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개혁실천연대와 평화나무가 2019년 9월 공동 개최한 교단 총회 참관단 출범 기자회견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에 대해서는 명성교회 세습 문제를, 예장합동의 경우 여성 안수에 관해 들여다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나는 기자회견에서 "합동 총회는 여성 안수를 허하라"고 발제했다. '여성 안수'라는 말을 들으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일 때, 당시 총장이었던 고 김의환 목사가 "여성 안수(페미니즘)=자유주의자"라는 프레임을 교단 정치 이슈로 삼아, 여성 안수에 호의적이었던 몇몇 총신대 교수들과 여학생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었던 일이 생각난다.

나는 이러한 가부장적 신학과 교회 문화로부터 극심한 좌절과 저항을 느끼게 되어, 총신대에서는 처음으로 '교회 여성 리더십'이라는 주제로 실천 신학 박사 논문을 썼다. 그 후, 총신대와 총신대 신대원에서 7년간 '현대사회와 여성', '한국 사회와 여성 문제', '개혁주의 여성 리더십'을 강의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2016년 2월 말, '여성 안수'를 주장하는 자로 낙인찍혀 강의가 박탈되는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되었다.

총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학생을 가르치면서 느낀 문제점은 총신대는 사립학교로 교육 기본법인 남녀평등 정신과 남녀고용평등법을 준수해야 하는데도, 여성 안수와 관련해서는 '합동 교단 총회법'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총신대와 예장합동에서는 여성들이 성차별적 대우를 받아도 어떠한 조치나 보호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현재 총신대는 남성과 똑같이 여성에게 신학 박사 학위를 수여하면서도 안수를 주지 않기 때문에, 대학교와 신학대학원의 신학과에 여성 교수는 한 명도 없다.

'남성 안수', '남성 목사'라는 말은 없는데, '여성 안수', '여성 목사'라는 말이 지금까지 신학적 의제가 되어 왔다는 건 남성 중심의 직제 이후로, 성경적·신학적·목회적인 모든 담론에서 남성이 주도권을 행사해 왔음을 입증하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여성 안수'라는 말은 성경은 없다. '안수하다'라는 단어는 구약적 개념이다. '안수받다'는 '기름부음 받다'의 의미로 왕, 제사장, 선지자들에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도 디모데전서 4장 14절, 5장 22절, 디모데후서 1장 6절에 '안수'라는 단어가 나오긴 하지만, 사복음서나 신약성경 전반에서는 '안수'라는 말보다는 '제자'와 '증인'이라는 단어가 더 많이 부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안수받은 자'가 전해 준 게 아니라, 예수를 목격한 남녀 증인과 제자들이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하도록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마 28:18-20, 막 16:9-20, 눅 24:44-53, 요 21장, 행 1~3장). 또한 '목사'는 'shepherd', 'pastor'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신적 권위나 신분 변화라기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며 그대로 실천하고 모범을 보여야 할 책무와 전문성을 지닌 자들로 이해된다(엡 4:11, 벧전 5:2-4).

예장합동은 '여성 안수 불가'는 '성경적'이며, '만고불변한 진리'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한스 큉(Hans Küng)은 여성 성직이 신율(divine law)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법(human law)의 문제라고 했다. 그는 오늘날 학문과 문화, 국가와 사회에서 여성의 달라진 위치로 볼 때, 교회에서도 여성에게 합당한 위엄과 사회적 지위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 월터 라이펠트(Walter Liefeld)는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 근거해, 현대 교회 내에서 여성의 가르침을 제한하는 것은 잘못된 적용이라고 말한다. 정경 완성 이후 가르침의 권위는 교사에 있지 않고 '성경 말씀' 자체로 옮겨졌기 때문에, 현대 교회에서도 권위의 올바른 위치는 말씀에 있지 목사나 장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2)

현재 총신대와 예장합동에 여성 관점의 성경 해석이 없는 상태에서 '여성 안수 반대'를 '성경적'이라고 논리를 대는 것은 가부장적 성경 해석만을 절대화하는 잘못된 적용이다. '여성 안수 불가'의 심각성은 단지 목사 직위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남성 권위주의에 의한 힘의 불균형, 젠더 감수성 결핍, 여성의 존재 의미 박탈, 여성의 정체성 부정 등으로 인간성 상실을 야기한다는 데 있다. 현재 총신대와 예장합동은 페미니즘을 "신학계와 교회를 무너뜨리는 불온하고 위험한 자유주의 이념"으로 거부하고 있다. 예장합동이 '성경적'이라고 내세우는 '여성 안수 반대'라는 해석은 '여성 됨'에 대한 주체적 물음을 강조하는 '페미니즘'(feminism) 부재가 원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여성 안수에도 '성경적 페미니즘'(biblical feminism)3)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성경적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는 복음주의 학자 존 스토트(John Stott)가 엘레인 스토키의 <페미니즘의 옳은 점 What’s Right with Feminism>이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사용한 용어다. '성경적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에 담겨 있는 '여성 됨'에 대한 여성 스스로의 질문이 곧 '인간 됨'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성경을 통해 여성의 정체성과 여성의 역할을 기독 여성 스스로 규정하려는 이념"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성경적 페미니즘은 여성의 성경 읽기를 통한 여성의 하나님 찾기와 여성의 정체성과 역할을 찾는 방향타요, 교회의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리트머스시험지요, 남녀평등과 젠더 정의, 종국에는 하나님 형상 회복 즉, 인간성 실현을 위한 인식론적 혁명이라고 본다. '성경적 페미니즘'은 여성의 성경 읽기를 통해 하나님과 여성, 여성과 피조 세계, 그리스도의 복음과 여성, 그리고 남녀로 이뤄진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과 역할이 어떠해야 할지를 읽어 내는 '또 다른 관점'이다.

성경적 페미니즘에 근거한 '여성 안수'가 왜 필요한지는 예장통합 교단의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예장통합에 속한 여성들은 목사가 되어도 여전히 남성 목사들의 보조적 역할이나 '주변 리더십'에 머물거나, 사례비와 처우 문제, 사역 배정 등에서 성차별적 목회 현장을 경험하고 있다고 보도된 바 있다(<한국기독공보> 제3136호). UN의 '새 천년 개발 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의 주요 과제는 성평등과 여성의 역량 강화라고 한다. 최근 남성 대 여성의 50:50의 대표성을 구성하려는 '남녀 동수법'이 선출직 공직과 정부 내각, 세계교회협의회나 아시아교회협의회에서도 권장하는 추세다. 여성의 주체성과 대표성을 확보한 '여성 안수'가 이뤄질 때, 비로소 복음의 역동성과 하나님나라 구원의 인격성은 실현될 수 있으리라 본다.

여성 안수의 성경적 당위성

성경은 남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여성에 대해 열려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인의 후손'으로 유대 가부장 사회에서도 여성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셨으며, 여성을 증인과 제자로 세우셨다. 성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가부장적 구속사로만 이뤄진 게 아니라, '산 자의 어미(the mother of all the living)'인 하와, '열국의 어미'인 사라, '천만인의 어미'인 리브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탄생시킨 라헬과 레아와 함께 이어 간 구속사를 말씀하고 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로 이어지는 구속사를 보더라도, 룻, 라합, 다말,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같은 여성 게다가 이방 여인들이 열거되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마태복음 1장). 하지만 지금까지 가부장적 성경 해석은 남성이 하나님을 만나면 특별계시로 해석하는 반면에, 여성이 하나님을 만나면 일반계시로 축소하거나 배제해 버렸다. 성경에 나오는 한나, 라합, 룻, 에스더와 같은 여성들의 주체적이며 독보적인 신앙적 행위를 단지 남편과 아들에게 종속되는 '현모양처'라는 가부장 성 역할로 획일화해서, 여성이 만난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인간관계의 중요성, 기독 신앙과 성性의 관련성, 성 윤리와 여성 리더십을 간과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 복음 사역의 증인과 제자가 맡는 역할을 보면, 사복음서가 모두 남성 제자들이 썼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성육신 탄생과 어린 시절과 생애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유일한 증인이며, 그가 예수의 참된 인간성을 증언한 독보적인 여성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유대 가부장 사회에서 예수님이 열두 사도를 모두 남성으로 세웠다 하더라도, 십자가의 증인이 되지 못한 열두 제자를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세울 수 없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남성 제자만이 증인이 되는 게 아니라, 여성 제자도 증인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부활의 최초 증인이 '여성'이라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현장에서 희롱과 모욕, 침 뱉음과 채찍질, 십자가 처형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의 "내가 주를 보았다"(요 20:18)라는 독보적인 부활 증언에 우선권이 있으며('사도 중의 사도'), 이 부활 증언에 따라 신앙과 불신앙이 가려진다는 것(막 16:9-14), 이 부활 복음을 토대로 교회의 설립이 촉진되었다는 점은 교회 여성 리더십의 중요한 모델이자 근거가 된다.

총신대와 예장합동에서는 고린도전서 11장 2-16절, 14장 33-36절, 디모데전서 2장 8-15절을 '여성 안수 반대'의 근거로 들면서, "존재론적 동등성, 기능적 종속"이라는 성경 해석을 내놓는다.4) 여성 안수를 허락한 교단과 신학계에서는 이 본문들에 대한 논의가 이미 끝난 상태인 반면, 현재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예장합동·합신·고신은 '여성 안수'에 대해 신학적 논의조차 하지 않고 있다.

고린도전서 11장 3절의 '케팔레'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여성 안수 유무'가 결정된다.5) '케팔레'에는 은유적으로 통치자, 지도자 혹은 '원천'의 뜻이 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문맥의 연관성과 문법적 해석을 고려할 때, '원천'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10절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두어야 한다"는 구절은 '케팔레'가 여자의 머리이며, '엑수시아'는 능동적 의미의 권위를 말하기 때문에, '권세 아래에 있는 표'라는 수동 의미의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다. 따라서 고전 11장 10절은 "이런 이유로 여자는 천사들 때문에, 그 머리 위에 권위를 마땅히 가져야만 한다"로 해석되어야 하며, 이로써 여성은 남성에 의한 수동적인 권위가 아니라, 능동적인 권위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예장합동은 1934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장로회 총회 정치부가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성은 가르치지 말라"고 못 박은 것을 오늘까지 만고불변한 진리로 삼고 있다(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23회 회의록).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는 본문을 해석할 때는 고린도교회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잠잠하지 않고 예언과 방언에 동참하고 있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14장 전체가 남녀가 모인 예배 공동체 질서에 대한 것을 지시하다가(33절), 갑자기 여자들을 향한 지시가 문맥의 흐름을 깨는 것은(34-35절), 36절에서 '너희들만'이라는 헬라어 남성 복수형 '휘마스'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 14장 해석에 대한 예장합동의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고린도교회 당시, 예언과 방언이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의 계시 전달 방편이었다는 점과 예언과 방언한 자들 가운데 여성이 있었다는 점(고전 11:5), 사도 바울 동역자 중에 유니아 사도, 뵈뵈 집사, 브리스길라, 다비다 제자, 빌립의 네 딸 선지자 등 지도력을 발휘한 여성들 역할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또한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말씀은 지키지 않으면서, 왜 "교회에서 여자는 잠잠하라"는 '만고불변한 진리'인지(진리와 문화의 취사선택 문제) 일관성이 없으며, "잠잠하라"가 복음 전파와 찬양, 가르침은 가능하다고 하면서, '설교하지 말라', '목사하지 말라'로 해석하는 근거는 지나친 가부장적 직제 중심의 성경 해석으로 보인다.

총신대와 예장합동은 디모데전서 2장 11-15절을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본문으로 보고 있다. '창조질서'와 '언약적 헤드십', "여성은 창조 원리 아래서 해산하는 게 여성의 전형적인 역할"이라고 보아, 여자는 남자를 절대로 가르칠 수 없다고 해석한다. 황영자 박사는 디모데전서의 남녀관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에베소 지역의 철학, 이교 제의 등 문화·종교적 배경 이해가 필수적이며, 사도 바울은 모계 중심 사회의 모태인 아데미 여신 제의와 영지주의 문화에 물든 이교도의 그릇된 구원관에 사로잡힌 에베소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황 박사는 본문을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라는 두 개의 금지가 아니라 하나의 금지라고 해석했다. 즉, '하와가 속은 것이 아니고 아담이 속았다'는 영지주의 논의나, '여자가 남자의 원천'이라는 아데미 여신 제의에 물든 에베소교회 여성도의 '가르치는 태도에 관한 것'이라는 해석을 뒷받침해서, 능동적 의미의 '가르치는 것'과 부정적 의미의 '남자를 다스리는 것'을 문법적 장치 기능으로 연결한다. 하나의 의미 즉, "여자에게 남자의 창시자가 된 듯 잘못된 권위 전횡의 태도로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문법적 해석이 바람직하다는 지적이다. 디모데전서 2장 11-15절 본문 역시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본문이 될 수 없다.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본문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다. 김세윤 교수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다른 세 본문(고전 11:2-16; 14:33-36, 딤전 2:8-15)보다, 남녀 관계에서 예수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한 우선적이고 원칙적인 말씀으로 보고 있다.6) 황 박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로 되어 있는데, 남자와 여자의 구문에선 유독 '우데'(neither, nor, and not) 대신, '카이'(and, also)를 사용한 이유는, 창세기 1장 27절의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를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따라서 여성과 관련한 바울 본문을 해석할 때는 사회 문화적 정황에서 문맥을 살피며, 그리스도 복음의 정신과 성경적 여성관에 비추어, 남성과 동등한 파트너와 지도자로 세워 주어야 할 것이다.

여성 안수의 신학적 당위성

여성이 갖고 있는 신학적 확신의 초점은 하나님이다. 여성 안수의 신학적 당위성은 성과 관련한 하나님의 본성, 여성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음에 대한 의미, 기독 신앙과 성의 상관성, 직분론과 역할론, 인간 됨의 의미로서 남녀 관계에서 정리해 본다.7)

첫째, 복음주의 안에서의 여성 안수에 관한 논의는 성경 권위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해석자의 이데올로기적, 신학적, 사회-정치적, 문화적, 가치관과 관점의 문제요, 이에 따른 적용 방식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복음주의 안에서 여성 안수나 페미니즘을 '비성경적'이라거나 '자유주의'로 몰아서는 안 된다.

둘째, 여성의 신학적 확신의 초점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성을 초월하시는 인격적이신 하나님이다. 또한, 하나님은 남성 이미지뿐 아니라, 여성적 이미지를 동시에 갖고 계시는 분이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남성적 이미지로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성과 관련한 하나님의 온전한 본성이라고 할 수 없다.

셋째, 여성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라는 의미는 자유의지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요, 인간 상호 간의 동등한 관계로 살아가는 자유적이고 주체적인 존재요, 피조 세계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고 관리해야 할 책임적인 존재로서, 이에 상응하는 역할도 동일하게 주어짐을 말하는 것이다.

넷째, 기독 신앙과 성의 상관성은 하나님 뜻에 따라 서로 다른 몸으로 창조된 남녀는 인간 실존과 전인 차원에서 상호 보완적 의미를 지닌 파트너다. 하나님께서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닮았다는 전제하에, 생육과 대화, 친밀감과 교제, 문화와 신앙,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 회복 즉, 인간성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기독 신앙과 성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

다섯째,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남성의 머리 됨에 의한 종속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만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신뢰와 존경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성령의 충만 가운데 다양성, 연합과 조화, 상호 보완적 관계가 되어야 한다.

여섯째, 남성의 '머리론'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되심에 근거한 기독론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되심은 군림하고 다스리는 위계적인 권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성육신과 고난의 삶과 인격적인 '책임'과 '섬김'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만일 '남성의 머리론'을 '대표', '근원', '권위'라는 의미로 말할 때, 이는 섬김과 보살핌, 희생과 책임을 뜻하며, 여성을 해방시켜 주어야 한다.

일곱째,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남성과 여성에게 주어진 은사는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직분의 자격을 주어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공정한 '역할론'과 '직분론'이 된다.

여덟째, 여성 안수와 여성 리더십에 관한 논의는 남녀 관계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나라 구원의 공동체, 하나님나라의 포괄성, 성령 충만, 교회의 복음적 사명을 위한 전문성과 책임을 갖고 헌신하는 실천적인 과제로 다루어야 한다.

총신대 여동문회가 2017년 9월 20일 예장합동 102회 총회 장소에서 여성 안수 허용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여성 안수의 교회사적 당위성

초대교회 때부터 현대 교회 시대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이 보여 준 역할에서 여성 안수 필요성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 2000여 년의 교회 역사에서 복음 사역을 위한 여성들 공헌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어떠한 시대이든지, 또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무시되고 인정받지 못한 때에라도 복음 사역을 위한 여성 리더십은 늘 존재해 왔다. 기독교 박해가 심했던 초대교회에서 여성들은 순교와 헌신을 다했으며, 중세 교회에서 신학자로서, 수도원장으로서, 지혜자와 감독으로서 역할을 감당했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만인 제사장설과 여성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라는 교리를 회복했음에도, 가정과 교회에서 종속적인 리더십을, 근대와 현대 교회에서는 페미니즘 의식으로 여성 해방과 복음 전파, 사회봉사와 개혁을 위한 리더십을 역동적으로 발휘했다.

둘째, 근세 시대의 르네상스와 합리주의, 자연과학의 발달과 산업화, 중앙집권화 영향에 따라 남성 중심 엘리트 체제가 철저하게 갖춰진 시대였다. 그럼에도 개혁 교회에서 일어난 웨슬리의 부흥 운동과 찰스 피니의 복음주의 운동은 사회적으로 약자 보호와 경제, 교육의 문제를 개혁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이때 사회 개혁에 적극적으로 활약한 여성들이 교회에서 여성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복음 사역을 위한 여성 리더십은 이제 2000여 년의 남성 중심적인 교회 역사를 반성하게 하고, 교회의 복음 전파와 사회정의, 평화를 위한 개혁, 인류애와 사회적 책임에 관한 21세기의 긴급한 도전으로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초기 한국교회 태동기에는 여성에게 매우 불리한 시대 상황이 존재하였다. 사회와 가정에서는 가부장제 체제로, 구한말이라는 혼란 시기와 연이은 일제의 통치 시대였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독교 복음을 통해 구원과 자유를 경험한 여성들은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감수하면서, 한국교회 태동과 부흥을 위해 목숨을 걸고 헌신했다.

한국교회 태동기에는 전도 부인의 전도 활동으로 복음 사역의 부흥을 이루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으로 복음을 실천했다. 일제의 기독교 박해 시기에는 고난과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초기 한국교회를 지키고 일궈 낸 숨은 공로자들이었다. 작금의 한국교회가 여기까지 오게 된 데는 초기 한국교회 여성들의 복음 전도 열정과 교회 안팎에서의 헌신과 순교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초기 한국교회 여성들의 복음 사역을 위한 역할과 공헌이야말로 여성 안수와 여성 리더십을 인정할 수 있는 충분한 교회사적 근거가 된다.

여성 안수의 실천적 당위성

오늘날은 국내외적으로 여성 인권과 성평등이 중요한 의제로 부상하는 시대다. 2016년 강남역 여대생 살인 사건과 2018년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폭로로 촉발된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페미니즘'이라는 화두를 던지게 되면서, 한국교회 안에 잠자고 있던 여성 혐오(misogyny)와 성차별(sex discrimination) 의제가 기독 여성들에게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20~40대 교회 여성 134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를 보면, 젊은 여성들이 교회를 떠나게 된 이유로, 교회 내 불평등한 성 역할과 성차별, 소통 부재를 든다.8) 이처럼 한국교회는 여전히 전통적인 성 역할에 매여 사회의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교회의 가부장주의(patriarchy)는 첫째, 남성 중심적 성경 해석으로 여성의 하나님을 거세시키며, 여성들의 실존적인 삶의 필요(need)나 임신, 출산, 육아, 여성의 실존적 경험을 외면한다. 여성을 '유혹자'로 해석하거나, 남성 인물을 지나치게 영웅화해 상대적으로 여성의 행동을 비난 또는 축소하며, 교회나 가정에서의 여성 역할을 '현모양처'나 침묵과 순종하는 존재로 획일화하고 있다. 둘째, 교회의 설교, 교육, 예배, 상담, 교회 직제, 교회 정치, 교회 헌법 등 남성 중심의 교회 운영과 의사 결정 조직은 여성의 전문성과 통찰을 사장하며, 불공정한 직위와 차별적 처우를 받게 만든다. 셋째, 남성 중심의 제왕적 리더십은 교회의 위계화와 강자 독식, 성공주의 문화, 성 윤리와 젠더 문제에 대해 취약한 구조와 성범죄 은닉 메커니즘을 구축한다. 넷째, 한국교회의 주류는 여성을 개체 존엄적인 존재로 보기보다는 '남녀 질서'에 따른 집단으로 취급하면서, 여성 개개인의 독특한 개성과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이처럼 여성의 종속과 차별은 인간성 회복을 방해하는 '자충수'가 되어 교회의 비인간성을 초래하고 있다.

현대 신학자 한스 큉은 말했다. "초대교회는 권력기관이나 재판소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람들의 친교 공동체였고, 계층이나 인종, 목사의 교회가 아니라 동등함을 원칙으로 하는 공동체였으며, 가부장적 조직이 아니라, 형제들과 자매들의 공동체였다."9) 캐나다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최종원 교수는 "목회자의 지위는 신이 부과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합의하여 목회 전문가로서의 자격이다. 이것은 만인 사제 인식의 진정한 출발점이어야 한다. 여성 목사 안수의 인정 여부에 대한 근거를 성경 문구에서만 찾을 게 아니라,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의 요구 속에서 교회는 종교 전문가로서의 서비스를 제공해 나갈 때 존속할 수 있다"고 했다.10)

교회 리더십은 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사회와 세계를 포괄하는 역동적이며 실천적인 해석자로서 '섬김의 리더십'과 '성육신적 사역'의 실제를 감당해야 할 책무를 갖고 있다. 따라서 남녀평등과 인간 존엄의 시대적 흐름에 맞게, 종교개혁의 '만인제사장설'에 담긴 '만인'에 대한 현대적인 재해석으로 여성에게도 안수를 부여해야 함이 마땅하다.

교회 리더십은 남녀 파트너십이 되어야 한다. 남녀 파트너십은 종말론적인 하나님나라 선취를 위한 교회 공동체의 과제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미래다. 남녀 파트너십이야말로 인간 창조의 원리요, 그리스도 복음의 전인성을 이루는 길이요, 주님이 세우신 교회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며, 더 나아가 인류애와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롬 15:7; 골 4:16; 갈 3:28). 복음주의와 보수 교단은 더 포괄적이고 전인적인 남녀 파트너십의 새로운 도전과 변화 요구에 직면해 있다. 남성은 여성에게 열리고, 여성은 남성에게 열릴 때, 공존과 화해를 넘어 친밀함과 소통, 연합과 평등, 조화와 균형을 통해 하나님나라 공동체를 이뤄 가게 될 것이다.

예장합동 총회는 '여성 안수'를 허하여 교단 내 여성 인재를 육성하며 여성 리더십 역량 강화에 힘써 주기를 바란다. 끝으로, 교회 공동체를 위한 남녀 파트너십 과제 몇 가지를 제안해 본다.

첫째, 남녀에게 은사와 전문성에 따른 직위를 부여해, 영적인 통찰과 전문적 경험, 아이디어(idea)를 수렴·공유해서 결혼, 이혼과 재혼, 자녀 교육, 인생 주기(태아기-유야기-청소년기-청년기-장년기-노년기-사망기)와 관련한 목회 담론 인프라를 구축해야 할 과제가 있다.

둘째, 여성 친화적 목회를 할 수 있는 여성 리더를 적극 활용할 과제가 있다. 여선교사들에게 성례권을 줘서 무슬림 여성들이나 미전도 종족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여군목을 세워 군 선교가 활발히 이뤄지도록 해야 할 것이며, 또한 성매매 여성, 이혼녀, 가출 청소년, 탈북 여성, '미혼모'를 돌보는 사역에 헌신할 여성 리더를 발굴하고 세워야 한다.

셋째, 신학대학원 교육에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 파트너십을 형성할 수 있는 여성 교수를 확보하고 성경적 페미니즘과 관련한 다양한 교과과정을 개설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여성 사역자뿐 아니라 남성 사역자도 파트너십 교역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넷째, 교회의 노령화 시대에 직면해 노년부 활성화와 장애인 돌보기, 소년 소녀 가장 돕기, 교도소 선교, 각종 중독(성중독, 마약중독, 인터넷중독), 정신적 질병, 호스피스(hospice), 장례 등 삶의 총체적 돌봄(holistic care)을 위해 조정자, 의사, 간호사, 목사, 사회복지사, 영양사, 지원봉사자 등 남녀 전문 인력들을 세워 교회와 지역사회 봉사를 위한 남녀 파트너십 네트워킹(net-working)을 구축할 과제가 있다.

다섯째, 복음주의와 보수 교단은 하나님나라 구원의 인격성과 복음 전파, 교회 교육의 활성화와 교회 연합, 기독 윤리와 젠더 문제를 비롯해, 환경문제, 남북 평화와 통일, 경제 침체와 정의 실현, 세계 평화 등 사회적 책임과 관련해서, 남녀 파트너십의 역량이 발휘되도록 제도적인 훈련 과정과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할 과제가 있다.

강호숙 / 보수 교단의 차별적인 여성관에 문제의식을 갖고, 한국연구재단 지원을 받아 보수 교단의 성 윤리, 남녀 파트너십, 성차별적 설교, 교회 리더의 성과 성, 젠더 인식과 젠더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기독인문학연구원에서 '여성의 눈으로 성경 읽기'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1) Hans Kűng, Women in Christianity(trans.) John bowden(London, New York: Continuum, 2001), 98-103.
2) Tucker, Ruth A and Walter Liefeld. Daughters of the Church: Women and Ministry from New Testament Times to the Present(Grand Rapids: Zondervan, 1987).
3) 존 스토트는 성경적 페미니즘의 기원을 종교개혁으로 보면서, 페미니즘을 유행을 좇는 교회들이 편승하는 세속적 시류로서 무시할 게 아니라, 창조와 구속, 사랑과 정의, 인류애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John. Stott, New Issues Facing Christians Today, 정옥배 역, 『현대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서울: IVP, 2005), 13장 "여자, 남자, 하나님"을 참조하라.
4) 예장합동과 총신대의 여성관은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이 성경적 여성관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총신은 1996년 가을호(통권 제248호)와 1997년 봄호(통권 제250호) 「신학지남」에서 여성 안수를 불허한다는 글을 펴냈다. 이 글들을 중심으로 교회 안에서의 종속적 여성관을 주장하는 이유들을 찾아보면 첫째, 성경이 여성 성직 임명을 금지한다. 둘째, 지난 2000여 년 동안 여성의 성직 임무는 금지되었고, 루터나 칼뱅과 같은 종교개혁자들도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셋째, 구세주로 오신 예수도 남성이며, 그가 선택한 열두 제자가 모두 남성이다. 넷째, 여성은 교회 안에서 남성 헤드십(headship)을 인정하고 이에 상응하는 역할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학지남」제248호, 제250호(1996)를 참조하라.
5) 「고전 11:2-16, 14:33-36, 딤전 2:8-15절에 대해서는 황영자 박사의 2016년 총신대학교 신약 박사 학위논문인 "바울의 눈에 비친 아담과 하와: 바울서신의 남녀관", Kenneth E. Bailey, Paul Throught Mediterranean Eyes : Cultural Studies in 1 Corinthians, 김귀탁 역『지중해의 눈으로 본 바울: 고린도전서의 문예-문화적 연구』(서울: 새물결플러스, 2011), 456-473을 참고했다.
6) 김세윤, "성경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 「목회와신학」10(2004): 65-68.
7) 여성 안수의 신학적, 교회사적 당위성은 강호숙, "교회 여성 리더십의 이론적 근거와 실천 방안 연구", 총신대 실천신학 박사 학위논문 제4장과 제5장을 요약했다.
8) 들소리신문, "젊은 여성 떠나는 이유, 소통 부재", m.deulsoritimes.co.kr.
9) Hans Küng, Women in Christianity, translated by John bowden(London, New York: Continuum, 2001), 6-8.
10) 최종원,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경기도: 비아토르, 2019), 148-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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