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도 이런 난장이 있을 것인가! 그가 장관으로 임명되기까지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이 전례 없는 정치적 난투극은 너무 큰 상처를 남겼다. 여진은 계속될 듯하다. 1987년 이후 한국 사회가 성취한 제도적 민주주의의 성과가 적지는 않지만 아직 만족스럽지 못하다. 2017년 그해 겨울 촛불을 들어 한마음으로 민주의 거리를 채웠으나, 우리는 여전히 배제와 차별의 야만을 서슴지 않고 행하는 비정한 거리를 어디서든 마주한다.

이 와중에 한국교회 존재감은 깃털처럼 가벼워졌으니, 차라리 저 처참한 도시에 벌거벗은 채라도 나서서 대신 나를 치라 말할 용기라도 있었으면 좋았겠다. 아무도 이 혼란과 다툼과 경쟁을 조정할 성스러운 사명에 한국교회를 떠올리지 않는다. 그건 고사하고, 뭘 하든 저 멀리서 너희끼리 나타나지 말라 요구한다. '대체 정치가 무엇인가?'를 묻는 공론장에 '대체 종교란 무엇인가?'를 슬쩍 끼워 놓으려 해도 한 치 틈이 없다.

진보도 보수도 아닌 검찰주의라 오늘의 검란을 비판했던 어떤 논객처럼, 근본 없는 행적을 이도 저도 아닌 탈정치화한 정치적 일탈 정도로 무시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법한 공론장의 한국교회. 오늘 공론장에 등장하는 한국교회의 군상들은 팩트와 주장 사이를 분간하지 못하며 대체로 실패하고 있다. 타자를 품기도 전에 이미 타자가 된 실패의 원인 또한 분간하질 못하니, 남은 유산 다 털어먹을까 겁이 난다.

실패의 원인들

한국교회는 공론장에서 실패하고 있다. 도덕의 자원으로도, 동시대적 가치로도 인정받지 못한 채, 한국교회는 배제되고 있다. 뭐라도 되는 양 청와대나 국회를 기웃대는 삼류 지도자들은 그들 뒤에서 실소를 금치 못하며 비웃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한때 사회변동의 주요 변인으로 고려되었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수만이 모이든 골방에 앉았든 교회당 담장 밖에서는 안의 동태에 1도 관심이 없다. 안에서 뭐라 한들 밖에선 무시된다.

관심이 있다면, 한국교회의 탐욕과 욕망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배를 채우려는 정치적 장사치들이겠지. 시곗바늘 따라 습관적으로 교회당에 앉아 속죄의 신심을 발휘한다고 해도, 담장 경계선을 넘는 순간, 속죄의 대가는 이미 치룬 터. 그 신심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속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지, 별짓 다하고도 별일 없다. 한나 아렌트 말로 치자면, 한국교회의 '세계'는 말과 행동의 부자유, 결핍으로 인해 시민 공간에서는 항상 부재중이다.

실패의 원인은 놀랍게도 진리의 부재가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고 싶은 행위를 하는 것이 시민적 삶의 기본 조건이라면, 그것이 공론장의 권리를 부여받는 가장 기초적인 조건이라면, 그 탐욕과 욕망을 제어할 사회적 합의에 나의 진리를 기꺼이 위탁하고 발언할 한 표를 얻는 상식과 교양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된다면, 기본과 상식과 기초의 부재,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실패하고 있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다.

여론(조사), 언론, SNS 등으로 직조된 시민의 법정, 시민의 공론장에서 동의와 지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소신에 따라 말하고 양심에 따라 행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이는 토론 과정에서 주장의 수정 가능성 혹은 오류 가능성(fallibility)에 개방된다는 의미이다. 이래야 설득 가능성(plausibility)이 높아지고, 공론 형성 과정에 참여권이 보장되는 사회적 신뢰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여기까지가 공론주의 계열이 말하는 '합리적 의사소통'의 근대적 조건들이다.

물론 근대적 사유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제기되어 그동안 그 조건들의 편향이 폭로되어 왔다. 누군가에게는 더 쉽고 더 빨리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킬 특권이 되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빈 깡통처럼 그저 허울일 뿐 정당한 정치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백인 엘리트들의 특권, 남성들의 특권, 학벌과 지연의 특권을 해체하고 모든 이가 하고 싶은 말과 행위를 민주적 절차에 따라 보장받아야 한다는 자각이었다.

서구와는 사뭇 다른 경로로 발전·성장해 온 한국적 공론장은 토론의 품위나 정연한 논리를 압도하는 이념 투쟁과 노선 갈등이 첨예하여 '민주적 과정'에 대한 갈망이 긴박하다. 자신들만의 주의/주장을 강변하고, 타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태도는 추종자들을 결집시킬 뿐 공론장의 동의와 설득을 득하는 공적 에너지로 전환되지 못한다. 하여 한국교회는 지금 이 한국적 민주주의 문법에서 현저히 벗어나 토론의 장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의 거룩을 주장하나 기업처럼 세습하고, 순결한 사랑은 주장하나 정의로운 연대에는 주저하고,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나 인권 지수는 떨어지고, 비정치라 주장하나 탈정치적이고, 다음 세대를 품겠다 하나 '꼰대'의 위엄은 굳건하고, 대화를 하겠다면서 비판은 거부하고, 급기야 사랑을 외치나 증오와 혐오로 가득하니, 이익집단과 다를 바 없는 말법과 행법으로 시민사회의 원탁에 초청받지 못한다.

공공성의 기원을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논할 수도 있지만, 근대적 의미에 국한한다 해도 기독교적 기원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것이 오늘 후기 세속 사회의 종교 담론이 주장하는 바이다. 근대 세속화 이론의 한계는 기독교와 종교가 사회적 의미를 생산하는 중대한 자원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 하여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엄격한 역할 분담이 종교의 정치적 실천에 갖는 의미를 과소평가를 초래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내가 공공신학을 통해 교회의 역할을 재고하려는 것은 이런 반성과 성찰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서구 신학을 추종해 온 한국 신학계의 오랜 관성을 쉽게 고치기 어렵겠으나, 적어도 그 실천은 '한국적'이어야 한다는 각오를 되새긴다. 우리 사회에서 요구되는 문법과 생활양식을 선교적 장으로 인식하고, 정치적 공론장과 시민사회 공간에 참여하기 위한 신학적 방법론을 일컬어 공공신학이라 부르며 한국적 실천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우선 두 가지,

공론장에서 실패하고 있는, 그래서 공공의 동의와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급선무는 먼저 번역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20세기의 기독교에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공급해 왔던 '변혁(transformation)'의 논리는 지구화가 가속되고 상호 소통의 해석학적 훈련이 강화된 21세기 환경에서 다른 버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세상을 새롭게 하는 복음의 본성은 언제나 변함이 없을 것이나, 실천과 표현은 이전과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으니, 존재가 시·공간 속에 출현하는 사태는 어쩌면 종교적 체험과도 같다. 따라서 번역력은 시공간의 존재가 지녀야 할 필연적 덕목이다. 번역 없이 진리도 없으니 번역 능력이 곧 진리의 실천이다. 한국교회의 무기력은 이 번역 능력, 즉 해석력의 결핍에서 온다. 비상식, 몰상식이라는 외부의 비판은 바로 번역하고 해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심지어 한국교회의 도덕적 권위 상실과 해석력의 부재는 맞닿아 있다.

번역된 해석력이 교회를 시·공간의 선교적 공동체로 존재하게 하는 힘이라면, 정치적 공간인 시민사회의 공론장에서 종교의 도덕적 권위란 무엇인가? 번역된 교회 언어가 현 질서의 체제를 교란하고 더 나은 세상을 그리는 메타포를 유포할 때, 종교적 삶이 개인의 도덕적 삶을 넘어 '공동의 선'을 향하도록 자극할 때 공론장의 도덕적 토대를 제공하는 종교의 역할은 환영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실패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도덕적 권위, 즉 공공성의 상실이다. 번역의 해석력, 그 메타포의 정치사회적 실천, 그리고 그 지향을 향한 공동체의 헌신이 없다면, 태극기를 흔들고 촛불을 들어도 도덕적 권위의 결핍을 해결할 수 없다. 조직과 제도의 발전과 세력 확산에 헌신하는 한국 기독교의 생존 전략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로 인해 생존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기독교의 도덕적 권위는 구성원들의 행복과 성공에 의해 획득되지 않는다. 행복과 성공의 다른 기준을 제시하여 공공의 신뢰를 획득할 때, 타자의 행복과 성공에 헌신하여 기꺼이 자신들의 유익을 포기한다는 비논리적인 이타적 행위를 감행해 자신들이 믿는 가치를 유통시킬 때, 비로소 공적인 신뢰를, 도덕적 자본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근대 세계의 박애, 인권, 자유, 평등 등의 가치가 본래 종교적 언어였다는 사실이 증명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한껏 성장하고 확장된 한국 사회의 시민적 공론장이 선교의 현장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 신학의 자리는 공론의 장에 두어야 한다. 신앙인의 삶은 시민의 언어로 민주적 공간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교회의 신학, 교회 안의 종교 생활이 번역되고 해석되어 도덕적 권위를 획득하는 과정에 민감해져야 한다. 비판을 듣고 토론하는 방법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 자체로 선교적 행위다.

여기에 다수결의 민주적 원칙마저 초월하는 신앙 공동체의 비객관적, 비논리적, 비합리적 선택, 그것으로 복음의 독특한 도덕성을 증언하는 최후의 카드는 공론장에서조차 숨겨져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최종 목적은 민주주의 공론장에서 민주주의를 논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시기 좋았더라" 하신 창조주의 원천적 사랑을 증언할 기회를 정당하게 얻고자 하는 데 있다.

곧 각 교단 가을 총회가 열린다. 교회의 공론장에 참여하거나 관전(?)하다 보면, 우리가 지금 실패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명확히 느끼게 된다. 모두가 알아듣는 언어와 문법을 사용하는데 놀랍게도 바벨탑의 혼란이 재현된다. 성령강림의 선물, 방언의 역사는 거룩의 언어가 세속의 공간으로 파고드는 번역의 역사였다면, 지금 한국교회의 실패는 자신들의 언어에 갇혀 도덕적 권위를 상실해 가는 바벨의 사태이다.

공공신학은 고백신학의 언어를 번역하고 민주적 시민 공간을 해석하기 위한 신학 방법론이다. 나는 한국교회가 직면한 도전을 오히려 환영하고 시민적 소통에 참여할 명분을 잡고 싶다. 복음주의적 세계 이해의 유효기간이 다했고, 에큐메니컬의 실천이 더 복잡해진 세계의 모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공공에서 토론하고, 신학적 제안이 공공의 언어로 번역되도록 하는 방법론들을 구체화하려는 것이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 않으려 한다. 근대적 기원을 기독교의 역사에서 복기·복원하려는 저들의 노력법을 배우고 배워, 우리가 파송된 이 분단과 갈등의 땅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을 모든 이에게 선하도록 알리기 원한다. 아직 실패하고 있기는 하지만, 또 거대한 체제의 변화는 요원하지만, 나는 나대로 다른 이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교회의 언어를 부단히 번역하여 함께 누리는 선을 실천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한다.

성석환 / 도시공동체연구소 소장,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하나님은 교회 바깥, '광장'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
 [인터뷰] 성석환 교수, <뉴스앤조이> '한국에서 공공신학하기' 연재

[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장로회신학대학교 성석환 교수(기독교와문화)가 '한국에서 공공신학하기'라는 주제로 <뉴스앤조이>에서 연재를 시작한다. 교회와 시민사회 어젠다를 공공신학으로 읽어 내는 글을 6차례 게재할 예정이다.

성석환 교수는 도시공동체연구소(The Center for City & Commuity)를 통해 교회의 공적 역할을 연구하고 시민사회와 연계해 공공성을 증진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한국선교적교회네트워크(Missolonal Church Network in Korea)를 통해서는 선교적 교회 운동에 힘쓰는 중이다. 기독교적으로 대중문화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 살피는 작업도 해 왔다.

성 교수와 나눈 연재 관련 이야기를 정리했다.

성석환 교수. 뉴스앤조이 김은석

- <공공신학과 한국 사회>(새물결플러스)를 올해 2월 출간했다. 책에서 '공공신학'을 정의하는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더라. 교수님이 말하는 '공공신학'이란 무엇인가.

내 책에서는 새로운 신학 방법론 중 하나로 공공신학을 제시했다. 사회가 직면하는 질문들이 있는데, 기존에 교회가 취했던 방식으로 대응하면 풀리지 않는다. 방법론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신학 작업을 할 때는 출발점, '신학의 자리'를 어디에 두느냐가 제일 중요하다. 20세기까지는 대부분 신학의 자리가 교회였다. 항상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한 방식으로 구축돼 왔다. 외부에 대한 응답, 책임도 교회 중심으로 '어젠다 파이팅'을 했다. 교회가 세상을 변혁하고 이끌어 가는 방식으로 일관했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지금까지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세계 현실이 보여 준다. 악은 점점 세련돼 간다. 불의한 구조도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 공공신학은 신학의 자리를 교회 바깥에 두고, 시민사회에서 신학 담론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고민한다.

전통적으로 '복음의 공공성'을 강조하고, 공공 문제에 응답한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공공신학과 다르다.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면 '공공신학'이라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하버마스 등 공공성 어젠다를 들고 있는 시민사회에서 공공신학 방법론을 가져온다. 신학적 논의로 사회에 어떻게 개입하느냐 문제다.

교회 개혁은 사회 개혁과 같이 가야 한다. 사회변동과 교회 변동을 동일 궤적으로 읽지 못하면, 개혁의 외침은 효과가 없다. 하나님은 교회 바깥, 시민사회와 광장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

교회는 어젠다만 갖고서 외치는 것만으로 존재 의미를 드러낸다. 방법론이 빠져 있으면 의제만 소모할 뿐 실질적 변화는 힘들다. 개혁 주체와 개혁 대상 사이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있겠지만, 박정희가 김일성을 적대적 동반자라 했듯이, 지금은 적대적 동반자 관계가 형성돼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공공선을 말하면서 교회가 주도적으로 리드하는 방식에만 익숙해져 있다. 참여하는 훈련이 필요한데, 광장에서도 늘 기독교 모임을 따로 만든다. 우리끼리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광장의 문법, 사회의 문법을 따라야 한다.

- 광장의 문법을 따른다는 게 무슨 말인가.

실태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청년 문제를 교회가 강조하는데, 정당하게 다루려면 정치적으로 다뤄야 한다. 청년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체, 공론장에 교회가 참여해야 한다. 신앙과 정치 영역을 나누지 않고 청년 문제의 정치·사회·경제적 원인을 명확하게 분별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다음에 신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접근해야 한다. 성경에 의거해 결론 내리는 방식이 아니라, 사회와 대화하면서 해답을 발견해야 한다. 의료 문제면 의사와 만나는 등 맥락을 중시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놀이에 참여하지 않은 채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참여해서 함께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교회 지형이 공적 신앙 지형으로 바뀐 다음, 이 안에서 진보/보수, 좌/우가 나뉘어야 건강하다. 극우/극좌는 쳐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시민사회와 만나는 구체적 접점을 만들자.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기독교계와 건물의 경계 바깥에 있는 시민사회와 새로운 정치 공간에 교회를 새롭게 하는 길이 있으리라고 본다.

- 연재를 통해 무엇을 다루고자 하는가.

나는 신학의 자리를 시간적으로는 '후기 세속 사회', 공간적으로는 '시민사회'로 규정한다. 후기 세속 사회의 시민사회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공공신학으로 읽어 내려 한다. 건축·영화·문학 등 다양한 어젠다도 끌고 와서 다루고자 한다.

영화를 예로 들면, 올해 개봉한 '악인전'에는 나쁜 인물이 등장하는데, 위장할 때 개신교 코드를 사용한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는 항상 개신교가 일탈적이거나 분위기를 깨는 위선적 모습을 대변하지 않나. 대체로 신부는 정의로운 인물이고. 이 대조는 개신교를 향한 한국 사회의 시선을 보여 준다.

신앙은 교회에서만 작동되는 원리가 아니다. 이번 연재가 공공 영역에서 교회가 어떻게 정치·사회 등에 대해 토론하고 논의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 한국교회는 '개혁'이라는 절체절명의 요구 앞에 서 있다. 교회 개혁은 사회 개혁, 민주화, 성숙의 문제와 연동돼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제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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