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독교와 교회는 여러모로 독특하다. 고대 일본에 경교(네스토리우스파)가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더라도,1) 일본 기독교 역사는 약 500년에 달할 정도로, 결코 짧지 않다. 가톨릭 해외 선교의 선구자이자 예수회(Jesuits) 창시자 중 하나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1506~1552)가 1549년에 가고시마에 상륙해 일본에서 첫 기독교, 더 구체적으로는 가톨릭 선교가 시작되었다. 결과는 익히 알려진 바다. 하비에르를 시작으로 여러 예수회 선교사들의 사역의 결과, 가톨릭은 규슈, 주고쿠, 간사이를 중심으로 상당한 개종자를 얻었다. 특히 오다 노부나가 통치기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통치 초기에는 권력자들의 보호로 전 계층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전략적으로 기독교 금교령(1587)을 선포한 이래, 대규모 핍박이 이어졌다. 그 핍박과 순교의 내용은 2016년에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가 영화 'Silence'로 각색하기도 했던 엔도 슈사쿠의 1966년 소설 <침묵>에서 극적으로 묘사되었다. 이런 핍박에도, 1600년경 약 60만 명에 달한 일본 '기리시탄'キリシタン은 총인구의 약 2.4%에 달하는 상당한 숫자였다.2) 그러나 1600년의 2.4%는 이후 일본 기독교 역사에서 다시는 도달하지 못한 최대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금교령하의 잠복 시대 가톨릭, 그리고 1859년 이후 개신교 선교사들이 인력과 재력을 대규모로 투입하며 선교에 매진했지만, 오늘날 일본 기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합쳐도 인구의 1%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소수 중의 소수 종교일 뿐이다.3)

이렇게 부족함 없이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며 애쓴 농부의 수고에도 추수할 열매가 많지 않다는 불균형이 오늘날 세계에 널리 알려진 일본 기독교를 대표하는 이미지다. 그러나 불균형의 다른 측면도 있다. 기독교인 수가 많지 않고, 교회도 많지 않고, 같은 이유로 신학이나 기독교 계통 학문에 종사하는 인구가 적은 것에 비하면, 일본 기독교가 배출하여 세계에 알려진 신학자와 활동가의 수가 적지 않다. 일본이 서양에 개방되고 개신교가 도입된 메이지유신 초기에 신종교를 수용한 이들 다수가 지식욕이 왕성한 청년 및 학생층이었기 때문이었다. 1969년에 일본 신학 사상의 발전사를 다루면서, 한국에서 학생, 교수, 선교사로 활동한 일본인 신학자 사와 마사히코4)는 "처음에는 중국에서 출판한 기독교 서적을, 다음은 스스로 영서를 읽고 서양 신학을 잘 씹어 소화하려고 했다. 그 씹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선교사들은 이미 1890년대에는 일본 청년 신학도들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고, 일본인 국가주의까지 합쳐져 선교사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일본인 주체의 신학 사상 모색이 시작되었다"고 설명했다. 바로 이런 이른 시기에 시작된 주체적 신학 작업 때문에, 일본 신학계는 2차 세계대전 전부터 윤곽이 꽤 분명한 자체 신학 계보를 형성할 수 있었다. 에비나 단조, 우에무라 마사히사, 하다노 시즈이치, 다카구라 도쿠다로, 와타나베 요시다, 구마노 요시다카, 기타모리 가조 등이 이들이다.5) 특히 전쟁 직후에 나온 기타모리 가조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 Theology of the Pain of God>(1946)은 영어권에 번역(1965)된 첫 일본 신학 서적으로,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한국어 등으로도 소개된 대표적인 일본 신학서다.6)

그러나 이들 전문적인 신학자보다도 외국에 더 널리 알려져, 서양 세계에 일종의 '충격'을 가져다준 일본 기독교인도 있다. 바로 무교회주의 창시자인 우치무라 간조(1861~1930)와 본 글의 주인공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Kagawa Toyohiko, 1888~1960)다. 이들은 신학자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나름의 신학적 공헌을 했다. 그러나 학문의 영역에서 업적을 남겼다기보다는, 그들만의 지적 확신을 바탕으로 성경 연구, 전도, 교회, 사회, 협동조합, 국가, 군사, 경제, 운동의 영역에서 활동가와 조언자, 참여자, 예언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7) 이들의 사역과 저술은 위에서 언급한 신학자들의 작업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서양에 소개 및 번역되었고, 상당한 지지자와 추종자를 양산할 만큼 대중적인 인기도 끌었다. 특히 우치무라 간조는 오늘날에도 지속적인 전 세계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오늘날에도 자주 회자되는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등 유명한 한국인 무교회주의자들의 스승이라는 이유로, 이들을 언급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조명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살아생전에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 우치무라보다 더 유명했으며, 더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고, 더 많은 경외와 감동을 불러일으켰고,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 가가와 도요히코였다. 활동 당시 그는 동시대를 살았던 간디, 슈바이처와 함께 현존하는 3대 성인으로 추앙을 받았고, 그런 이유에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생전에 380권에 이르는 책을 썼고, 그중 일부는 경이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일본 빈민 운동과 노동운동의 선구자로서, 일본식 협동조합 운동, 반전 평화운동을 일으키고, 그 운동을 서양에까지 역수출한 인물이었다. 전도와 사회정의, 교회와 사회, 영성과 사회성, 일본과 세계, 하나님나라와 세상을 모두 아우르는 총체적이고 전인적인 사랑, 평화, 정의의 복음을 가르치고, 느끼고, 실천하려 한 '온전한' 기독교인이었다. 이토록 '전설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임에도, 의외로 사망 후 빠르게 잊혔고, 새로운 세대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운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대단한 '위인'偉人도 흠 없는 '성인'聖人이 될 수는 없는 것처럼, 그에게도 특정 시대, 상황, 국가, 민족이라는 배경을 극복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이런 삶의 특징을 가가와의 이름을 담은 다음 세 단어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가가와 유산(Kagawa Legacy) △가가와 전설(Kagawa Legend) △가가와 문제(Kagawa Problem).

가가와 도요히코. 유니언신학교 버크도서관 아카이브 갈무리

1. 가가와 유산(Kagawa Legacy)

가가와는 한두 가지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분야에서 많은 역할을 떠맡으며, 문자 그대로 '쉼 없이' 움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일본 협동조합의 아버지"라는 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8) 대략적인 정의상, 협동조합 운동은 무한 시장 경쟁 체제에 기초하여 작동하는 파괴적 자본주의에 저항하여, 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이 형제애적 연대와 협력, 분배와 공유, 자조, 민주, 공정, 연대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경제조직 운동을 뜻한다. 가가와가 이 운동에 전념하게 되는 것은 20대 중반 이후인데, 이 운동에 투신하기 이전인 21세에 빈민가에서 구빈 활동을 시작하면서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이해한 것이 조직적 협동조합 운동의 예비 단계였다. 그러나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과 공감은 그가 평범하지 않은 어린 시절에 겪은 차별 및 고아 경험에서 비롯된 것 같다.

가가와 도요히코의 아버지 덴지로는 1847년에 시코쿠 동편의 아와에서 아홉 형제 중 하나로 태어났다. 그는 그 지방의 가장 유력한 지주 가문의 당주當主(당대 호주)였지만 아들이 없던 가가와 세이베이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가가와 가문의 14대 당주가 되었다. 명문 가가와 가문에 걸맞게 이름도 덴지로에서 준이치로 개명해서, 가가와 준이치가 되었다. 7살 연하의 여성 미치와 결혼해서 가문을 이끄는 이의 자격도 갖추었다. 새로 이끌게 된 가문의 명예에 어울리게 지성적으로도 탁월했기에, 자유 민권 운동을 후원하면서, 정치결사 조직인 지조샤自助社의 임원도 맡았다. 도쿄에서 천황의 자문기관인 원로원 서기관으로 활동하다가, 요코하마로 가서 달러 시세거래소(도쿄증권거래소의 전신)에서 중개업을 하기도 했고, 다시 고베로 가서 해상운송 대리점인 가가와회조점賀川回漕店을 설립한 후 지점을 낼 정도로 성장시켰다.9)

그러나 그의 결혼 생활은 안정적이지 못했다. 준이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 대신 게이샤로 일하던 마스에와 동거를 시작했다. 이 둘 사이에서 다섯 아이가 태어나는데, 1888년 7월 10일에 태어난 가가와 도요히코는 셋째 자녀이자, 둘째 아들이었다. 당시 일본 전통상, 아이를 낳지 못하는 정실부인 대신 첩을 들여 대를 잇는 일은 흔한 풍습이었지만, 청교도적인 예민한 도덕주의자로 성장하는 훗날의 가가와에게 일부다처제는 죄악이었다. 가가와는 상업으로 성공한 부친과 그의 사랑을 받는 둘째 아내의 아들로, 부모 생전에는 대체로 부유하고 행복하게 자랐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이질과 독감으로 1892년 11월에 4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고, 어머니도 이듬해 1월에 넷째 아들을 낳은 후 8일 만에 죽고 말았다. 가가와는 당시 5살이었다. 다섯 아이는 그렇게 급작스레 부모 없는 고아 신세가 되고 말았다. 8살 딸 에이와 5살인 차남 도요히코는 정실부인인 미치와 할머니(아버지의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던 미치는 갑작스레 떠맡게 된 아이들에게 애정이 없었다. 가가와는 이런 어린 시절의 경험과 감정을 여러 글과 발언에서 표현했는데, "사랑 없는 너른 집"(a big house without love)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10)

친부모의 죽음으로 양모에게서 학대를 받고, 아이들로부터 '첩의 자식'이라 놀림 받으며, 홀로 꽃밭이나 숲, 들판, 창고에 숨어들어 책을 읽거나 주위를 관찰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던 극도로 외로웠던 소년 시절의 가가와. 거부와 상실, 자기 비하와 혐오 경험이 자신과 같은, 혹은 그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사랑의 화신으로 가가와를 빚어낸 근원 중 하나였던 것 같다.11)

가가와의 일생을 바꾼 결정적인 만남은 중학교 입학과 함께 찾아왔다. 현립 도쿠시마중학교에서 1년을 보낸 후, 이듬해 1901년에 기독교인이 운영하는 가타야마학교로 옮겼다. 많은 아이들이 그랬듯, 가가와도 처음에는 영어 습득을 위해 교회 예배에 출석하면서, 처음으로 외국인 선교사들을 만났다. 이렇게 만나게 된 찰스 로건 박사(Dr. Charles A. Logan)는 당시 28살의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학교에서 예수의 생애를 영어로 가르쳤다. 또 한 사람의 남장로교 교사 선교사 해리 마이어스 박사(Dr. Harry W. Myers)도 아내와 함께, 총명하고 감수성 예민한 가가와를 정성껏 돌보았다. 말하자면, 부모도 없었고, 친척에게서 사랑을 받아 본 일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소년" 가가와에게 이 외국인들은 제2의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이때 느낀 감정을 여러 수사를 동원해 감동적으로 표현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 당시의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인간이었으며, 누구든지 나에게 친절히 대해 줄 사람을 간절히 찾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분은 나를 끌어당길 수 있었다."

"로건 박사와 마이어스 박사의 가정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것은 비단 성서만이 아니다. 이들 두 가정이 보여 준 사랑이었다. 싸움에 지쳐 갈 곳이 없을 때, 이 두 가정은 언제든지 나에게 열려 있었고, 날 기쁘게 맞아 주었다. 그들은 나를 마치 자신들의 자식 가운데 한 명인 것처럼 보듬고 키워 주었다."

성서와 선교사를 통한 감화에도, 조숙했던 가가와는 약 3년간 내면의 복잡한 문제들로 고민했다. 그러다 16살인 1904년 2월에 기독교 신앙을 확신하고 도쿠시마일본기독교회에서 마이어스 박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가가와가 이들에게서 배운 것은 신앙과 지성으로서의 성서, 감정의 교감으로서의 가정과 가족, 실천으로서의 이웃에 대한 사랑이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에게서 기독교 신앙을 지성, 감정, 실천 중 하나로만 습득하지 않고, 전인적으로 배우고, 느끼고, 경험하고, 행동한 것이 가가와가 이후 총체적 '하나님나라' 복음을 가르치고, 선포하고, 실천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12)

이때 이후 가가와는 진로를 정했다. 중학교 학비를 대 주던 숙부는 장래가 보장되는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하면 다시 학비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가가와는 기독교 사역자가 되기 위해 마이어스 박사가 모금한 재원으로 도쿄의 장로교계 대학인 메이지가쿠인대학明治學院大學 고등부 신학예과에 입학했다. '초연'超然이라는 별명을 가진 학생답게, 그는 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책 거의 전부를 읽었다고 말할 정도로, 신학, 문학, 철학, 자연과학, 역사, 농학, 예술 등 광범위한 분야의 독서에 매진했다. 심지어 독서하느라 수업에 빠지기까지 했다. 재학 중인 그를 내내 가르친 라이샤워 박사(Dr. A. K. Reischauer)는 메이지가쿠인 개교 이래 가장 우수한 학생이라 평하기도 했다.13)

중학교 시절부터 광범위한 독서로 탄탄한 지식과 교양을 갖춘 가가와는 중학교 시절에 이미 평화주의자 톨스토이, 러스킨, 칸트, 일본 기독교 사회주의자 기노시타 나오에와 아베 이소의 책을 섭렵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면서, 국가 전반과 학교 교과과정이 국수주의와 군국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학교에서는 교련이 정규 과목으로 편성되어, 모든 학생이 모형 총을 들고 군사훈련에 참여해야 했다. 그러나 15살의 가가와는 교련 시간에 총을 던져 버리면서, 자신은 평화주의자이므로 살육 훈련에 참여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교사에게 체벌을 받고, 교장에게 훈계를 들으면서도 마태복음 26장 52절("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을 들어 자기 논리를 단호하게 변호해 냈다. 메이지가쿠인에서는 마르크스, 다윈, 엥겔스의 글을 읽으며, 이 사상가들의 무신론과 유물론, 과도한 폭력성을 비판했지만, 한편으로 약육강식 자본주의와 비인간적 기계주의 등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으로 수용했다. 이때부터 세계 평화, 반전反戰, 형식주의 종교, 육식, 일부다처제(첩 문화) 등을 주제로 글을 쓰거나 항의 행동을 하는 것으로, 차후에 명성을 떨치게 되는 '행동하는 비판적 기독교 지식인'으로서의 성장 과정을 보여 주었다.14) 즉, 그는 미성숙하기는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는 반제국주의자, 기독교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환경보호주의자였던 것이다.

1907년 3월에 메이지가쿠인대학 예과를 졸업한 가가와는 전술한 그의 성향에는 조금 맞지 않지만, 충분히 이해할 만한 진로를 선택한다. 그해 9월에 미국 남장로회가 고베신학교(전후에는 고베중앙신학교)를 개교했다. 마이어스 박사가 교회사, 천문학, 음악 등의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로 임명되자, 가가와도 스승을 따라 고베로 진학을 결정했다. 그러나 종합대학 메이지가쿠인의 자유롭고 학구적인 분위기에 매료되었던 가가와에게는 신학이 보수적일 뿐만 아니라, 도서관도 부실했던 고베신학교가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나 고베에서 가가와는 목회자로 빚어졌다. 아이치현 오카자키교회와 도요하시일본기독교회에서 목회를 배운 가가와는, 특히 도요하시교회 나가오 마키 목사의 겸손, 청빈, 고난, 환대, 전도에 큰 감화를 받았다. 이때부터 가가와는 대중 집회 및 거리 전도 활동에 시간을 쏟는 전도자로 알려지기 시작했다.15)

그러나 12~13세 무렵부터 각혈을 하는 등 결핵 증세를 보였던 그는 이 무렵 몸을 아끼지 않은 전도 활동의 결과,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가는 두 차례의 빈사 체험과 신비체험을 했다. 실제는 가가와는 일평생 폐결핵, 트라코마, 신장병, 결핵성 치루, 축농증, 심장병을 앓았던 '걸어 다니는 종합 병동'이었다. 아마도 죽음 앞에 늘 서 있다는 이런 자의식이 그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역과 활동에 매진하게 한 동력이었을 것이다. 이때 당시의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투병과 임사 체험을 하면서, 요양 중에 아츠미 만의 후소라는 어촌 마을에서 쓴 <오두막 일기>가 나중에 <사선을 넘어서>라는 제목의 자전적 소설로 출간되면서, 그는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16)

어린 시절의 소외 경험, 중학교와 메이지가쿠인에서의 지적-사회적 각성, 고베신학교 시절의 전도자 경험, 극한의 임사 체험을 자기 안에 종합적으로 아울러 낸 새로운 가가와가 탄생했다. 이렇게 새롭게 태어난 가가와가 향한 곳은 고베의 빈민가 후키아이 신카와였다. 1868년에 메이지유신의 결과로 개항한 항구 고베는 1907년부터 급속한 신흥 도시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농촌의 극빈을 피해 일자리를 찾아온 이들이 신카와 지역에 나무로 허름한 연립주택이나 칸막이 집을 만들어 대규모로 거주하고 있었다. 가가와는 신학교 기숙사를 나와 이 지역에 세를 얻어, 아예 방화범, 도박 중독자, 알코올중독자, 매독에 걸린 거지와 한방에서 살았다. 신학교 굴뚝 청소로 번 푼돈을 거리와 골목을 돌아다니며 나눠 주고, 옷을 벗어 주고, 빈민가를 공포로 몰아넣는 불량배 패거리들의 싸움을 중재하고,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여인과 아이들을 돌보고, 고통에 빠진 자들에게 찾아가 기도해 주었다. 처음에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던 가가와는 어느 순간부터 '선생님'이라는 존경받는 칭호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 이름에 걸맞게, 집에서 학교를 열어 아이들에게 국어와 산수를 가르쳤고, 초상이 난 집에서는 시신을 씻고 장례를 집전했고, 주일에는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활용했다. 처음에는 혼자 시작했지만, 이런 가가와에 감화된 동역자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이 빈민가 사역이 바로 협동조합 운동의 출발점이었다.17)

가가와 도요히코와 아내 하루. 사진 출처 가가와도요히코기념관

단순히 퍼 주기 구제로만은 빈민의 실제적 자립이 일어나기 힘들다고 판단한 그는 경제적 자급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협동조합은 1844년에 영국 로치데일에서 파업하던 직공들이 노동자의 권익 보호와 자립을 위해 만든 것이 최초였다. 일본에서도 이미 협동조합이 소개되어, 실재하고 있었다. 가가와는 1905년에 이시카오 산시로의 책을 읽으며 협동조합이 빈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시작된 첫 협동조합식 사업체가 텐코구야天國屋라는 식당이었다. 1911년에는 구령단救靈団(나중에는 '예수단'으로 이름 변경)을 조직해 함께 일하고, 물건을 공유하고, 함께 기도하는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공동체를 구현했다. 구령단이 더 특별했던 것은 가가와가 봉사자로 돕던 하루를 여기서 만나 아내로 맞이하게 되기 때문이다.18)

이렇게 시작한 협동조합 운동은 그가 1914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시기에 뉴욕과 시카고의 빈민가를 직접 목격하고 연구하면서 참여 영역이 더 확장되었다. 1917년에 신카와로 돌아간 후에는 고베의 미쓰비시 및 가와사키 조선소에서 비폭력 노동쟁의를 이끌었는데, 그는 한 인간으로서의 노동자가 종속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해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1921년 6월에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벌인 노동쟁의에는 3만 5000명이 참여했는데, 이는 당시까지 일본 역사상 최대의 노동자 시위였다.19)

그는 노동조합 외에도, 소비자 협동조합, 농민 협동조합도 차례로 이끌었다. 보통 선거권 운동도 주도했는데, 1920년에 제국의회에 제출된 첫 법안은 실패했지만, 1925년에는 마침내 통과되어, 납세액에 관계없이 25세 이상의 남성은 누구나 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이로써 이전까지 300만 명에 지나지 않던 투표권자가 1250만 명까지 늘어나면서, 일반 노동자도 상류층 인사들과 평등한 정치적 자기표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23년에 일어난 간토대지진 당시에는 도쿄로 가서 예수단과 함께 구제에 참여했다. 이후 가가와는 지속적인 계몽과 자립을 위해 농촌복음학교를 설립하고, 정치와 경제, 종교, 사회 개혁을 통합한 하나님나라 운동에 매진했다. 일본이 전시체제로 돌입하는 1930년대 이후에는 반전운동에도 집중하다가 헌병대에 체포되어 구류를 살기도 했다. 일본의 패전으로 끝난 전후에는 일본사회당, 신일본 건설 기독교 운동, 세계 연방주의자 운동을 주도하거나 참여했다.20)

가가와가 이렇게 일평생 강조한 협동조합 정신이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된 강연이 있다. 그가 48세였던 1936년 4월에 뉴욕주 로체스터에 소재한 콜게이트-로체스터신학교에서 이 학교의 유명한 교수이자 사회복음 운동의 주역의 이름을 딴 라우션부시 강연에서 한 내용으로, <우애의 경제학>21)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여러분도 잘 이해하시다시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 인생의 중심에 서 있다. 십자가의 원칙을 경제생활에 응용하고자 할 때, 우리는 네 가지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는 '비착취의 원칙'으로 희생의 정신을 의미한다. 둘째는 '형제애의 원칙', 셋째는 '나눔의 원칙', 넷째는 '사회적 연대의 원칙'이다. (중략) 그리스도교는 온 세상에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경제에 대해서는 우리는 십자가 원칙의 실천을 망각하고 오히려 경쟁을 벌이고 있다. (중략) 내가 형제애라고 말할 때는, 희생과 협동의 정신으로 가득 찬 바람직한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협동조합 체제에는 희생의 정신과 형제애의 정신이 담겨 있다."22)

"그리스도교 지도자 가운데에는 우리가 경제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것이 영적이지 않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예수는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분이다. 그의 육화肉化는 그 자체로서 놀라운 신 존재의 명백한 현상이었다. 우리의 육체가 신 의식에 의해 지배될 때, 신의 율법은 물질적인 요소들 안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결국 경제도 신의 율법에 따라 지배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경제적 측면에도 적용된다."23)

구령단을 모체로, 구령단이 있던 자리에 세워져 있는 고베 가가와기념관이 발행한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 관련 단체 변천도'에 따르면, 가가와가 신카와 슬럼에 들어간 1909년부터 사망한 1960년까지, 그가 창립하거나, 창립에 관여하거나, 혹은 그에게 영감을 받아 탄생한 사회운동 조직이 약 100개에 달한다. 또한 이 단체들의 활동을 주제별로 나누어도, 아동 보육, 교육, 주민 구제, 의료, 금융 보험 공제, 사회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협동조합 운동, 기독교 선교, 평화운동 등 최소 10여 종류에 달하며, 이들을 전문 영역별로 추가로 세분화하면, 20~30종으로 분화될 수 있다.24) 한마디로, 현대 일본의 사회운동에 그의 손이 미치지 않은 영역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예수단과 함께 구제 활동에 참여했다. 사진 출처 가가와도요히코기념관

2. 가가와 전설(Kagawa Legend)

1935년에 일본 기독교인 츠루미 유스케는 서양에서 가가와를 숭배하는 현상(Kagawa Phenomenon)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다.

"만약 30년 전에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일본인이 누구였는지 묻는다면, 그 대답은 해군 제독 토고였을지 모른다. 그리고 15년 전에는 누구일지 묻는다면, 아마 하야카와 세슈였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바로 가가와 도요히코일 것이다. (중략) [서양인들은]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서 아시아에 서구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있음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 하나는 아시아가 가지고 있는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다. (중략)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어떠할까? 서구가 2000년 동안 지켜 왔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교, 그 순수한 정신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점점 악화되고 있다. 하지만 이 종교는 오히려 그 태어난 고향인 이곳 동양에서 부활의 가능성을 찾고 있지는 않을까? 이러한 이유로부터, 가가와 씨나 간디를 향한 서양인들의 열렬한 흠모와 숭배의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결국 서양인들의 자기부정에서 비롯된 산물이며, 우월감의 꿈에서 깬 백인종의 신음 소리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25)

자국, 자민족 중심적인 자긍심이 다소 가미된 글이기는 하지만, 가가와가 1920년 중반 이후 서양, 특히 미국에서 일종의 현상(phenomenon)이 된 것은 사실이다. 기독교 복음을 소개하고 세례를 준 미국 선교사 로건과 마이어스를 통해 가가와는 빈민 및 사회 선교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일본인 기독교 개종자로 남장로교회에 먼저 알려졌다. 이후 미국 독지가들이 가가와의 선교 사역에 열심히 후원하면서, 그의 활동이 구미 주요 출판물에서 꾸준히 소개되었다. 그가 쓴 책도 서양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1924년에 환태평양학생대회(PPSC)와 세계기독교총학생연맹(WSCF)이 가가와를 미국으로 초대했다. 또한 영국 노동당 당수 램지 맥도널드 및 고위 관료들과의 회담 약속도 받은 상태였고, 아시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와는 귀국길에 만나기를 고대했다. 이 세계 여행에서 가가와는 인종주의를 반대하며, 서양, 특히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화해시키는 평화주의 민간 특사의 역할을 떠맡았다. 20세기가 시작된 이후 이민자, 특히 아시아계 이민자 유입을 규제하던 미국의 인종주의가 1920년대에 백인 우월주의를 바탕으로 강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첫 해외 순방은 1924년 11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총 8개월이나 걸렸다. 그가 미국 전역, 영국, 덴마크,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유창하게 영어로 연설한 내용은 서양인에게 감동과 충격, 감격을 동시에 선사했다. 그의 헌신적인 빈민 및 노동 사역을 듣고 느낀 감동, 서양 사회의 왜곡된 사회 모순에 대한 거침없는 도전에 충격을 받았다. 또한 아마도 그들의 선교 헌신이 배출해 낼 수 있는 최상의 열매이자 모델을 눈앞에서 목격한 감격 때문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의 강연은 문서로 출간되기도 했고, 영어 강연이 독일어로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26)

가가와가 서양에서 거의 성인 수준의 숭배를 받게 된 것은 그가 사회 사업에서 큰 열매를 맺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자하고 겸손하고 온화한 성품, 유머·풍자·해학을 담아내는 유창한 언변, 소외된 자를 위한 자기희생적 봉사는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성스러운 아우라'(aura of sanctity)가 충만했기 때문이다. 그 바쁜 와중에도, 매일 거르지 않고 새벽 여명에 일어나 기도와 묵상을 쉬지 않았고, 거액의 출판 인세와 후원금에도, 아내와 자녀들은 빈궁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지극히 검소하게 살았고, 부르는 곳은 어디든 가서 설교하고 강연하느라 자녀들은 아버지를 1년에 1개월도 채 못 보는 경우가 허다했다.27) 아내 및 자녀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자상하고 감성적인 가장의 이미지가 유교 관습이 지배하는 일본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아직 서양에서도 형성되지 않았던 시대였다. 따라서 가가와를 추앙하는 이들은 사명을 위해서 자신과 가족을 기꺼이 희생하는 그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그리스도 및 위대한 성인으로 숭배했다.28)

그가 서양 사람들의 뇌리에 이런 성인군자 이미지로 새겨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서양인들이 써서 출간한 전기와 주간지와 신문의 기사들이었다. 일본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다수의 책을 남긴 스웨덴계 미국 침례교 선교사 윌리엄 액슬링(William Axling, 1873~1963)이 1932년에 쓴 성인전 수준의 가가와 전기는 영어로 수차례 개정판이 나오고, 1930~1940년대에 프랑스어, 독일어,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스웨덴어로도 번역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29) <사선을 넘어서> 출간 이후 명성을 얻기 시작한 그는 이제 서양에서 실제로 전설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가가와협회'(Kagawa Fellowship), 그리고 가가와가 1921년에 결성한 수도원식 청년 조직인 '예수의벗'(Friends of Jesus)을 후원하는 모임이 설립되어, 가가와의 미국 및 세계 강연 여행 일정을 짜고 재정을 후원했다. 1927년부터 가가와의 사역팀에 영어 비서로 합류한 미국 선교사 헬렌 토핑(Helen F. Topping, 1889~1981)30)은 가가와의 글을 영어로 번역한 번역자이자, 가가와의 전기를 쓴 전기 작가이기도 했다. 1936년에는 가가와의 세계 강연 여행을 조율하는 총무 역할도 떠맡았다. 그런데 강연 요청이 너무 많아서 여행 5년 전에 예약이 모두 찰 정도였다. 진보 성향 개신교 잡지 <Christian Century>는 일상적인 출간 일정보다 더 빨리 잡지를 인쇄해서 가가와의 여정을 전 미국에 미리 알렸다. 각 교회와 학교, 협동조합에 소속된 가가와 숭배자들도 각 지역별, 단체별로 맡은 일정을 책임졌다. 연방교회협의회(FCC)의 J. 헨리와 제임스 마이어 목사, 미국협동조합연맹 총서기이자 미국 친우회(Friends, 퀘이커) 봉사위원회의 E. R. 브라운(E. R. Brown)이 강연 일정 중에 미국 현지 책임자로 활약했다. 미국 협동조합 운동의 주요 지도자와 협력자 거의 모두가 가가와와 함께 강연하거나 그의 강연에 참석했다. 미국 협동조합 운동의 발전상에 가가와의 공헌이 컸기 때문이었다.31) 가가와의 여정과 강연 내용을 포함한 일거수일투족을 기독교 언론뿐 아니라, <New York Times>, <Washington Post>, <Detroit News>, <Cleveland Plain Dealer>, <Newsweek> 등의 저명 언론도 추적하며 소개했다.32)

1935년에 미국에서 번역 출간된 가가와의 <십자가의 명상 Meditations on the Cross33)의 광고 홍보물에는 "새롭게 등장한 은수자隱修者 베드로가 하느님의 도시를 점령하기 위한 십자군을 말하였던 것처럼, 미국과 캐나다가 새로이 눈뜨게 하도록 가가와 목사는 앞으로 반년 동안 가장 많이 언급되는 세계적인 지도자가 될 것이다"라는 문구가 등장했다. 미국 시인 에드윈 마컴(Edwin Markham, 1852~1940)도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난 것을 칭송하는 14행시(소네트)의 4~5행을 "당신은 우리를 지켜보는 하늘로부터 보내진 지도자, 간디보다 위대하며 후스胡適(Hu Shih)34)보다 위대한 이여"라는 시구로 채웠다.35) 실제로 1936년 여행에서 가가와는 미국과 캐나다 총 150개 도시에서 75만 명을 대상으로 수백 차례나 강연했고, 라디오방송에도 출연했으며, 어떤 날은 한날에 11시간을 강연하기도 했다. 그만큼 초청이 많았다는 의미다.36)

가가와가 미국에서 정말로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었다는 것은 그를 반대하는 이들이 조직적인 반대 시위를 수차례 벌인 사실로도 확인된다. 가가와가 주창한 기독교의 사회참여와 협동조합 운동을 그저 단순히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에큐메니컬 운동으로 취급하는 이들이 있었다. 예컨대, 가가와가 라우션부시 강연을 위해 뉴욕주 로체스터에 도착도 하기 전에, 근본주의 전도자 해럴드 스트라선(Harold Strathearn)은 로체스터에 진을 치고 가가와를 반대하는 시위를 시작했다. 가가와를 "사회주의 망령"(spectre of socialism)으로, 가가와와 협동조합을 "쌍둥이 악마"(twin demons)라 부르며, 이들을 저지하는 50인 위원회를 결성한 후, 당대에 가장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로 악명을 떨친 텍사스 포트워스의 프랭크 노리스(Frank Norris)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가가와가 3000명 군중 앞에서 강연을 하고 있을 때, 같은 도시의 다른 강당에서는 2500명을 모은 노리스가 가가와를 빨갱이라고, 협동조합은 소련 공산주의보다 더 위험하다고 비난했다. "우리의 일터나 가정이나 교회를 어떻게 운영할지에 대해 논의하는데, 굳이 일본인 따위를 수입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 소식을 들은 가가와는 "저는 하나님의 사랑이 산업이나 경제나 일상생활에 적용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결국 공산주의자라고 비난받고 있습니다. 정말 웃기는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라고 대응했다. 가가와가 다룬 주제가 순수하게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었기에 비판자들의 범위 또한 광범위했다. 석탄 업계, 보험회사 등 시장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기업들이 지원하는 간행물들 또한 가가와의 협동조합 운동을 '일본 놈'(Jap)이 이끄는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활동일 뿐이라는 비난을 퍼부었다.37) 가가와에 대한 이런 여러 층위의 혐오 발언들은 전반적으로 극우 반공주의, 기독교 근본주의, 백인 우월주의, 인종차별주의 성향을 띠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전 세계를 다니며 수많은 강연에서 유창한 언변을 통해 많은 이를 감화했다. 사진 출처 가가와도요히코기념관

3. 가가와 문제(Kagawa Problem)

이처럼 가가와는 미국 및 서양의 많은 사람들에게 성인 수준의 존경과 숭배를 받았다. 여전히 백인 우월주의와 서양 중심주의가 지배하던 제국주의 및 인종주의 시대에, 기독교와 근대 문물을 수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동양의 한 기독교인이 오히려 이 요소들을 전수해 준 이들에게 찬탄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같은 동양인이자 기독교인인 독자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전수자와 수용자의 관계 문제, 즉, 선교 모국 모교회가 선교지 교회를 영원히 자라지 않는 어린(younger) 교회로 보고, 지도력 이양의 때를 놓치고, 결국 자립을 저해하는 가부장적 온정주의(paternalistic) 문제는 선교 역사에서 늘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주제다. 그런 점에서, 영원히 가르침 받는 학생의 위치에 서 있을 것만 같았던 동양의 한 기독교인이 자신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자리에 서 있다는 것에 서양인도 놀랐을 것이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이런 점에서 20세기 전반기 기독교 역사나 동서양 관계 역사에서도 한 획을 그은 인물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도요히코도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문제(problem)가 있었다. 그도 한 시대의 아들이었다.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중상류층 지식인으로서의 계급 차별 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인으로서의 민족주의 문제였다. 일본에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빈민과 노동자, 농민을 위해 헌신한 그였지만, 일본 사회가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피차별被差別 부락민部落民(히사베츠 부라쿠민)의 해방운동과는 결국 갈등하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조선 사회의 천민 집단과 마찬가지로, 부락민은 근대 이전 일본에서 사농공상의 네 계급 안에도 들지 못하는 천민이었다. 주로, 가축 도살, 사형 집행 및 시체 매장, 피혁 가공 및 납품, 거리 청소, 사찰 종자, 광대 등의 직업을 가졌다. 1920년 국세조사 통계에 따르면, 부락민은 일본 전체 인구의 1~2%에 해당하는 비율을 갖고 있었다. 메이지유신으로 공식적으로는 신분 차별이 철폐되었으나, 실제로는 여전히 차별이 자행되던 1920년대 일본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은 이 계층 지도자들이 1922년에 전국 수평사水平社(스이헤이샤)를 조직했고, 일본 최초의 인권선언인 '스이헤이샤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수평사 운동은 우파 보수 단체인 일본 국수회國粹會와 유혈 충돌을 벌이기도 했다.38)

가가와가 처음부터 부락민을 자신의 사회운동에서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그도 사회운동 초창기에는 이들과 연대하여, 지지자와 조언자 역할에 충실하려 했으나, 곧 이들의 운동이 과도하게 폭력적이라 인식했다. 평화주의자에다, 매사가 온건했던 가가와에게는 증오와 폭력에 기반한 해방운동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었다. 부락민과 가가와의 관계가 처음부터 평화롭기 힘들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25세인 1915년에 쓴 처녀작 <빈민 심리의 연구>에 있는 부락민 차별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단락들의 존재였다. 이 책은 일본에서 빈곤과 빈민 문제를 가장 탁월하게 정리한 사회학의 선구 작업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그는 일본 빈민 대부분은 부락민 출신인데, 이들이 가난한 이유는 유전적인 요인이 강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즉, 부락민은 순수 일본인이 아니라, 중국인, 한국인, 코카서스 백인, 니그로 흑인의 피를 가진 열등하고 오염된 인종들의 후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부락민들은 퇴화된 인종이거나, 노예적 인종, 혹은 일본의 고대 인종으로부터 뒤처져 버린 쓸모없는 존재들이다."39)

이 책이 출판된 직후 가가와는 부락민의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부락민의 비난이 심해지자 1929년에 가서야 책을 절판하겠다고 약속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이 책은 절판되지 않았다. 공식 사죄를 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의 입장을 변호할 만한 지점도 있다. 이 책이 젊은 25살에 쓴 처녀작이라는 점, 그 시대 서양 및 일본 지식인 주류가 인종주의적 사회진화론과 우생학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에 직면한 이후에 보인 가가와의 행동은 여전히 시대와 출신 배경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었다.40)

첫 번째 가가와 문제가 그의 20대 시절인 1910년대 사건이라면, 두 번째 문제는 1930~1940년대의 완숙했던 40~50대에 표면화한 문제였다.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2차 세계대전 패전까지, 15년 동안 전시체제에 돌입한 일본 사회에서, 지식인이나 사회 지도층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배 민족이 아닌 침략당한 백성으로서, 비록 강요에 의한 것이라 해도, 한국인 대부분은 식민지 제국주의 일본의 내선일체 및 대동아공영권 논리, 이에 근거한 신사참배 요구에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동참했다. 제국주의가 민족주의와 결합했을 때, 즉 일본이 치르는 전쟁이 세계 전체를 침탈하고 지배하는 앵글로색슨 백인에 맞서 일본인과 동양인을 해방하는 대업이라는 주장이 1930~1940년대 일본의 지배 종교가 되었을 때, 가가와도 이 신앙의 주술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가가와는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일본군의 확장주의와 군국주의를 비판했다. 그러나 1933년 정도가 되면, 군부를 도저히 제어할 수 없다는 생각에 망연자실하고 체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1932년에 일본군이 침략한 상하이에 1934년에 방문해서는 중국인 회중에게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저는 여기에 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일본인이 한 나라로서 자행해 온 일들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시며 용서해 주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부족한 저를 이 강단에 세워 주고 계십니다"라고 말했다.41) <사랑의 과학> 중국어 번역판 서문에서도 비슷하게 사죄를 표명했다.42)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과 1938년 이후 일본 본토와 식민지에서 신사참배 시행이 거의 완료되고, 1939년에 미국이 일본과 맺은 통상조약 종료를 통보한 시점 이후 전 일본은 완전히 전쟁 논리에 세뇌되었다. 가가와도 <사랑의 과학> 중국어판 서문에서 사과문을 작성한 일, 1940년에 만주의 협동조합을 방문했다가 거기서 일본군의 잔악 행위를 비판한 일, 같은 해 8월 25일 주일에 일본 교회에서 비폭력을 주제로 설교한 일이 문제가 되어 군법 위반 혐의로 경찰과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18일 동안 연설, 책, 문장, 영어 출판물 내용, 행동을 조사받았고, 그는 혐의에 대한 심문을 받은 후 석방되었다. 그가 발행하던 소책자 <가가와 달력>도 폐간 조치를 당했다. 이 사건 이후 가가와는 사회운동 은퇴를 선언하고 물러났지만, 1943년에도 두 차례나 반전사상을 이유로 체포되어 심문받은 후 가택 연금되었다. 결국 가가와 자신뿐만 아니라, 가가와의 교회, 조직 동료들의 활동 모두가 심각하게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43)

1940년 10월에 가가와는 지금까지 자신이 정부에 대항하는 활동을 한 것을 반성하는 공식 참회문을 게재하고, 천황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맡은 신적 사명을 지지하는 내용을 잡지에 기고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미군이 전장에서 일본군 및 일본군 시체를 대상으로 벌인 잔학 행위나 미국의 전반적인 인종차별을 가혹하게 비판하는 발언을 자주 했다.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전쟁은 이렇게 세계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던 가가와를 민족주의자이자 전쟁주의자로 바꾸어 버렸다.44)

가가와 도요히코는 생전 380권에 이르는 책을 남길 정도로 왕성하게 저술 활동을 했다. 글을 통해 많은 이에게 영향을 줬다. 사진 출처 가가와도요히코기념관

전쟁이 끝난 후 가가와는 <Time>과의 인터뷰에서 기자의 심문과도 같은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네, 저는 그러한 (반미 선전) 활동을 했습니다. 고의적으로 했습니다. 미국이 전쟁에 이기면, 가가와가 일본의 수상이 될 것이라고 미국인들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발언으로 인해서, 저나 일본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한순간에 매국노가 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저는 미국이 에이브러햄 링컨의 정신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일부러 말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세계적인 그리스도교로부터 국가적인 그리스도교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45)

가가와는 자신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정부의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전쟁 선전에 이용당한 면이 있음을 인정한다 해도, 전쟁 말기에 그는 아시아의 유일한 희망으로서 백인 지배자들을 쫓아내어 아시아인을 해방한다는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논리에 적극 찬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점에서 가가와는 실패한 예언자였다. 종전 직전 <Time> 기사에서 언급된 대로, "일본의 가장 유명한 기독교인은 가가와 도요히코라는 이름의 거의 눈먼 평화주의자"라는 평가도 옳았다.46) 전쟁 전에 성인으로 추앙받던 가가와는 전쟁 후 미국 사회 전반과 개신교 내부에서도 엄청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47) 아마도 바로 그런 이유로, 그는 전쟁 전에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사회 활동에서 활약한 수고에 더하여, 전후에 다시 세계 평화를 위한 활동에 매진한 공을 인정받아 1954년과 1955년에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추천되었다. 1947년과 1948년에는 노벨문학상 후보였다. 그러나 결국 그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분명히 일본 전시체제하에서 남긴 오점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48)

문학가, 학자, 저술가, 빈민 운동가, 노동운동가, 농민운동가, 협동조합 운동가로서의 가가와가 남긴 유산은 위대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인상과는 달리, 가가와는 일평생 자신이 전도자로 인식되기를 원했다. 18세기의 위대한 부흥사이자 전도자였던 조지 윗필드가 미국 순회 전도 현장에서 마지막 설교를 마치고 생을 마감했듯이, 가가와도 자신이 전도자, 혹은 목사로 불리기를 가장 원했다.49) 실제로, 신카와 슬럼에서 죽기 일보 직전까지 혼신의 힘을 다했고, 일평생 일본과 세계를 순회하며 수많은 설교와 강연에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했듯이, 마지막 남은 몇 해도 오롯이 전도자로 살다가 갔다. 사망 1년 전 전도 여행 직전에 앓아누웠을 때에도, "전도 도상에서 죽는 것은 전도자에게 영광입니다"라며 전도 집회를 이어 갔다. 1960년 4월 23일에 육체의 모든 기력이 쇠하여 의식을 잃기 직전에, 그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교회를 건강하게 해 주세요. 일본을 구해 주세요. 세계에 평화가 올 수 있게 해 주세요."50)

1) 7세기인 635년에 중국(당나라)에 경교景敎(Nestorian Christianity)가 전파된 사실이 확인된 후, 실크로드 무역로로 연결되어 있던 한국(신라)와 일본에도 경교가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검토하는 연구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단편 자료에 근거한 추측성 주장을 제외하고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도 경교가 전파되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 나카무라 사토시, 『일본 기독교 선교의 역사』, 박창수 역 (서울: 홍성사, 2016), 26-30.
2) 나카무라 사토시, 『일본 기독교 선교의 역사』, 90.
3) 나카무라 사토시, 『일본 기독교 선교의 역사』, 5, 64.
4) 사와 마사히코는 해방 후 한국에서 공부한 첫 일본인 유학생으로, 도쿄대 법대와 연세대 신학대학원,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하고 한국에서 교수와 선교사로 활동한 지한파 일본 학자였다. 森山浩二 宋寅愛(번역자), "사와 마사히코의 생애와 학문," 「한국 기독교와 역사」 9 (1998): 11-33; 김흥수, "사와 마사히코의 한국교회사 연구," 「한국 기독교와 역사」 9 (1998): 35-45. 사와 마사히코 및 그의 가족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새로운 한-일 100년, 내 노래로 잇고 싶어요," 「NewDaily」 (2010.02.01.)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0/01/31/2010013100009.html를 보라.
5) 사와 마사히코, 『일본 기독교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9), 167.
6) 기타모리 가조,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 이원재 역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7).
7) 사와 마사히코, 『일본 기독교사』, 168; 기타모리 가조,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 8.
8) 가가와기념관 편, 『가가와 도요히코: 일본 협동조합의 아버지』, 홍이표 역 (서울: 다행, 2013).
9) 로버트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서정민·홍이표 역 (서울: 신앙과지성사, 2018), 26-30.
10)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30-34.
11)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34-42.
12)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42-52.
13)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56-66.
14)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48, 54-56, 58-63.
15)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66-69.
16)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70-80.
17)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88-110.
18)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110-126.
19)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163-176.
20) Kudo Eiichi, "Kagawa Toyohiko," Scott W. Sunquist, ed., A Dictionary of Asian Christianity (Grand Rapids, MI: Eerdmans, 2001), 430f.
21) 한글 번역판도 있다. 가가와 도요히코, 『우애의 경제학』, 홍순명 역 (홍성: 그물코, 2009).
22)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327.
23)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327.
24) 가가와기념관 편, 『가가와 도요히코: 일본 협동조합의 아버지』, 226f.
25)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509.
26)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250-259.
27)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262-266.
28)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311, 346.
29) 액슬링의 가가와 전기의 수차례 개정을 거듭한 영어 출간본과 다양한 언어 번역본 목록은 다음을 보라. https://www.worldcat.org/title/kagawa/oclc/12863632/editions?editionsView=true&referer=br.
30) 헬렌 토핑의 간략한 전기는 https://snaccooperative.org/ark:/99166/w61w3437에서 볼 수 있다.
31)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311-313.
32)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313f.
33) Toyohiko Kagawa, Meditations on the Cross, Translated by Helen F. Topping and Marion R. Draper (Chicago and New York: Willett, Clark & Company, 1935).
34) 후스(1891~1962): 코넬대와 콜롬비아대 출신으로, 1917년부터 베이징대 철학 교수로 있으면서, 일상의 구어체 중국어를 작품에 그대로 반영하는 '백화白話운동'과 '신문화운동'을 펼쳤다. 문학, 역사, 철학, 정치 평론 등 전 분야에서 중국(후에는 대만) 최고의 계몽 지식인 중 하나로 추앙받은 인물. http://chinesewiki.uos.ac.kr/wiki/index.php/%ED%9B%84%EC%8A%A4#.ED.9B.84.EC.8A.A4.EC.99.80_.EC.8B.A0.EB.AC.B8.ED.99.94.EC.9A.B4.EB.8F.99를 보라.
35)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542-544
36)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319-326. 
37)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313, 330-334.
38)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220-222.
39) 나카무라 사토시, 『일본 기독교 선교의 역사』, 224;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221-224.
40)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224-226.
41)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사랑과 사회 정의의 사도』, 278-282.
42)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사랑과 사회 정의의 사도』, 354-356.
43)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사랑과 사회 정의의 사도』, 372-380, 390.
44)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사랑과 사회 정의의 사도』, 388-409.
45) Time 46 (September 24, 1945): 26f.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409에서 재인용.
46) Time (July 23, 1945) http://content.time.com/time/magazine/article/0,9171,803603,00.html.
47)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340-447.
48)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494-496. 노벨상 후보자 데이터베이스에서 가가와 도요히코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다. https://www.nobelprize.org/nomination/redirector/?redir=archive/.
49)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464.
50) 실젠,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464, 49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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