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교회 측에서 지난 8월 25일, 옥성득 교수의 새로 쓰는 한국교회사에 게재된 '남대문교회는 정말 130년 전에 세워졌을까'에 대한 반론을 보내왔습니다. 서울대 치의학대학원에서 치의학사를 가르쳤던 남대문교회 장로 신재의 박사가 쓴 글입니다. (옥성득 교수 글 바로 가기) - 편집자 주
▲ 서울 중구 퇴계로에 있는 남대문교회. (사진 제공 남대문교회)

"역사가의 1차 임무는 관련 사료를 발굴하고 정리해 사료 스스로 말하게 하는 실증적 연구를 하는 것이다. 2차적 임무는 자료의 해석인데, 이때 사료를 억지로 해석하지 않고 사건을 당대의 상황과 맥락 속에 놓고 다양한 사실들의 관계망과 상호 연결성을 보여 주어야 한다."

위의 글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해야 할 실증적 연구와 자료의 해석에 대한 태도로 "사료를 억지로 해석하지 않고 사건을 당대의 상황과 맥락 속에 놓고 다양한 사실들의 관계망과 상호 연결성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 첨가할 말이 있다.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역사 발전을 위해 사료의 새로운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1. 먼저 밝혀 둘 것은 남대문교회는 1885년 6월 21일을 한국교회의 시작이라는 입장에서 130주년을 이야기했을 뿐 아직까지 한 번도 개교회의 창립일로 발표한 적이 없다. 현재도 교회 창립 기념일로 지키고 있지 않으며, 지난 6월 행사도 이러한 주장을 하는 분들의 입장을 듣고, 왜곡되는 일이 없이 역사를 바르게 정리하게 위한 행사였음을 먼저 밝힌다. 제중원과 첫 공식 주일예배의 역사는 남대문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모두가 공유해야 할 중요한 역사라는 사실임에도 어느 개교회의 역사와 무관하다는 것은 역사학자로서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2. 제중원이 교회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느냐 여부를 밝히자면, 당대의 상황과 맥락 속에서 제중원 신앙 공동체는 존재해야 할 필요충분조건이 있었다. 선교가 금지된 상태에서 제중원은 선교사가 한국에서 체류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인 병원이었다. 제중원이 있었기에 알렌과 헤론이 제중원에서 의사로 근무할 수 있었고, 의사 스크랜튼이 의료선교사가 될 수 있었고, 언더우드가 약국에서 근무하며 제중원 의학생을 가르칠 수 있었으며, 스크랜튼의 어머니가 서울에 와 이화학당을 시작할 수 있었으며, 아펜젤러가 선교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뒤에는 미국 공사 포크가 있었다. 이러한 성격에서 제중원은 선교를 위한 신앙 공동체였다.

3. 당대의 상황과 맥락 속에서 알렌 등 선교사들이 가정 예배를 드리던 중 공식 주일예배를 드렸다. 이 공식 주일예배는 알렌의 표현대로 공식적이며 초교파적인 예배이자 당시로는 가장 형식을 갖춘 최선의 예배였다. 공식 주일예배는 계속됐고, 새문안교회사에 의하면 이후에 언더우드도 참석했고 조선인도 참석했고, 성찬식과 세례까지 베풀었다. 선교사와 외국인 교회인 서울유니언교회만의 출발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출발이다. 오늘날 선교지에서도 처음에 선교사들이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교회의 역사가 시작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4. "아마도 백낙준의 영어 책은 보지 않은 듯하다"는 말에 반박하자면, 백낙준의 <한국개신교사>는 보지 않은 듯하다. 백낙준 박사는 "stated Sunday service"를 "공식 주일예배"라고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낙준 박사가 "공식 주일예배"로 번역한 것을 "정기 주일예배"로 번역하는 것은 그 뜻을 미약하게 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 알렌 선교사. (사진 제공 남대문교회)

5. 아마도 알렌의 육필 원고를 보지 않은 듯하다. 알렌의 육필 원고를 보고 알렌의 일기를 번역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감사의 뜻은 표하지 못하고 "state이냐 stated이냐"로 알렌의 일기를 번역한 것을 폄하하는 것은 역사가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5. "공개적으로 예배를 드릴 자유도 없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예배가 될 수 없었다"는 말에 반박하자면, 예배를 드릴 자유도 없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예배가 의의가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는 알렌이 회장이었고, 언더우드가 회계였으며, 헤론이 서기였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회장인 알렌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6. 노춘경은 알렌의 어학 선생이었고, 알렌의 책상 위에서 가지고 간 한문 성경을 읽고, 1886년 7월 18일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고, 해링턴의 저서에 의하면 후에 감리교인이 되었다.

7. 유니언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교회는 없다. 한국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유니언교회는 선교사들의 교회일 뿐이다. 그러나 유니언교회든 한국교회든 동일한 입장에서 제중원 신앙 공동체가 이해되어야만 한다. <조선예수교 사기 상> 9~10쪽을 보면, 알렌이 오고, 언더우드가 오고, 아펜젤러가 오고, 헤론이 왔을 때 교회가 설립됐다고 한다. 또한 체육(體育)에는 제중원이, 지육(智育)은 육영공원이, 언더우드는 세례와 성찬식을 하면서 한국교회의 영육(靈肉)에 노력했다고 말하고 있다.

8. 남대문교회가 말하는 '제중원 신앙 공동체'는 1885~87년에 한국교회사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의료 사업 자체가 넒은 의미에서의 선교로 진행됐다. 제중원 안에서 한국인에게 기도하면서 약을 처방하고 전도지를 돌리며 치료할 수는 있었다. 따라서 제중원을 중심으로 형성한 '제중원 신앙 공동체'는 존재했다. 곽안련의 <The Life of Oliver R. Avison>에서 보면 병원 수위의 아들이 전도 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기록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이 제중원 직원으로, 조선인으로 점차 범위가 확대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택부는 제중원 주사였던 박준우가 후에 신실한 교인으로 자라게 된다고 했다. <미셔너리리뷰(The Missionary Review)> 'Corea'에 따르면 1885년부터 기독교를 알고 있던 사람들과 천주교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먼저 접한 잠재적 신자 일부가 선교사를 찾아 제중원에 왔다. 이들 중에는 서상륜 등이 포함돼 있다.

9. 남대문교회는 언더우드가 교회를 조직 완료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나, 조직 교회라 부르기에 미흡한 미조직 교회가 이미 있었다는 것도 인정하기를 요구한다. 한국 교회사는 조직 교회라는 부분에 너무 큰 비중을 두어 왔다. 교회의 시작을 조직 교회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은 특이한 상황에만 주목해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교회의 조직은 세계 선교 2000년 동안 선교 상황에 따라 인정해 왔다. 한국에서도 초기 선교 상황에 맞게 교회가 인정돼야 한다. 남대문교회는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조직 교회로 시작한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 남대문교회는 장감 연합(장로교·감리교 연합)으로 시작한 데다가 모든 선교지의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초기 역사에 대한 정리가 허술하다. 또 병원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남대문교회는 역사적으로 객관적인 자료를 원하며, 특이한 역사가 중요하지만 일반적인 것도 인정해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선교가 시작하는 때에, 장로와 예배당을 제대로 갖추어서 교회를 시작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따라서 일반적인 기준에서 세례를 주고, 성찬식이 시작되는 시점을 교회로 인정할 수 있다고 본다.

10. 남대문교회는 옥성득에게 개교회인 남대문교회사 집필을 의뢰하지 않았다. 선입견에 사로잡힌 역사 기술을 원하지 않으며, 한 번도 발표한 적도 지킨 적도 없는 창립 기념일에 대한 논의를 학자들에게 토의하고 연구하도록 의뢰했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매우 감정적인 처사가 아닌지 궁금하다. 우리는 역사 발전을 위한 사료의 제시와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는 분을 요구하며, 왜곡되지 않는 130년 한국 기독교 역사를 다시 한 번 정리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할 뿐이다.

신재의 / 남대문교회 장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치의학 박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전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겸임교수, 저서로 <한국근대치의학사>와 <한국기독교와 초기 의료선교>(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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