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 관계자들에게 존경할 만한 원로목사를 추천해 달라고 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서울 안동교회 유경재 원로목사입니다. 총회장이나 대형 교회 담임을 한 것도 아닌데 많은 이가 유 목사를 기억합니다.

유경재 목사는 진취적인 목사로 평가받습니다. 통일, 환경, 경제 정의 등을 위한 '특별 신앙 운동'을 전개해 왔고, 교단 안에서 최초로 여성 장로를 세웠습니다.

이런 이력도 그렇지만, 유 목사가 주목받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설교'입니다. 그의 설교에는 '역사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1970~1980년대 군부독재 당시에도 정부를 비판하는 설교를 해 왔습니다. 6월 항쟁 직후 "이제라도 교회가 적극 동참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유 목사는 설교에 '역사의식'이 담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하나의 '사건'을 경험할 수 있도록 목사들이 도움을 줘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9월 1일 경기도 용인에 거주하는 유경재 목사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봤습니다. - 기자 주

'진취적인 목사'로 평가받는 예장통합 안동교회 유경재 원로목사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유경재 목사는 2004년 안동교회에서 조기 은퇴했다. 정년보다 5년 일찍 물러났다. 예년에 비해 창의력이 떨어졌다. 교인들도 새로운 목사를 원하는 듯했다. 후배 목회자에게 자리를 물러 주자는 취지 아래 깔끔하게 물러났다.

은퇴 이후 자유로운 삶이 펼쳐졌다. 은준관 박사 요청으로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임상교수를 맡고, 뜻있는 은퇴 목회자들과 함께 '더불어한교회'를 개척했다. 2012년부터 팟캐스트 '한국교회 길을 묻다'와 '새벽을 기다리며'를 제작·운영해 오고 있다. 탄핵 정국 때는 교인들과 함께 매주 촛불 집회에 참석했다. 유 목사는 "은퇴 이후 단 한 번도 외롭다거나 허전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다"고 말했다.

현재 유 목사는 설교집을 준비 중이다. 자택 서재에는 유 목사의 설교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28년간 해 온 설교는 노트에 빠지지 않고 기록했다. 유 목사는 "설교를 할 때마다 교인들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게 '사건'을 일으키고자 했다. 사건이 없는 설교는 '죽은 설교'다"고 말했다. 일례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가 한 교인으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은 적도 있다. 그 교인은 육영수 여사의 친척이었다.

유 목사는 설교에 '역사의식'이 깃들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역사와 상관없는 설교는 '헛소리'라고 지적했다. 특별히 후배 목회자들에게 신학 논문·서적을 꾸준히 읽고, 시대 흐름을 짚고, 인문학적 소양을 키울 것을 주문했다.

유 목사는 <뉴스앤조이> 취재진을 위해 직접 커피를 만들어 줬다. 고소한 커피 향이 자택을 물들였다. 유경재 목사와의 인터뷰를 정리했다.

"조기 은퇴, 후회한 적 없어"
은퇴 이후 신학교 강의,
김상근·신경하·이재정 등
원로들과 교회 개척

- 2004년 5월, 65세에 은퇴했다. 정년보다 5년 일찍 물러나는 이유에 대해 "창의력이 떨어지고,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또 다른 이유는 없었나.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당시 안동교회 시무장로 중에도 일찍 은퇴한 분들이 있었다. 교인들이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담임목사도 그만뒀으면 하는 분위기였다. 내 목회는 영적인 열정을 강조하기보다 합리적이고 지적인 면으로 치우쳐 있었다. 나와는 다른 감성적이고 영적인 목회자를 은근히 원했던 것 같다. 아내도 일찍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은퇴한 것이다.(웃음) 일찍 은퇴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오히려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일찍 은퇴한 목회자 중에는 외로움 내지 허전함을 느끼는 경우도 있는데.

목회할 때보다 더 자유로워졌으니 좋았다. 하루 종일 영화 본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고.(웃음) 외로움은 전혀 없었다. 은퇴 이후에도 꾸준히 활동해 와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은준관 박사 요청으로 2005년부터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임상교수를 맡았다. 2009년부터 기장 김상근 목사, 감리회 신경하 전 감독회장, 성공회 이재정 신부(현 경기교육감) 등과 함께 더불어한교회를 세우고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다.

- 정치 성향으로 놓고 봤을 때 진보적인 분들이 더불어한교회에 많이 다니는 것 같다. 지난 탄핵 정국 때 교회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을 것 같다.

사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가슴이 정말 답답했다. 우리 모두 낙담했다. 탄핵 정국 당시에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매주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설교하고 있는데, 박근혜 정부의 문제점을 짚기도 했다. 교회에는 30여 명이 출석하는데, 탄핵 정국 당시 교인들과 함께 촛불 집회에 부지런히 참석했다.

- 은퇴 직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제는 죽을 준비를 할 것이다. 부활에 대한 설교는 많이 하지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목사는 거의 없다.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했다. 목사님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나.

아름다운 죽음이란, 죽음을 삶의 종말로 생각지 않고 죽음 후의 삶을 바라보며 의연하게 맞는 죽음이다. 우리가 일생을 사는 동안 품위 있는 삶, 존엄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만큼 죽을 때도 품위 있게 존엄한 최후를 맞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기독교는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 따라서 우리에게 죽음은 종말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이자, 관문이다. 육체를 입고 사는 삶에 국한하여 죽음을 생각하면 종말이 되지만, 하나님이 계획하신 영원한 삶까지 이어진다는 믿음에서 바라보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침체기 겪던 안동교회 부임
"성경 읽어 준다고 설교 아냐,
올바른 길 선택하도록 방향 제시해야"

- 안동교회는 1909년 설립된 교회로, 2년 후면 110주년이 되는 역사가 있는 교회다. 1976년 12월 안동교회에 부임해 28년간 시무했고, 이 교회 최초 원로목사가 됐다. 목사님에게 안동교회는 어떤 의미인가.

조부모님이 안동교회 창립 멤버였다. 나의 '고향 교회'이기도 하다. 안동교회는 한때 '양반 교회'로 불릴 정도로 많은 사회 지도자가 교회에 출석했다. 독립운동가도 있었고, 민립 대학 건설을 위한 모금 운동을 하는 분도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 시작된 교권 다툼으로 존재감이 약화됐고, 예장과 기장이 분리될 때 어느 곳에 속할지 제대로 정하지 못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내가 부임하기 전까지 교회는 겨우 명맥을 유지해 왔다.

부흥하던 교회가 아닌 바닥까지 내려간 교회 목사로 부임한 게 오히려 내게는 기회가 되었다. 굳어진 전통이 없기에 새로운 목사의 목회 정책을 잘 받아주었다.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교회가 오히려 다른 교회보다 진보적인 교회로 평판이 나기 시작했다. 내게 남다른 역량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여건을 갖추어 주셨기에 나름 대과(大過) 없이 28년의 목회를 마칠 수 있었다. 안동교회는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큰 은총의 기회였다.

- 유신 체제, 군사정권을 거쳐 격변의 시대를 살아왔다. 나라에 굵직한 일이 터질 때마다 역사의식을 담아 정부를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 일례로 6월 항쟁 직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새 역사라고 보았다. 교회는 새로 시작되는 역사 앞에서 과거의 소극적이었던 죄를 회개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 사회의 민주화에 헌신해야 한다"는 취지로 설교했다.

설교는 원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지, 성경을 그대로 읽어 주는 게 아니다. 그런데 많은 목사가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중심으로 약간의 해석을 담아 전하고 있다. 그것이 과연 설교라고 할 수 있을까. 설교란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특히 격동하는 역사 속에서, 그 역사를 올바로 보고 거기에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있는지를 살펴 (사람들이) 올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은 식민지 억압, 해방, 분단과 전쟁, 그리고 혁명과 군사정변 등을 거쳤다. 격동하는 역사를 외면한 채 그 역사와 상관없는 성경 말씀을 전한다는 건 헛소리에 불과하다.

- 혹자는 젊은 날의 패기로 군사정부를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은퇴 이후의 설교도 날이 서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직후 목사님은 "국민이 정신을 차려서 정권의 실상을 똑바로 보고 계속 저들을 감시하며 비판하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을 수 없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국민을 위한, 국민을 두려워하는 정권이 되도록 만들어 가야 한다"고 경고했다.

젊었을 때도 객기를 부려 설교한 것이 아니라 구원사 신학을 바탕으로 설교를 준비했다. 나이 들어 은퇴 후에는 그 신학적 신념이 더욱 확실해졌을 뿐이다. 처음 목회를 시작했을 때가 1970년대 유신 정권 말기였다. 이후 군사정권이 이어졌는데, 국민을 위한 국가, 정의와 평화를 위한 정권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고 설교를 생각했다. 참여정부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다시 국가권력의 폐해가 되살아남을 봤다. 하나님나라를 설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윤보선 전 대통령 부부가 안동교회에 출석했다. 전 대통령 부부가 민주화 운동을 하고, 특히 공덕귀 여사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주관하는 '목요 기도회'에 다녀서 당국으로부터 감시·견제도 받았다. 담임목사로서 부담이 컸을 듯하다.

대통령 내외는 매주 일요일 맨 앞자리에 나와 예배를 드렸다. 이 자체만으로도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내가 사회 비판적 설교를 해도, 교인들이 불평하지 않게 하는 보이지 않는 지원이 되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 자택은 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교회와 윤 대통령이 지내는 자택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늘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분들이 우리 교회에 출석하기 때문에 정보원들이 내 설교도 주목했을 것이다. 그러나 감사한 일은 이분들이 내게 '목요 기도회'에 참여하라거나, 성명에 서명하라거나 요구를 한 적이 없다. 그분들은 이런 방식으로 목사를 배려했다.

"차별성 있는 설교 하고 싶다면
신학 논문·서적 꾸준히 읽고
정치·경제·사회 등 인문학적 통찰력 키워야"

- 설교 홍수 시대다. 설교는 차고 넘치지만, 차별성이 없고 비슷비슷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몇 가지만 짚어보면, 첫째, 목사들이 신학교를 졸업한 후 교회 일에 쫓기다 보니 공부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 같다. 신학 논문이나 신학 서적을 꾸준히 읽으면서 성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연구를 해야 한다.

둘째,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 시대를, 이 역사를 읽지 못한 것이 원인이라고 본다. 매일 끊임없이 쏟아지는 뉴스를 접하면서도 시대 상황과 전혀 관계없는 성경 이야기만 하고 있다.

셋째, 나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인데, 목사들이 인문학 서적을 잘 읽지 않는다.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종교·철학 등 인문학 전반에 관한 광범위한 지식을 바탕으로 설교가 준비되어야 한다. 이게 안 되니 차별성 없는 설교가 남발할 수밖에 없다

- 설교에 부담을 느낀 일부 목회자는 다른 목사의 설교를 표절하거나, 심지어 돈을 주고 사기도 한다. 목사님은 이와 같은 유혹을 경험한 적 없었나. 후배 목회자들에게 설교 준비와 선포에 대한 조언해 준다면.

설교를 표절하는 건 있을 수 없다. 한 가지 팁을 준다면, 좋은 설교집을 참고하라. 설교학 시간에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다. 나는 신학자들의 설교집을 자주 참고했다. 배울 것이 많다. 그러나 그걸 그대로 표절하지는 않는다.

외국 신학자들의 설교를 그대로 인용하기도 어렵다. 그들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며,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적용하는지 등을 참고해야 한다. 내가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의 상황이 (설교집과) 전혀 다를 수 있다. 더 중요한 건 앞서 이야기한 대로 설교자가 많은 신학·인문학 서적을 통해 깊이 있는 통찰력을 키워야 한다.

- 목사들이 설교 시간에 던진 메시지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될 때가 있다. 세월호 참사나 탄핵 정국 때 정권을 비호하는 발언을 했다가 뭇매를 맞은 목사들이 대표적이다. 역사적 사건을 마주한 목사들은 어떤 방식으로 설교해야 하나.

기본적으로 목사들은 국가를 중심에 두지 말고 하나님나라를 중심에 두고 설교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는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일제강점기 핍박을 당했고, 한국전쟁을 통해 공산 치하에서 교회가 존재하기 어렵다는 걸 경험했다. 많은 기독교인이 '국가가 있어야 교회도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된 계기다. 이런 그릇된 신념 때문에 정권이 행하는 모든 일에 무조건 동조하고 지지하게 됐다.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러한 국가주의를 극복하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없다.

유 목사는, 한국교회가 가장 먼저 집단의식을 회개해야 한다고 했다. 대표적인 예로 반공과 친미를 들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한국교회, 국가주의 극복해야
나라 없다고 신앙 없어지는 것 아냐
반공·친미 사로잡힌 집단의식 회개부터"

- 탄핵 정국 때 태극기 집회에서 만난 기독교인은 "나라를 잃으면 신앙도 없다"고 주장했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노년 세대에서 이런 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목사님도 한국전쟁을 경험했는데, 이런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 주장이 그 세대에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나라 없는 설움을 아는 사람들은 대통령이 독재를 해도 내 나라에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나라가 없으면 교회도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 되었을 때 그들의 신앙의 중심인 성전이 파괴되었고,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성전을 지을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도 유대교는 성전 없는 종교로 그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야훼 신앙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꼭 나라가 있어야 교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라가 없어도 신앙은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고난 속에서 더 강화된다고 본다.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나라가 있어야 교회도 존재한다"는 명제에 사로잡혀 반공을 기독교화하고, 기독교를 반공화했다고 하겠다. 이 명제를 깨지 않는 한 한국교회가 개혁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 목사님은 2007년 한 강연회에서 "한국교회 집단의식으로 자리 잡은 '반공'과 '친미'부터 회개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와 반공·친미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닌가.

그렇다. 회개는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에도 해당된다. 집단의식은 오랜 세월 한 집단을 형성하는 규칙이나 관습이나 이념이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 의식은 좀처럼 바뀌지 않기에 집단의 잘못된 의식은 오래가기 마련이다.

한국교회 집단의식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바로 반공이요 친미다. 박노자 교수는 "한국교회는 반공을 기독교화, 기독교를 반공화하였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한국교회 상당수의 보수화는 바로 이 반공이라는 집단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이런 반공의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회개하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희망이 없다. 물론 이런 의식에서 탈피하여 바르게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작은 교회들이 있어, 그 희망의 불은 꺼지지 않고 타오를 것이라 믿는다.

- 시대 흐름에 따라 목사님의 생각도 많이 변한 것으로 안다. 가령, 전도를 통한 교회 부흥을 노력해 오다가 1990년대 들어 특별 신앙 운동을 전개했다. 하나님나라를 이루려면 사회에서 공의(통일, 환경, 경제 정의 등)를 실현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생각이 바뀐 게 아니다. 나도 전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특히 목회 초기에는 침체된 교회를 일으켜야 했기에 거기에 중점을 두었다. 오랜 숙원이던 교회당을 건축하고 나서부터 그동안 잘하지 못했던 외부 선교 지원과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통일, 환경, 경제 정의 등을 교회의 신앙 운동으로 이끌었다. 선교 범위가 전도에서 여기까지 확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 신앙 운동이 하나님나라 실현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하나님나라는 이다음에 가는 나라가 아닌 이미 이 땅에 시작되었고, 특별 신앙 운동 같은 게 바로 그 나라 시민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라고 보았다.

교단보다 앞서 여성 장로제 도입
"남녀 인격·역량 같아,
여자가 목사·장로 되는 데 걸림돌 없어야"
교회 대형화가 목회 '세습' 낳아

목회 세습도 언급했다. 유 목사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다. 아무리 아들 목사가 훌륭해도 세습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 남녀평등이라는 취지 아래 교단보다 3년 일찍 여성 장로제를 교회에 도입(1991년)했다. 당시 파격적인 내용이었을 텐데 교회 내 반대하는 움직임은 없었는가.

반대는 없었고 오히려 모두 적극 찬성했다. 공동의회에서 단번에 한 사람을 선택할 수 있었다. 사실 남녀평등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세운 것은 아니다. 단순하게 여성도 장로로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교단 헌법이 개정되기 이전이라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안수 없이 장로 역할을 감당할 여신도를 선출하자"고 정책 당회에 제안했다. 통과가 되어 1991년 한 사람을 선출했다. 그 후 1995년에 총회 헌법이 개정되어 여성 안수가 허락되면서, 1996년 예장통합 교단 첫 여성 장로가 되었다.

- 예장합동처럼 아직도 여성 안수를 주지 않는 교단이 더러 있다. "주님 안에 우리는 하나"라고 고백하지만, 정작 여성 목사 안수나 여성 총대 할당제 앞에서 많은 목사와 장로가 반대 의사를 표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선포했다. 이 갈라디아서(3:28) 말씀은 분명한 선언이다. 명제이다.

남자와 여자가 역할이 다를 수 있지만, 그 인격이나 역량은 같기에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일에 걸림돌은 없다. 새로운 정부가 여성장관 30%를 실현하였는데, 교회도 여성 총대 할당제를 조속히 실현해야 한다.

- 교회의 양적·구조적 팽창이 목회 세습과 같은 일을 불러왔다고 평가한 바 있다. 공교롭게도 목사님이 속한 예장통합 명성교회가 교단 결의를 어기면서까지 세습을 시도했다.

세습이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가 대형화했기 때문이다. 옛날에도 목사가 아들 목사에게 교회를 이어 가게 한 적은 있었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교회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습이 문제가 되는 것은 대형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 능력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걸 자식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기 아깝다고 생각해서다. 다시 말해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생각지 않고 자기 것으로 착각하고 그걸 세습하겠다는 것이 문제다.

교인들이 원하면 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주장하지만, 아무리 목사의 아들이 뛰어난 능력 있는 목회자라 할지라도,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도 세습을 피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회 세습은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이기를 멈추고 세속화되었음을 뜻한다.

- 목사님은 "교회 안에 구원이 있다는 생각은 틀렸다", "대형 교회 안에 한국교회 문제가 집중돼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작고 약한 것 속에 천국이 시작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비유나 그 교훈에 비추어 볼 때 대형 교회는 문제가 있다. 대형 교회를 지향하는 건 자기를 비우고 겸손을 추구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자세와 일치하지 않는다. 대형화는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그 힘을 과시하려 하기 때문에 항상 시험에 들기 쉽다. 교회의 대형화 유혹은 목회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 한국교회가 개혁되기 위해서는 목회자의 변화, 개혁이 필요해 보인다. 목사님은 "목사들이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설교하면 교인들이 힘들어한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다. 목사가 확신을 갖고 가르치면 교인들도 신앙의 깊이가 달라진다. 목사가 안주하려 하니 문제가 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신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교회에 적용하는 게 어렵다고 말하는 목회자가 적지 않다.

교회에서 신학을 강의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령 내가 구원사 신학을 바탕으로 목회를 했지만, 구원사신학을 교인들에게 강의한 건 아니다. 설교가 그 신학적 바탕 위에서 준비된 것이지, 신학 자체를 설교한 게 아니다.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때그때 변하는 현실을 좇을 것이 아니라, 자기 신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목회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1970년대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교회 성장론에 매몰된 적 있다. 이는 교회론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우주적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다면, 교회 성장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좀 더 신학적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한국교회가 새로워질 것이다.

- 특별히 목사님께 영향을 준 학자나 사상가가 있다면.

함석헌 선생님이다. 대학 시절부터 <사상계>를 통해 그의 글을 읽으면서 영향을 받았고, 군대 가서도 그의 책 특히 <뜻으로 본 한국 역사>(한길사)를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잡지 <씨알의소리> 애독자였다. 그분과 친분은 없었지만, 그의 자유롭고 틀에 매이지 않는 사상이 내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 지난 목회 여정을 돌아봤을 때, 아쉽거나 후회되는 점은 없나.

후회되는 것은 없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내 역량이 그것밖에 안 되기 때문에 훨씬 뛰어난 목회를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목회를 잘했다는 뜻이 아니다. 내게 주어진 능력 안에서 최소한의 역할을 했을 뿐이지만 그걸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쉬움이 있다면 좀 더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이다. 외국 유학도 하고 싶었는데 못했다. 좀 더 폭넓게 교회와 교단과 교계를 위해 일하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유 목사는 설교에 '역사의식'이 깃들어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인문학적 소양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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