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까지 기록으로 남겨진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은, 지난 150년간의 쐐기문자(cuneiform)의 발견과 학자들의 판독을 통해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비로소 그 실체가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고대에 수메르 인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 자체를 아무도 몰랐다하니, 역사의 무상함에 할 말을 잃을 뿐이다. 놀랍게도 이들의 문명은 기원전 3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로서는 까마득하게 여겨지는 그 당시에 수메르 사람들은 이미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로써 기원전 600년 이전의 역사에 대해 성서고고학이 독점하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는 수메르의 발견을 통하여 아득한 먼 옛날 인류의 조상들이 어떠한 생각과 생활을 하였는지를 보다 더 생생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수메르인들의 기록과 연대는 아브라함 시대보다 수세기 앞서는 것이며,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인간 세상에는 이미 고도로 발전된 문명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이제는 수메르 문명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 없이 구약성서를 이해하기란 억지를 부리지 않는 한,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예컨대 고고학적인 작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얼른 생각해도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의 기록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우르(우르크)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나아갔는데, 본디 우르 사람이었던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적에 어느 나라의 말로 말을 했을 것이며, 그가 썼던 문자는 어떤 것이었겠는가? 과연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우르를 아예 떠났기 때문에 그네들 문명과는 철저한 단절을 한 채, 그저 백지 상태에서 가나안 문화를 받아들였을 뿐일까? 틀림없는 사실은 그는 가나안 땅에서 외국인으로 들어가 살았던 것이고 그의 사고는 상당부분 수메르 문명의 영향하에 놓여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분명히 수메르 문명이 성서학자들에게 안겨준 충격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진흙으로 인간을 빚어 만들어낸 창조 이야기, 에덴설화, 노아홍수 이야기, 함무라비 법전보다 무려 300년이나 앞선 인류 최초의 법전인 우르-남무 법전(BC 2050), 바벨탑 사건, 수메르의 욥기, 그리고 수메르 아가서...성서의 수많은 내용들이 수메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수메르가 끼친 영향이 수 천년 동안 망각되어 왔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역사의 단절, 전이, 발견, 변화, 연속의 흥미진진한 과정을 새삼 깨닫는다. 인류 역사에서 까마득히 잊혀져서 도무지 기억의 언저리에 남아 있지도 않았던 사실들을, 발굴과 판독 작업을 통해 이전의 기록들을 뒤엎고 인류 역사를 다시금 재구성한다는 것처럼 매력적인 일도 드물 것이다. 그러기에 저자의 고백에 따르면, 지금도 수메르 학자들은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인류의 기억에서 무려 2000년 이상이나 지워진 고대 수메르의 흔적들을 파헤치는 데 여념이 없다고 한다.

나는 신대원에서 강사문 교수의 '고대근동문학' 강의를 들으면서 수메르에 대해 처음으로 접하였다. 그 강의 시간은 보수적인 학생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과 반발의 연속이었다. 지금까지 알아왔던 성서에 대한 위상이 심하게 뒤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발표를 맡은 주제는 '노아 홍수'에 대해서였다. 수메르의 지우쑤드라 이야기와 바빌로니아 홍수이야기인 길가메쉬 서사시를 성서의 노아 홍수 이야기 비교 대조하였는데, 그 부인할 수 없는 내용의 흡사함에 매우 놀랐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컨대 탈경전적 성서 읽기의 당위는 구약성서의 형성 배경을 통해 이미 제기되고 있다고 보이며, 근래 심각히 일고있는 종교 다원주의 문제까지도 구약세계에서 이미 논의될 수 있는 근거가 많다고 생각한다. 우가릿 문헌에 의해 밝혀진 바,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만신전 최고의 신 '엘'(El)을 '야웨' 신을 섬기던 아브라함 부족이 받아들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마저도 점진적인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걸치고 있음을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알 수 있게 되었지 않는가.

이제는 성서의 유일성에 대한 시대착오적 주장만을 되풀이하며 경전성 수호에 목숨을 거는 무모한 자세에서 탈피해야한다. 그리고 더욱 성숙된 자세를 가지고 성서 자체가 수 천년에 이르는 인류의 여러 문명들에게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보다 진일보된 신학적 사고를 할 수 있으리라.

[역사는 수메르에서..]의 저자는 수메르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이며 펜실바니아 대학 아시리아학 명예교수이다. 그는 발굴된 점토판을 판독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이 책을 통해 수메르 문명이 인류에게 안겨준 39가지 최초의 기록들을 여러 가지 풍부한 자료를 통해 제공해 주고 있다. 수메르의 기록들은 죄다 '최초의'라는 수식어를 꼭 붙이고 다닌다. 이를테면 최초의 학교, 최초의 촌지, 최초의 청소년 문제, 최초의 창조론, 최초의 농업서, 최초의 판례, 최초의 노아, 최초의 도서목록, 최초의 메시아, 최초의 마라톤 우승자, 최초의 노동자 승리......등등 이런 식이다. 역자에 따르면 저자는 한 문장을 거의 반장 분량까지 늘여 쓸 정도 만연체를 즐겨 쓴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역자의 뛰어난 번역 실력 덕분에 아주 쉽고 간결하게 옮겨진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번역자의 수고에 감사할 따름이다.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이들은 다음의 책들을 더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알란 밀라드, [성서시대의 보물들], 바오로딸(1992)
조철수, [메소포타미아와 히브리 신화], 길(2000)
조철수, [수메르 신화], 서해문집
안성림·조철수 공저, [사람이 없었다 신(神)도 없었다], 서운관(1995)
장일선, [구약세계의 문학], 대한기독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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