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공동체에 대한 기억

11년 전 미국의 한 한인 교회를 섬겼다. 맡은 사역은 청년들이 많은 모임을 섬기는 일이었다. 특별히 이 모임은 청년부라는 말을 쓰지 않고, '청년닷컴'이라는 자신들이 만든 이름을 사용하였다. 이 사안이 특이한 까닭은 첫째, 이 모임은 연령으로 분류된 부서가 아니며, 둘째, 특정한 예배를 중심으로 모이는 '예배 공동체'라는 데 있었다.

이들은 주일 저녁 예배를 직접 준비하고 섬겼다. 따라서, 누군가가 청년닷컴이라 하면 그것은 해당 교회의 청년 연령에 있는 교인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이 특정한 예배에 공동체적 소속감을 갖는 구성원을 뜻하는 말이었다. 즉, 여타의 교회들과 같이 부서가 먼저 있고, 부서를 위한 예배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배가 먼저 있고, 예배를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가 있었던 것이다.

이 예배 공동체는 '교회 안의 교회' 모델을 표방하였다. 재정·행정·목회가 (일정의 연관성과 선교적 후원의 관계는 당연히 갖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모교회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 이러한 '교회 안의 교회' 구조는 규모가 있는 미주 한인 교회의 영어 사역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한어 공동체로서는 많이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청년닷컴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연령을 기준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 공동체가 만들어 나아가는 주일 저녁 예배에 참여하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이들에게 주어졌다. 따라서 그 안에는 고등학생에서부터 40대에 이르는 다양한 이들이 연령이나 다른 어떠한 배경에 관계없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청년닷컴의 철학은 기존의 고정관념과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한 생각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이들의 예배 시간이었다. 이들의 주일예배 시작 시간은 저녁 7시 14분이었다. 따라서 그 이름도 714Worship이었다. 교회의 실천에는 우리가 묻지 않고 따르는 무수한 형식과 전통이 있는데, 그러한 부분에 질문을 던지고자 하는 신학을 예배 시작 시간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 밖에 외형적으로는 전통 한인 교회의 예배를 벗어나는 노력이 많이 있었다. 예배 시작 전 교회 로비는 하나의 커피숍처럼 변했고, 삼십 분 전부터 이미 수십 명의 청년이 모여 커피를 마시며 교제를 나누었다. 청년들은 예배를 절기와 주제에 따라, 혹은 특별한 절기적 이유 없이, 춤·영상·노래·간증 등을 이용한 다양한 순서를 준비했다. 따라서 예배 순서는 (큰 골격은 유지하였지만) 매주 조금씩 달라지곤 했다. 목사님은 강단에서 청바지를 즐겨 입었고, 전동 스쿠터를 타고 예배에 입장하기도 하였지만, 성찬과 세례가 수시로 이루어졌다. 설교 또한 자유로이 단상을 거닐며 이루어졌고, 어떤 날은 두 사람의 대화로 설교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다채롭고 현대적인 예배의 구현이 단순히 유행을 따르거나 이벤트적 시도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대부분 구성원들의 공동체적인 회의와 준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항상 주일 오후에는 예배를 준비하는 이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이 모임은 매우 열린 모임이었다. 참여가 정해진 스텝들이 있었지만, 누구라도 원하면 함께 앉아 참여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런 일들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다.

회의는 항상 열정적인 토론과 대화를 포함했고, 그 안에서 직분이나 나이에 따른 위계는 매우 희미하게 존재할 뿐이었다. 공동체의 중심에 예배가 있었기 때문에, 주 중에 있었던 그룹별 모임이나, 아니면 개인적인 만남 사이에서도 예배에 대한 아이디어와 의견 교환은 수시로 이루어졌고, 그러한 내용은 예배 준비 회의까지 자연스레 전해졌다. 종종 예배 순서의 일정 부분은 열린 결말로 끝났다. 큰 흐름은 정하지만, 어느 한 공간은 "성령님의 인도하심대로"라는 문구로 열려진 채 회의가 끝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청년닷컴은 외형적으로 매우 성공적인 목회였다. 20여 명으로 시작하여 3~4년 만에 150여 명으로 성장하였으며, 지역에서는 가장 유명한 젊은이들의 모임이 되었다. 성장에는 많은 요소가 부가적으로 존재하였지만, 청년닷컴의 특별한 매력은 누구든지 참여가 가능한 열린 구조라는 데 있었다. 모든 공동체 구성원은 자발적으로 예배를 중심으로 모였으며,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헌신적으로 예배를 섬겼다. 따라서, 이 공동체의 예배 안에는 다양한 삶의 이야기가 가득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변화의 이야기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느 공동체나 이야기가 없는 공동체가 없겠지만, 닷컴의 특징은 그러한 이야기들이 예배 속에서 즐비하게 공유되고, 보여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배는 누구든 하고 싶은 이야기나,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참여할 수 있는 유연성과 개방성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예배 이전에 공동체의 문화 안에 이를 장려하고 긍정하는 구조가 있었고, 그 너머에는 이를 지지하는 신학이 있었다.

아래로부터의 예배,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청년닷컴은 여느 다른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완벽한 공동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공동체는 우리가 이 시대에 깊이 있게 재상고해 볼 가치가 있는 '아래로부터의 예배 공동체' 모델을 사유하기 위한 통로를 제공해 준다. 아래로부터의 예배 공동체는 누군가에 의해 지도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자율적이고, 유기적인 생리에 따라 움직이며 예배를 중심으로 모이는 공동체이다. 청년닷컴에서 대부분의 의견과 활동은 청년들 개개인에게서 발생하였고, 목회 스태프는 그들의 일을 격려하고, 마치 그들이 재능과 교육적 배경으로 교회를 섬기듯, 우리가 가진 재능과 교육적 배경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 그리고 그들과 함께 친구로 어울리는 일을 하였다.

청년닷컴 안에서는 최소한 다음 두 가지의 언어(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가치)가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첫째는, "이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 규범적 지시문(Normative Instruction)이고, 둘째는, "이것은 이런 것이다"고 하는 분류/단정적 판단문(Categorical Statement)이다. 예를 들면, "예배란 이렇게 드려야 하는 것이다", "찬양팀의 옷이란 이렇게 입어야 한다", "이런 행동은 해도 된다/안 된다"는 말은 매우 부정적인 가치의 표현이었다. 또한 "우리는 청년부다", "누구는 1세다, 1.5세다, 2세다", "누구는 이런 사람이다"는 말은 구성원들이 잘 쓰지 않는 말이었다. 이 두 가지 언어의 결합, "누구는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무엇이 된다/안 된다" 하는 가치판단은 가장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청년닷컴은 구성원들 스스로에게 무엇이든 시도해 볼 수 있었고, 누구라도 올 수 있는 공동체라는 인식이 높았다.

이것은 마치 20세기 서구 철학에서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 그중에서도 거대 담론(Metanarrative)과 환원주의(Reductionism)의 배격이 하나의 신앙 공동체 안에 고스란히 일어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거대 담론'이란 기본적으로 현실 세계를 규정하는 원리를 찾고자 논의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따라서 이 논의의 행위 안에 담긴 가치는 '전체를 아우름'이다. 무엇이 다양한 사람·현상·물질들 사이에서 전체에게 적용될 수 있는, 혹은 전체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인가를 논하는 것이 거대 담론의 특징이다. 따라서, 거대 담론의 행위 안에서는 본질적으로 '차이/다름'보다는 '같음'의 가치가 강조된다.

이러한 거대 담론은 또한 '환원주의' 성격을 갖는다. '환원주의'란 하나의 복잡다단한 현실의 실체적 존재를 몇 가지 내용으로 축소하는 경향을 이르는 말이다. 이를테면 "그는 아시아인이기 때문에, -할 것이다", "그는 흑인이라서 –하다" 혹은 "중국인은 –하다", "유대인은 –하다"는 언어들 모두 환원주의적 언어다. 환원주의는 기본적으로 사물을 분류화하는 언어다. 사물들을 환원하면 공통점을 공유하는 것들끼리 분류가 가능해진다. 이것은 매우 폭력적인 언어인데, 환원이란 필수적으로 개체의 일정 부분 결손을 가져오고 전체성을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청년닷컴이 지양했던 규범적 지시문과 분류/단정적 판단문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가 보여 주는 거대 담론과 환원주의 배격과 결을 함께한다. 그 안에는 교회는 이래야 한다는 거대 담론이 없었고, 개인이나 공동체가 성별·연령·직업·교육·소득·비자/이민의 형태 등으로 환원되고 분류되지 않았다. 청년닷컴은 누군가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는 교회의 비전이나 정체성에 구성원이 자신을 깎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짝이 맞지 않는 독특한 모양의 구성원들이 저마다 모여 얼기설기 모양을 만들어 나가는 '아래로부터의 예배 공동체' 모습을 보여 주었다.

무수한 '얼굴'들의 예배
- 삶, 예술, 이야기의 예배

위로부터의 예배는 준비자-재현자-시청자가 분명하다. 목회자는 준비자이며, 예배의 모든 순서와 내용을 진두지휘한다. 이들은 필요한 대로 소수의 교인에게 참여를 요청한다. 그리고 다수의 교인은 단순히 보고 듣는 시청자로 – 혹은 (레비나스의 언어를 차용하여) '얼굴 없는 예배자'로 – 예배를 드린다. 이들이 얼굴 없는 예배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에 몸은 가져오되 '말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잔칫상을 스스로가 꾸민 장식과 음식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배운 적도 없고, 요청 받은 적도 없고, 그러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따라서 이러한 예배는 개념적으로 볼 때, 준비자(상을 구상하는 목회자)–재현자(소수의 순서 참여자)–시청자(다수의 교인)로 구별되며, 이는 불행하게도 하나님만 말하는 만남이다.

반면, 아래로부터의 예배는 성도들이 예배 구상의 주체가 된다. 목회자는 조력자 역할을 하고, 말씀과 성례로 예배의 부분을 담당한다. 소수의 순서 참여자는 타자의 지시를 재현하는 '재현자'로 남는 것이 아니라, 참여의 내용과 표현을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적극적 참여자'로 순서를 담당한다. 아래로부터의 예배는 단순 시청자, 즉 '얼굴 없는 예배자'는 우선순위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배 참여자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하면 무명/무면의 예배자가 효과적인 영적 경험을 할 수 있는 예배를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개별적으로 또 공동체적으로) 하나님과 좋은 만남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표현할 것인가'이다.

즉, 아래로부터의 예배는 참여자 개개인의 개별성과 인간성을 회복하는 작업이며, 예배를 일원화한 집단으로서의 행위에서, 무수한 '얼굴'들의 만남으로 바꾸는 행위이다. 또한, 위로부터의 예배에서 발생하는 예배 참석자 증가는 얼굴 없는 예배자의 증가이며, 아래로부터의 예배에 있어서 발생하는 예배 참석자 증가는 '우리'의 증가, 무수한 '얼굴들'의 증가, 즉 공동체의 증가로 이어진다.

삶, 예술, 이야기가 어우러진 예배는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예배'와 맞닿아 있다. 삶, 예술, 이야기가 어우러진 예배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형식의 측면에서 실제 교인들의 삶과 예술, 이야기를 담지하는 예배를 말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이는 그 너머의 문제, 비가시적인 예배의 막후(behind the scene)에서 예배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문제, 즉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예배를 준비하고, 구상하고, 구현하고, 참여하는가의 측면을 또한 말하고 있다. 삶, 예술, 이야기가 있는 예배란, 소수의 리더십에 의해서만 계획되고 교인들은 그 아이디어의 실제적 구현에만 동원되는 예배가 아니다. 시작부터 모든 동기와 원동력, 표현과 참여가 교인들과 함께, 교인들에 의해 만들어져 가는 예배다. 이를테면 "예배는 이래야 한다", "누구는 (준비에) 참여할 수 있다/없다"는 따위의 판단은 제쳐 두고, 마치 초대교회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듯, 예배의 준비부터 함께 공유하는 배경을 갖는 것이다.

예배는 '위로부터의 예배', 다시 말해, 리더십이 있는 한두 사람에 의해 – 교회 현장에서는 주로 담임목사로부터 – 던져진 (주로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그림에 따라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예배라 하더라도, 형식/표면적으로 삶, 예술, 이야기가 등장하는 예배를 구현할 수 있다. 목사는, 이를테면 지난 주에 단기 선교 여행을 다녀온 김 집사에게 간증을,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박 집사에게 특송을, 자신의 아들이 따돌림으로부터 벗어난 경험을 설교 예화로 가져와 삶과 예술과 이야기가 있는 예배라 말할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이러한 예배에서 좋은 경험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예배는 소수에게만 배역이 주어진 하나의 극과 같다. 이 예배의 목표는 '리더'가 생각하는 가장 좋고 훌륭한 예배의 모형,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예배의 모형(이데아, Idea)을 매주 최대한 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배는 그저 바라보고 앉아 있는 '시청자'(audience), 혹은 '얼굴 없는 예배자'에게 영적인 경험을 주었는가 주지 못했는가에 따라 "잘되었다" 혹은 "별로였다"는 판단으로 종종 귀결된다.

아래로부터의 예배는 기본적으로 좋은 예배 모형이 위로부터의 예배만큼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 좋은 아래로부터의 예배는 준비에서부터 순서 참여에 이르기까지 민주적이고, 배제와 차별이 없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배는 자연히 사회에서 소외받거나 잊혀진 약자들의 삶과 목소리를 공적 장소로 끌어온다.

또한 아래로부터의 예배는 공동체 중심 예배이기 때문에, 구성원에게 있는 직접적인 문제와 삶의 질문들이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예배 안의 예술이란 예술의 형식을 빌려서 드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참여와 결합이 만들어 내는 우연성(contingency) 속에서, 혹은 그 합류(confluence)의 실체를 통해서 발견된다. 이러한 예배는 일정한 목표와 모형을 향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매번 아직 실현되지 않은, 최초이자 단 한 번인 예배 속에서 그 예술적 가치가 발견되는 것이다.

참여적 예배, 참여적 영성

아래로부터의 예배가 참여자들에게 주는 교육은 그 예배 자체가 외형적으로 담고 있는 신학적 메세지만큼이나, 혹은 그보다더 많은 것을 가르친다. 교육학자들은 주로 세 가지 유형의 교육, 즉 explicit curriculum, implicit curriculum, null curriculum이 있다고 설명한다. 예배가 가진 교육의 기능도 마찬가지이다. 예배가 실제 언어를 통해 전달하고 있는 내용은 explicit curriculum에 해당한다. Null curriculum이란 말하지 않음으로 가르치는 교육이다. 특정한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마치 존재하지 않는 문제인 것처럼 가르치게 되는 교육을 말한다. Implicit curriculum이란 의도하였거나, 의도하지 않았지만, 교육자의 태도나 교육의 환경과 시스템 등이 가르치는 교육 내용을 말한다. 아래로부터의 예배가 주는 교육이란 이 implicit curriculum에 관한 내용에 해당한다.

아래로부터 예배의 참여자는 먼저 교회 내부의 권위/권력 구조에 대해 다르게 배운다. 특별히 이들은 목회자가 구약의 제사장과 같은 중간자 역할, 혹은 신의 대리자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들은 철저히 이 예배가 하나님과 나, 그리고 우리 사이의 관계이자 표현 문제라고 여기기 때문에, 목회자 역할은 보조자이지 신의 뜻을 혼자서 알고 전하는 중간자가 아니다. 위로부터의 예배는 그 예배 담당 목회자에게 권위가 집중되기 때문에, 이것이 현대 교회의 큰 문제 중의 하나인 제왕적 목회자 이미지, 혹은 중간자 목회자 이미지 형성에 바탕을 이루게 된다.

아래로부터의 예배 참여자는 또한 약자와 소외된 자의 존재와 그들을 향한 돌봄을 배운다. 사회에서 소외되어 그들의 삶과 목소리가 잊혀진 이들에게 동일하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 주고 함께 즐거워하며, 예배 참여자는 그들의 존재를 기억하고, 내면화하고, 삶의 일부로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된다. 한인 교회 안에서 그들은 특별히 여성, 어린아이, 장애인, 경제적 취약 계층, 성소수자 등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아래로부터의 예배는 사회에서 쉽게 소외되거나 거부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기억과 동행이라는 신앙적 가치를 예배 실천이라는 행위를 통해 배우게 된다.

더불어 아래로부터의 예배는 참여자들에게 '사회참여적 영성'(engaged spirituality)을 함양하도록 돕는다. 이는 사회적 약자의 삶과 이야기가 들려질 때 가능한 일이다. 그들의 목소리가 사회의 불평등한 억압과 차별의 구조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예배 참여자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의 신앙을 세상과 유리하여 발전시키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영성에서 벗어나, 직접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정치·문화적 상황에 적극 반응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아래로부터의 예배 참여자들이 배우게 되는 교회론이다. 이들은 교회를 건물과 조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 생겨나는 하나의 실체적 '사건'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무수히 많은 교회가 교회의 재산과 교회 내부 정치 구조 문제 등으로 분열되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아래로부터의 예배가 교인들에게 줄 수 있는 교회론 교육은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부분이다.

교회-기업의 죽음을 맞이하며

청년닷컴은 아래로부터의 예배 공동체를 경험하고,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길을 열어 줬지만, 아쉽게도 그 자신은 미완의 모습으로 사라졌다. 엄밀히 말하면 사역자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면서, 위로부터의 논리에 의해 다시 본교회로 흡수되었고, 청년은 결국 (청년닷컴이라는 이름은 유지되었지만) 부서화하였다. 그 안에 있던 청년들은, 스스로가 예배 주체라는 점, 목사 중심 권위주의 타파, 교회에 대한 사람 중심 이해를 배웠고, 약자에 대한 환대를 어느정도 실천했지만, 사회참여적 영성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만약 그 공동체가 계속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해 본다.

이 시대는 한국교회, 미주 한인 교회 암흑기의 시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교인 성장은 멈춘 지 오래되었고, 교회 분열은 계속되고 있으며, 아이들은 사라져 가고 있고, 교인의 수평 이동으로만 교회가 유지되고 있다. 더불어 오랫동안 존경받던 목사들의 부도덕한 행위가 연달아 드러나면서 교회에 대한 신뢰는 바닥을 치고 있다.

한국의 한 대형 교회 세습에 대해 여러 신앙인이 연이어 '한국교회의 죽음'을 선언하고 있다. 어느 목사는 신문 기고를 통해 한나 아렌트가 나치의 시작은 비밀경찰 – 누구도 손댈 수 없었던 절대 권력 – 에 있었다고 언급한 것을 상기해 주었다. 그것이 한국교회 부패 뒤에 있는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한 권력형 밀실 정치와 닮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한 권력형 밀실 정치라는 것을 강화해 주는 가장 큰 도구는 바로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한 위로부터의 예배, 제사장적 예배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교회의 시작에는 분명한 직분도 없었고, 교단(법)도 없었고, 전통도 없었고, 정해진 장소도 없었다. 심지어 분명한 교리도 없었다. 모든 것은 희미하고 임의적이었다. 위와 같은 것들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하며 역사적으로 조직되었다. 교회를 합리적이고 질서 있게 유지하여 더 많은 이에게 복음을 전달하고 공유하고자 했던 노력의 일환이다. 따라서, 이를 모두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교개혁이 교회의 과도한 권력화·정치화·자본화·조직화·비인간화에 반해 일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한국/한인 교회 상황은 중세 교회와 너무나도 많이 닮았다. 이러한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예배, 즉, 삶과 예술, 이야기가 넘쳐나는 예배, 참여/자발적 예배, 무수한 '얼굴'들의 예배를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정철 / 미국 퍼시픽종교신학대학원(Pacific School of Religion) 실천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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