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진정한 가치는 역사, 신앙, 삶의 아름다운 만남에서 이루어집니다. 'ㄱ자 교회'로 불리는 전북 김제시의 금산교회는 소중한 전북 문화재 자료 제136호이지만, 이 교회를 세운 두 신앙인 이야기가 더 귀합니다. 남자와 여자, 양반과 머슴으로 구분해 차별하던 봉건시대에 사랑과 평등, 섬김과 나눔의 기독교 가치를 실천한 장로 조덕삼(1867~1919)과 목사 이자익(1879~1958)의 이야기입니다.

금산교회. 이근복 그림

조덕삼은 교통의 요지이고 사금 광산이 있어서 사람들로 북적이던 김제 용화마을에서 제일 큰 부자였습니다. 1897년, 6세 때 부모를 잃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고향인 경상도 남해를 떠나 멀리 금산까지 온 열일곱 살 이자익을 마부로 들어앉혔습니다. 테이트(Lews Boyd Tate, 1862~1929) 선교사는 어느 날 조덕삼의 마방에 말을 맡기고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서양 선교사를 지켜본 조덕삼이 그에게 "살기 좋다는 당신네 나라를 포기하고 왜 이 가난한 조선 땅에 왔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오직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선교사의 희생정신과 용기에 감동받은 조덕삼은 자기 집 사랑채를 내주어 예배하도록 했고, 이것이 1905년, 금산교회의 출발이 됐습니다.

소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이자익은 어깨너머로 배운 천자문을 줄줄 외웠습니다. 이를 목격한 조덕삼은 자기 머슴이었지만 아들(조영호)과 함께 공부하고 신앙생활도 같이하도록 배려했습니다. 몇 년 후 조덕삼과 이자익은 영수(장로보다 낮은 직분으로 교회의 행정과 설교를 맡아서 하는 직책 - 필자 주)가 되었고, 1907년 금산교회의 장로 선출 투표에 이들이 후보에 올랐습니다. 신분 질서가 엄격했던 시절에 주인과 머슴이 경쟁 상대가 되었는데, 투표 결과는 더 놀라웠습니다. 머슴 이자익이 주인 조덕삼을 누르고 장로로 선출된 것입니다. 경악한 교인들 앞에서 조덕삼 영수는 더욱 놀라운 발언을 했습니다.

"우리 금산교회 성도님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훨씬 높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지주는 먼저 피택받은 머슴을 조금도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장로가 된 이자익이 테이트 선교사를 대신해 강단에서 설교할 때면 조덕삼은 교회 바닥에 꿇어 앉아 설교를 들었습니다. 집에서는 이자익이 조덕삼을 주인으로 깍듯이 섬겼습니다. 조덕삼은 자기 머슴을 섬겼을 뿐만 아니라 이자익 장로가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느라고 강단을 비울 때는 대신 설교했고, 학비는 물론 가족의 생활비까지 지원했습니다. 조덕삼은 3년 뒤 비로소 장로가 되었습니다.

조덕삼 장로는 1906년에 자비를 들여 유광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의 민족 교육에 나섰습니다. 아쉽게도 조덕삼 장로가 1919년 52세 젊은 나이에 별세하자, 아버지 뒤를 이어 유광학교 교장이 된 큰아들 조영호는 나라 사랑을 가르치며 태극기를 그리게 했습니다. 이자익 목사도 강단에서 민족의식을 불어넣은 영향으로 금산교회 교인들과 학생들은 1919년 3·1 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영호 교장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곤욕을 치르다가 북간도로 가서 독립운동에 가담했습니다.

이자익 장로가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가끔 폭소가 쏟아졌다고 합니다. 우리말이 서툰 선교사가 이자익을 '이자식'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는 목사 후보생으로 철저히 훈련을 받았고, 특히 이길함(Graham Lee, 1861~1916) 교수에게 영향을 받아 항상 소외받은 이들과 동행하는 목회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1915년 이자익은 금산교회 2대 목사로 부임했습니다. 이자익을 담임목사로 적극 청빙한 사람이 조덕삼 장로였습니다. 장로회 총회가 1938년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후, 이자익 목사는 친일 세력에 협조하지 않고 목회에만 전념하며 은둔하다가 해방 후 남부총회의 재건 운동에 참여합니다. 그는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1924년에 처음으로 13대 총회장을 지냈고, 사양했는데도 33대와 34대에 걸쳐 3번이나 교회의 수장이 될 정도로 한국교회에서 존경받는 사표師表가 됐습니다. 명예욕에 눈이 멀어 파벌을 만들고 금권 선거도 마다하지 않는 요즘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1952년, 대전신학교를 설립해 가난한 학생들도 목회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1958년 79세로 별세했는데, 이듬해 장로교가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으로 분열했습니다. 많은 이가 이자익 목사가 있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습니다.

금산교회가 점점 부흥하자 1908년, 조덕삼 장로가 헌납한 땅에 일곱 칸짜리 한옥으로 기역 자(ㄱ)형 교회당을 지었습니다. 지난 2월 초, 30년간 금산교회를 지키신 이인수 목사님의 친절하게 안내를 받으며 금산교회에 들어가 보니, 추운 날씨에도 아늑했습니다. 오랜 소나무에서 솔향기가 풍겨 왔습니다. ㄱ자 중심에 강대상이 있고 남자와 여자 교인이 따로 앉는 양 날개가 있습니다. 출입문도 양쪽으로 있는데, 전에는 중간에 휘장도 쳤다고 합니다.

당시 엄격한 유교 사회의 남녀 구분이라는 과제를 해결한 것으로, 기독교의 서양 문화가 한국의 유교 문화와 대립하지 않고 한국 토양에 맞게 토착화했다는 것을 잘 보여 주었습니다. 6·25 전쟁의 참화에서도 금산교회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좌익계 청년들이 '우리 교회'라고 하며 지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길 건너 금산교회 전시관에는 많은 문서와 사진, 유물이 있었는데, 113년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게 했습니다. 당시 사용하던 것과 같은 풍금은 100년 이상 된 유물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저항적 신앙생활을 한 교우들은 이런 풍금에 맞춰 힘차게 찬송가를 부르고, 숨죽이며 애국가를 배웠을 것입니다.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는 매월 2차례 업데이트됩니다.

이근복 / 목사,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쳐 현재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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