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온 예멘 난민들을 둘러싸고 온갖 이야기와 주장이 무성하다. 이들을 놓고 여러 청원이 청와대 게시판에 올라왔다. 그들을 인도적으로 대할 것을 촉구하는 청원도 있지만, 국민들이 불안해하니 난민을 받아들이지 말고 돌려보낼 것을 촉구하는 청원이 훨씬 많다. 가짜 뉴스에 기반을 두고 난민들에게 돈을 지급한 것을 규탄하는 청원도 있고, 난민 추방을 위한 촛불 집회를 하자는 청원도 있다. 이러한 현실을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먼저 말할 것은, 어려움 속에서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 성경의 어떤 구절을 뒤적이는 것 자체가 끔찍하게 종교에 매몰된 태도라는 점이다. 성경 구절로 구덩이에 빠진 양을 살리는 근거를 찾는 인간의 존재는 그 자체로 비극이고 깊은 절망이며 비인간화의 절정이다. 이 글은, 지금의 경우를 비롯해 앞으로도 빈번히 닥쳐올 비슷한 상황을 생각하며, 근본적으로 이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다져 보려는 노력이다.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데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문제는, 도움을 청하는 이들이 중동 출신 난민이라는 점이며, 아마도 이들이 무슬림일 것이라는 점, 그리고 500명 넘는 이번 난민들을 받아들일 경우 그 이후 이와 같은 무슬림 난민들이 더 몰려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중동 출신, 무슬림 같은 단어는 우리 사회에서 곧바로 테러리스트와 연결된다. 할랄 푸드 단지 설립 반대부터 평창 올림픽 기간 무슬림을 위한 임시 기도처 설립 반대까지, 이슬람이라면 치를 떨어 온 일부 기독교인 역시 무슬림 난민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먼저 이슬람을 배경으로 한 테러 집단 때문에 중동 사람 혹은 무슬림을 테러리스트로 여기는 것은, 극단적인 편견이라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생각이다. 예멘 난민은 4년째 계속되는 예멘 내전으로 자신들의 나라를 탈출하여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 이 멀고 낯선 땅까지 찾아온 이들일 뿐이다.

내전을 피해 제주로 온 500여 명의 예멘 난민을 둘러싸고 이야기가 무성하다. 사진은 취업 설명회를 듣기 위해 제주출입국외국인청사 앞에 줄을 서고 있는 예멘인들. 뉴스앤조이 박요셉

당연히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살길이 있을지 모색하고 있으며, 가능한 한 일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이들을 두고 난민이 아니라 우리 일자리를 빼앗는 이들이라 보며 거부하는 시각도 있다. 이런 시각을 가진 이들은, 인도적으로 난민을 대우하라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 그럴 거라면 당신부터 그들을 데리고 살라며 조롱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 정부는 이미 1992년 난민 협약에 가입했고 2013년부터는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시행하고 있어서, 한 개인이 난민을 맞아들이고 말고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난민 문제를 대처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번 예멘 난민 상황은 국민의 합의가 다시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 이미 가입한 난민 협약과 이미 존재하는 난민법에 따라 국가가 합당하게 대응하고 맞아들일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나그네로 살면서 나그네 영접하라고 주신 땅
난민 거절은 '예수님 거절'과 같아

앞으로 계속해서 난민이 한국을 찾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 때문에 우리의 일자리와 우리의 안전이 위협받는 것은 아닐까. 전혀 확인되지 않는 두려움이 온갖 소문을 타고 우리를 두렵게 하며 불안하게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지나친 불안과 두려움은 우리 발목을 붙잡고 가장 보수적이며 가장 안전한 선택을 하도록 이끈다. 그 모든 안전한 선택의 최우선 기준은 나의 안전, 내 가족의 안전이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난민의 고통, 난민의 괴로움은 그저 남의 일일 뿐이다. 난민은 그저 내 안전과 내 일자리를 흔들고 빼앗을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 나아가 잠재적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이를 생각할 때, 하나님 백성의 거룩한 삶의 요체를 가르치는 레위기 율법에서 이제 곧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게 될 이스라엘을 가리켜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레 25:23)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특별하다. 그들에게 이제 곧 땅이 주어질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가리켜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 쉽게 말해 '나그네이며 잠시 머무는 자'로 표현하신다.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은 그들의 소유가 아니라 나그네로 살아가는 땅, 잠시 머무는 자로 살아가는 땅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야말로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첫 사람이기도 하다. 조상, 친척, 아버지의 땅을 떠나 전혀 알지 못하는 땅으로 가도록 부름 받은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조상이라는 점은,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신앙인의 가장 근본적인 삶의 모습임을 명확히 보여 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자신들이 종이요 나그네였음을 기억하라고 계속해서 촉구하시며, 그를 기억하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사랑할 것을 끊임없이 명령하신다(출 22:21; 23:9; 신 10:19; 24:19; 슥 7:10). 무엇보다 하나님이야말로 나그네를 사랑하고 보호하시는 분이시니(신 10:18; 시 146:9)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닮는 삶이다. 우리에게 주신 우리 땅은 우리 소유로 가지라고 주신 땅이 아니라 나그네로 살면서 나그네를 사랑하며 영접하라고 주신 땅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을 향해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명령하시며 자손을 주시리라 약속하신다. 마침내 창세기 21장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얻게 된다. 이러한 배열을 고려할 때, 17장과 21장 사이에 놓인 18-20장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세 장을 관통하는 주제는 '나그네 대접'이다. 자신이 사는 곳에 나그네가 찾아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대하는가.

아브라함과 롯은 나그네가 마치 주인인 것처럼 극진히 맞아들여서 대접했다(창 18:1-8; 19:1-3).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모두 몰려가서 나그네를 짓밟으려고 하였으며(19:4-11), 블레셋 그랄 사람은 나그네의 아내를 빼앗고 짓밟으려고 하였다(20:1-2). 나그네의 여자가 위험에 처하는 것은 애굽에서도 일어났고(12:10-20) 블레셋에서는 반복되었다(26:6-11). 세겜성에 들어간 디나가 성폭행당한 사건(34:1-2), 베냐민 기브아에 들어간 레위인의 첩이 윤간당한 사건(삿 19:22-26) 모두 나그네에게 자행된 폭력이 사태의 본질일 것이다. 창세기 17-21장이 지닌 배열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한 삶'을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하는 삶으로 구체화하여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아브라함과 소돔을 찾은 나그네는 하나님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 본문은 그 유명한 마태복음 25:31-46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영생에 들어가는 의인'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배고플 때 음식을 대접하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옷 입히고 병들었을 때나 옥에 갇혔을 때 찾아가서 만난 이들이다. 예수님을 대접하려는 이들은 예수님을 대접할 수 없었고, 어려움에 처한 작은 자를 찾아보고 맞아들이고 돌아본 이들은 예수님을 대접했다.

종교에 몰두한 이들은 예수님을 결코 대접할 수 없었고, 도리어 어려움을 겪는 작은 자를 향하였던 이들은 예수님을 대접할 수 있었다. 그 작은 자 하나가 예수님이었다. 그렇게 어려움을 겪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이었다. 그래서 나그네 되어 도움을 청하는 이를 거절하는 것은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나그네로 찾아온 난민을 거절하는 이는 어떤 신앙고백을 하든 예수님을 거절한 자들일 따름이며, 마태복음 25장은 그들을 기다리는 것이 영원한 형벌임을 명확히 한다.

나그네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명료하다.

복음의 의미,
조건 없는 이웃 섬김

우리가 고백하는 복음의 가장 간결한 형태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라는 구절을 들 수 있다. 더 간결하게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간직한 이 복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주님으로 믿는다는 고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상의 다른 어떤 것도 우리의 주이지 않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바울 시대의 로마제국이든, 오늘날의 그 어떤 강력하고 견고한 세력이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심을 선언하는 것이다. 아무리 큰 위협이 있다 해도,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다 해도, 예수만이 우리의 주님이요 온 땅의 하나님임을 선포하며 신뢰하는 것이 이러한 신앙고백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 땅에 자유를 찾아온 난민을 대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더는 문제이지 않을 것이다.

유입되는 난민으로 우리네 일자리가 축소될 수도 있고 난민으로 경제적 혼란이 커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세상의 주가 되심을 굳게 믿는다면, 그러한 우려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선언할 수 있다. 우리 여건이 그리 여의치 않아도, 우리 가진 것이 별로 없고 우리 살기에 힘들어도, 예수님께서 주가 되시니 우리는 찾아온 난민을 맞아들이고 함께 살 수 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한반도 땅에 한국인들만 살아서가 아니라, 난민들이 들어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의 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무엇이 구원일까. 구원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풍성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서로 사랑하는 삶을 가리켜 구약에서는 칼이 보습으로 창이 낫으로 바뀌는 세상(사 2:2-5)이라 표현하고,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뛰어노는 세상(사 11:6-9; 65:17-25)이라 표현했으며, 이러한 세상을 두고 "새 하늘과 새 땅"이라 표현하였다(사 65:17). 이렇게 생각하면 구원은 단순히 죽은 다음의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부터 경험하고 누리고 맛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를 모르던 시절에는 나밖에 몰랐고 나의 안전, 나의 성공이 전부였는데, 예수를 믿은 후에 다른 사람을 돌아보게 되고 함께 살아가는 우리 이웃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구원이고 이것이 은혜이다. 구원은 내세에서의 영생 불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이기적이던 사람이 하나님 명령을 따라 이웃과 함께 살아가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게 된 삶의 변화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원래 살던 땅에서 이러저러한 혼란과 고통, 핍박을 도저히 견디다 못해 우리나라에까지 피신하여 살길을 찾아온 난민을 맞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것은, 이 땅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한다. 그러므로 난민들과 함께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보여 준다.

우리 신앙을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인 고백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은혜이다. 헬라 말 '카리스'는 대개 개역성경에서 '은혜'로 번역되었지만, 달리 '선물'이라 옮길 수 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은혜, 주님이 주신 선물의 본질적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받을 만한 사람에게, 쓸모가 있어 보이는 이에게, 세상에서 어느 정도 능력과 자격을 갖추어서 이렇게 선물을 주면 되갚을 수 있겠구나 싶은 이에게 선물을 주신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자격 없는 이들에게 주신 은혜, 선물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렇기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이 영광의 복음을 영접하고 그의 백성, 그의 자녀가 되었다.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신 이 선물을 받았다면, 그리스도인은 결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영접하는 데 자격을 말할 수 없다. 자격 없는 이에게 주신 사랑을 받았다면, 우리 가진 것을 나누고 섬길 이웃을 결정할 때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 조건을 제시할 수 없다. 구약과 신약이 전하는 것의 핵심을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로 요약할 때, '이웃'을 규정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한 가지 이유, 우리 곁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는 그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 땅을 찾아온 예멘 난민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지, 적어도 기독교인에게는 명확하고 분명하다.

6월 14일, 라마단 금식 기간이 끝나고 호텔 지하에서 공동 식사를 하는 예멘인들. 뉴스앤조이 박요셉

낯선 이웃과 함께 살 것인가
우리끼리만 살 것인가

그러나 오늘날 우리네 교회는 도리어 끊임없이 이웃의 조건을 제한하고 좁힌다.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만, '동성애'를 고치려고 하지 않거나 뉘우치지 않는 이들은 그 사랑에서 배제된다. 중동을 향한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자신의 이슬람 신앙을 바꾸지 않는 '무슬림'은 안 된다고 말하며, 우리가 그 땅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우리 땅에 살겠다고 찾아오는 무슬림은 안 된다고 말한다. 자격 없는 이에게 주시는 사랑을 경험했으면서도, 우리네 교회는 이웃의 조건을 말하고 이웃의 범위를 좁힌다. 그것은 복음이지 않으며, 그렇게 행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교회일 수 없다.

아모스·호세아·이사야·예레미야와 같은 구약 예언자는, 다들 별문제 없다 생각하는 시대에 이스라엘의 죄악이 얼마나 크며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폭로하고 드러낸다. 그 점에서, 예멘 난민의 존재는 예언자와 같다. 우리 땅에 찾아온 예멘 난민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배타적이고 이기적인지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예멘 난민은 우리의 평화라는 것이 그야말로 '우리끼리만의 평화'임을 폭로한다.

나그네였던 아브라함, 난민이 되어 애굽 땅으로 피신하셔야 했던 아기 예수를 모른 체하며 마치 한반도가 '순수한 한국 사람'만이 살아가는 '우리만의 땅'인 것처럼 여기고 있음을, 오늘의 현실은 낱낱이 고발한다. 그래서 예언자의 선포는 우리가 어떤 길을 걸을지 그때도 지금도 촉구한다. 도움을 청하는 낯선 이웃을 맞아들여 함께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내세우고 우리와 비슷한 사람만을 이웃으로 여기며 우리끼리만 살아갈 것인가.

김근주 / 기독연구원느헤미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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