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다의 마지막 왕들

요시야는 애석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는 기원전 609년 므깃도 전투에서 바로 느고에 의해 죽습니다(왕하 23:29, 대하 35:20-24). 유다를 총체적으로 새롭게 하려던 그의 개혁은 끝나고 요시야가 죽자 '그 땅의 백성들'(암 하아레츠)은 요시야 넷째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위에 올립니다(왕하 23:30-31). 그는 겨우 3달 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이집트 바로 느고에 의해 오론테스 강변 리블라 지역 감옥에 갇힙니다. 은 100달란트와 금 1달란트의 벌금이 유다에게 부과됐고 여호아하스는 이집트에서 죽었습니다(왕하 23:33-34). 선지자 예레미야는 동포들에게 전사한 요시야 왕이 아니라 살룸(여호아하스)을 위해 애곡하라고 충고합니다.

이때부터 유다 왕국의 치욕스러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바로 느고는 요시야의 둘째인 엘리아김을 왕으로 삼고 여호야김이라 이름을 바꿉니다(왕하 23:34). 유다는 힘이 없어 다른 나라가 왕을 결정하는 부끄러운 처분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야김은 11년 통치 기간 내내 친이집트 정책을 폈는데, 이집트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그 땅의 백성들'에게 특별 조공을 내도록 했습니다(왕하 23:35). 암 하아레츠에게 무거운 경제적 짐을 지워 다시는 세력화하지 못하게 하려는 이집트의 의중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야김은 4년 동안 충성스런 이집트의 봉신으로 섬기면서 이집트가 바벨론 제국에 맞서 유다를 지켜주리라 생각했으나 예레미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봤습니다. 예레미야는 세계정세를 파악하는 특출한 시각으로 유다가 바벨론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레미야 가족은 아마도 유다 고위 관리였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아버지(힐기야)는 요시야 개혁 당시 대제사장 이름과 같고(렘 1:1, 왕하 22:4), 그의 숙부(살룸)는 여선지 훌다 남편과 이름이 같습니다(렘 32:7, 왕하 22:14). 살룸의 아들(예레미야의 첫 번째 사촌?) 마아세야는 방을 지키는 제사장 관리였으며(렘 35:4), 살룸의 또 다른 아들 스바냐는 대제사장 다음가는 인물이었습니다(렘 21:1).

바벨론에서는 느부갓네살 2세(기원전 605년~기원전 562년)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신바벨론 제국 2대 왕으로 기원전 605년 5월경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를 무찌르고(왕하 24:7) 기원전 604년에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합니다. 위기를 느낀 예루살렘에서는 금식이 선포되고(렘 36:9) 여호야김은 친이집트 성향인데도 3년간 느부갓네살에게 굴복하고 그의 봉신이 되었습니다(왕하 24:1). 느부갓네살이 기원전 602년~기원전 601년 겨울에 이집트를 침공하러 갔다가 패하자, 기회를 엿보던 여호야김은 바벨론에게 바치던 조공을 중지하고 느고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벨론에 대항하는 연합 전선에 섰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기원전 598년~기원전 597년에 여호야김이 조공을 거부한 일에 대한 복수를 위해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 여호야김은 이 일이 있기 얼마 전인 기원전 598년에 죽었는데 아마도 살해된 듯합니다.

라기스에서 발견된 22개의 오스트라카는 남 유다의 마지막 날들(기원전 586년)에 라기스에서의 전쟁을 묘사합니다. 대부분은 라기스와 예루살렘 사이 주둔지에 있던 군대 장관 호샤이야가 라기스의 군대 장관 야오쉬에게 쓴 글들로 보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에게 바로 이날 좋은 일이 있게 하길 기원합니다. 이제 나의 주께서 쓰셨던 것처럼 당신의 종이 행했습니다. 나는 나의 주께서 지시한 대로 문에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주께서 벳 하라피드(장소가 밝혀지지 않은 요새)에 관해 쓰셨던 것처럼 거기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 (중략) 나의 주는 우리가 주께서 지시한 모든 신호대로 라기스에서 보내는 신호(봉화)를 보고 있음을 알고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아세가를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기록이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나옵니다.

"그때에 바벨론의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남은 모든 성읍들을 쳤으니 곧 라기스와 아세가라 유다의 견고한 성읍 중에 이것들만 남았음이더라(렘 34:7)."

기원전 598년 여호야긴은 18세로 왕이 됩니다(역대하 36:9에서는 8세). 여호야긴은 겨우 3달 동안 왕위에 있었으며(왕하 24:8) 바벨론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재위 7년인 기원전 597년 3월 16일, 예루살렘은 별다른 저항없이 항복하고 맙니다. '바벨론 연대기'에서는 유다를 진압한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7년, 그슬레브 월: 아카드 왕(느부갓네살)은 군대를 이끌고 하티 땅으로 진격하여 유다 성(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아달월 제2일에 그 성을 함락시키고 왕(여호야긴)을 사로잡았다. 그는 그곳에 자신이 좋아하는 왕(시드기야)을 임명하였고 거기에서 많은 전리품을 바벨론으로 가져왔다."

기원전 597년에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을 비롯한 왕족, 왕실 인사들, 지도층 주민과 기술자를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포로 수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 열왕기하 24장 12절에는 첫 포로 10000명, 열왕기하 24장 16절에는 8000명, 예레미야서에는 3023명이라고적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요시야 셋째 아들인 여호야긴 삼촌 맛다니야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치고 왕위에 앉힙니다(왕하 24:17). 20세에 왕이 된 그는 11년간 예루살렘을 다스렸고, 후에 바벨론에 대항하여 군사 반란을 일으킵니다. 느부갓네살은 시리아-팔레스타인에서 계속 군사행동에 주력했고, 기원전 601년~기원전 600년의 바벨론 패배를 기억하던 유다와 팔레스타인 국가들은 상황을 낙관적으로 본 것 같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이집트를 침공하려다 몇 안 되는 패전을 경험했던 기원전 601년~기원전 600년에 이집트는 잠깐이나마 재기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는 느고의 후계자인 프사메티쿠스 2세(기원전 595년~기원전 589년)와 성서에 호브라(렘 44:30)로 나오는 아프리에스(기원전 589년~기원전 570년)의 통치 아래 야심과 위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에서 기원전 595년~기원전594년 일어난 반란 소식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는 기원전 594년에 반란을 도모하기 위한 국제 공모자 회의를 예루살렘에서 열어 에돔·모압·두로·시돈 대표를 불렀던 것 같습니다.

"유다의 왕 시드기야를 보러 예루살렘에 온 사신들의 손에도 그것을 주어 에돔의 왕과 모압의 왕과 암몬 자손의 왕과 두로의 왕과 시돈의 왕에게 보내며(렘 27:3)."

하박국, 에스겔

기원전 587년~기원전 586년 8월, 예루살렘과 성전은 모두 파괴되고 맙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시위대장에게 속한 갈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으며(왕하 25:8-10)."

하박국은 통제 불능의 세상에서 여호와의 통치를 갈망한 예언자였습니다. 유다 공동체의 사악함 또는 아시리아의 광폭함은 하나님의 도구인 바벨론에 의해 응징됩니다. 그러나 바벨론 역시 영구적인 해결책은 아니었습니다(합 2:4). 진정한 해결책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뢰에 달려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착취하는 권력자들과 혼합주의 신앙을 가진 이들을 심판하고 회복하러 올 것입니다. 하박국은 나라가 멸망하는 순간에도 진정한 기쁨은 재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자체에 있다고 선포합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에스겔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조국 유다의 피할 수 없는 멸망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그는 기원전 593년~기원전 571년에 바벨론 포로들 가운데 살면서 활동했습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아마도 여호야긴과 함께 기원전 597년에 포로로 잡혀 바벨론에서 생활했을 것입니다.

에스겔은 일종의 '시온신학'(곧 유다, 예루살렘, 성전, 다윗 왕조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는 영원하리라는 믿음) 옹호자들의 반발에 직면했습니다. 에스겔은 극단적이고 대담한 행동으로 여호와의 구원이 취소될 수도 있다고 외쳤습니다(겔 4장).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편협한 종교 제도와 정치체제로 여호와 하나님을 속박하거나 제한할 수 없었습니다(겔 20:23-26). 유다는 물론이고 바벨론도 세계를 통치하고 주관하는 신이 여호와인 줄 알아야 했습니다. 겉보기와 달리 바벨론 침략과 파괴도 여호와 심판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다윗 왕조를 상징하는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여호와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마저 파괴될 수 있었습니다(겔 33:21). 에스겔은 이스라엘 땅을 향한 여호와의 심판과 진노를 선포합니다. 예루살렘 멸망과 파괴는 여호와의 무능력함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왕은 애통하고 고관은 놀람을 옷 입듯 하며 주민의 손은 떨리리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심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겔 7:27)."

왕국시대 이스라엘의 종언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왕을 향해 이스라엘의 종말을 애통해합니다.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렘 22:29-30)."

예루살렘 함락은 유다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이었으며, 먼저 포로로 끌려간 포로들은 항의와 절망이 가득한 넋두리를 토해 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시 137:1-5)."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게 끝났을까요? 삶은 계속됐고 여호와의 통치는 이어집니다. 포로로 잡혀간 이들은 사회·정치적 정체성을 잃지 않았으며 여호와 신앙은 깊이가 더해 갔습니다. 예루살렘은 파괴됐지만 남아 있는 자들이 폐허 속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지켜 가고 있었습니다. 에스겔이 속해 있던 바벨론 포로들과 예레미야가 속해 있던 이집트 포로들은 고통과 더불어 나름대로 예배 생활과 희망의 싹을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포로들에게도 찾아가는데, 여호와는 어떠한 제도나 상황에 제한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백성을 향한 무거운 책임감과 여호와를 향한 순수한 신뢰가 있는 곳이라면 시공간의 제약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비록 인간 왕정王政은 끝났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왕정은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의 백성이 아닌(삼상 8:17), 여호와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렘 30:22).

눈여겨볼 것은 기원전 8세기~기원전 7세기 유다 지역에서는 형상이 있는 인장印章에서 현상이 없는 인장으로 변화됩니다. 여호와만 섬기라는 유일신 운동의 영향이 컸기 때문입니다. 일월성신 형상이 아시리아인과 접촉하면서 급격하게 증가했다가 기원전 7세기 후반에 이르면 자취를 감춥니다.

마찬가지로 여러 성소(산당)에서 신상 수천 개가 발굴되었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뿐만 아니라 다른 신도 섬겼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놀라운 점은 예루살렘 멸망으로 성전이 파괴된 뒤에는 신상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신을 섬기던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성전 파괴 뒤 비로소 유일신 신앙을 지켰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팟빵 '에르고니아 라디오' 채널 바로 가기: http://www.podbbang.com/ch/12827
*유튜브 채널 '에르고니아' 바로 가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Pw8sxRrpaJba1RXI97GwSA
박태순 / 새들녘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신학 아카데미 에르고니아에서 신학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참고문헌

1) Lester L. Grabbe, 『고대 이스라엘 역사』, 류광현 외 1인 역, (서울: CLC, 2012)
2) Walter Brueggemann et al., 『구약신학과의 만남』, 차준희 역 (서울: 프리칭아카데미, 2007)
3) Hershel Shanks et. al., 『고대 이스라엘』, 김유기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5)
4) Phillp J. King, Lawerence E. Stager, 『고대 이스라엘 문화』 (서울: CLC, 2016)
5) David W. Baker et. al., 『현대 구약성서 연구』(서울: 새물결플러스, 2019)
6) André Lemaire, "The Universal God: How the God of Israel Became a God for All," Biblical Archaeology Review 31:6, November/December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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