지기 위해 악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악을 볼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그런 일들이 '필요'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용하실 수는 있지만 악 그 자체는 결코 하나님이 뜻(의도·허락)하신 것이 아니다. (벤틀리 하트는 하나님의 섭리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제1원인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으로서, 제2원인들, 즉 피조물의 영역에서 작용하는 유한하고 우연한 원인들을 초월한다고 설명한다.)

'섭리'에 대한 오해는 하나님을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혼종 괴물로 만든다. 세월호 참사 직후인 2014년 5월 11일 서울의 한 대형 교회 강단에서는 이런 설교가 행해졌다.

"하나님이 공연히 이렇게 (세월호를) 침몰시킨 게 아니에요. 나라를(가) 침몰하려 하니 이 어린 학생들, 이 꽃다운 아이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준 것이에요."

2014년 5월 11일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현 원로목사)는 세월호 참사를 언급하며 하나님이 침몰시켰다는 취지로 말해 논란을 샀다. 명성교회 홈페이지 설교 영상 갈무리
2014년 5월 11일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현 원로목사)는 세월호 참사를 언급하며 하나님이 침몰시켰다는 취지로 말해 논란을 샀다. 명성교회 홈페이지 설교 영상 갈무리

진의를 떠나, 이 발언은 벤틀리 하트가 표적으로 삼는 신정론의 얼굴을 선명히 보여 준다는 점에서 복기할 가치가 있다. 벤틀리 하트는 우리가 이런 설교에 "아멘"이 아니라 "No!"라고 외쳐야 해야 한다고 믿는다. No! 하나님이 선한 뜻이 있어 세월호 침몰을 설계하시거나 허락하신 것이 아니다! 그런 신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약 1:17),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참 하나님이 아니다.

설교자들은 위로를 목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죽은 아이들의 부모 앞에서도 그렇게 설교할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벤틀리 하트는 "다른 이의 슬픔을 덜어 주기 위해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말은 자신의 경건함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도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된다"(136쪽)고 말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 뜻이라는 말은, 비극의 당사자가 아니라 참관자를 위로하려고 하는 말일 뿐이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는 말은 일견 대단히 경건해 보인다. 하지만 이는 거짓 경건이다. 악도 하나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된 경건은 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악에 저항하고 싸우고 분노한다. 벤틀리 하트는 목회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악을 경험한 이, 고통 중에 있는 이를 위로할 때 하느님의 '더 큰 계획'이나 하느님의 뜻이 지닌 신비를 들먹이며 진부한 위로를 하지 않기를 간청[합니다.] (중략) 저는 모든 성직자가 [복음의] 이 노골적인 승리주의, 고통과 죽음을 향한 진심 어린 분노, 거리낌 없는 분노야말로 그리스도교가 제시하는 희망의 가장 확실한 토대(그리고 슬픔에 대한 적절한 반응)라는 점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159쪽)

나는 이 "고통과 죽음을 향한 진심 어린 분노, 거리낌 없는 분노"의 전범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사로의 죽음을 두고 사람들이 애곡하는 현장에 오신 예수께서는 "심령에 통분히 여기"(요 11:33)셨다. 이때 "통분히 여기다"로 번역된 '엠브리마오마이'는 직역하면 "화가 나 씩씩거리다"라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분노하셨다. 사랑하는 이에게서 사랑하는 이를 빼앗아가는 사망·지옥·마귀 권세에 분노하셨다. 그리고 분노에 찬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5).

죽음의 현실 앞에서 분노의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죽음 앞에서 의연한 현자·철학자들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미화하는 현자·철학자가 아니라 죽음과 싸워 이기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용사(dragon-slayer)'이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고통 가득한 세상을 향해 선포하고 노래하는 소망이다. 장차 하나님께서는 모든 우는 이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며,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새롭게 하실"(계 21:4-5) 것이다.

이와 같은 "산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의 영적 상상력이 악에 압도당하기를 거부한다.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형이상학은 악에 그 어떤 실존적 의미도, 구원사적 역할도, 존재론적 지위도 부여하지 않는다. 악은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있는' 것은 선이며, 악은 '선의 부재(privatio boni)'일 뿐이다.

인도양 쓰나미, 아우슈비츠, 세월호 참사 같은 가공할 악이 고작 '선의 부재'일 뿐이냐고 반문하는 이들은 아직 선의 가공할 광휘에 상상력이 압도당해 본 체험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선의 결여는 실로 가공할 만한 무엇이다. 모든 선이 흘러나오는 원천이자 선 자체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악의 부재'로서의 선을 알 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알아 갈수록 우리는 불가해한 악 앞에서 더욱 담대히 묻게 된다, "하나님, 어디에 계시나이까?"라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이 물음에 하나님은 답하셨다.

"제삼일"에,
신학·철학이 아닌 '사건'으로,
"'빈 무덤'이라는 (자연 질서와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부조리, 혹은 격노를 통해".

이종태 /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장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미국 버클리GTU(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기독교 영성학으로 철학박사(Ph. D.) 학위를 받았다. <순전한 기독교>·<고통의 문제>·<시편 사색>·<네 가지 사랑>·<인간 폐지>(홍성사), <다윗 -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가르침과 배움의 영성>(IVP),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복있는사람)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현재 한남대학교 탈메이지교양교육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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