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7일 오전(한국 시각), 9일 동안 이어진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222명, 부상자는 1670명으로 증가했습니다. 희생자의 대부분이 민간인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구약시대 '하나님 백성', '제사장 나라'였던 유대인과 이스라엘, 현대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2013년 <복음과상황>에 연재했던 이인엽 박사의 글이 여전히 유효하여 <뉴스앤조이>에도 게재하고 나눕니다. 총 다섯 편의 글을 하나씩 올립니다. -편집자 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역사1)

지난 2012년 11월 14일부터 22일까지, 9일 동안 가자지구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이스라엘인 5명 사망, 팔레스타인인 162명 이상 사망, 그리고 1000명 이상의 부상자라는 엄청난 피해를 남기고 겨우 휴전협정이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폭력을 휘두른 양측 모두 지지할 수는 없지만, 비교할 수 없게 많은 팔레스타인 사망자 수와 압도적인 군사력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아이언 돔(Iron Dome: 이스라엘 라파엘사에서 개발한 로켓포 및 야포 방어 시스템 - 편집자 주)으로 하마스의 로켓 85~90%를 공중에서 요격하는 반면, 이스라엘군은 거의 무방비 상태인 가자지구를 최첨단 전투기로 맹폭해 민간인 피해자를 양산했기 때문이다.

▲ 2012년 11월 15일 이스라엘 공습을 받은 가자지구의 모습.
▲ 2012년 11월 15일 이스라엘 공습을 받은 가자지구의 모습.

이번 가자 사태를 계기로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아니냐"는 보수 기독인들의 주장에 의구심을 표하는 분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은 긴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친이스라엘 정책 뒤에는 미국 내 유대인들의 정치 로비와 근본주의 기독교 신학이 상당히 작용하고 있기에, 이는 역사와 정치, 신학을 아우르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한반도와 국제 관계를 고민해 보는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먼저 몇 회에 걸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역사와 주요 이슈들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이-팔 갈등의 역사 

잘 알다시피 거의 2000년 전 유대인들이 로마에 의해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아오는 동안, 아랍인들이 그 땅에 자리를 잡아 살고 있었다. 제1차세계대전 중 영국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군사 협력을 얻기 위해 맥마흔 선언을 통해 그들의 독립을 약속한다. 그러나 전쟁을 위해 시오니스트의 지지도 필요했던 영국은 1917년 밸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또 다른 약속을 한다. 지킬 수 없는 두 가지 약속을 한 셈이다. 이후 유럽과 러시아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인들이 이주해 오기 시작했고, 결국 유엔은 1947년 11월 팔레스타인의 약 56%를 유대 국가에, 약 43%를 아랍 국가에 할당하라고 결정했다. 아랍인들은 이 분할안을 거부했으나 이를 받아들인 유대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영토의 대부분인 87.5%를 소유하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6.6%만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56 대 43으로 땅을 나누라는 유엔의 결정은 상당히 불합리한 것이었다. 갑자기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면서 남한 영토 절반을 요구하고 일본인들을 이주시키거나, 우리가 고구려 역사를 근거로 중국에 만주 땅을 요구하고 주민들을 이주시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당사국들은 전쟁이라도 불사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 이러한 심각한 상황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유엔의 결정에 분노한 주변의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1948년에 1차 중동전쟁이 발생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은 유엔이 할당한 영토보다 훨씬 많은 팔레스타인의 78%를 장악하게 된다. 나머지 22%는 가자(Gaza)와 서안(West Bank)으로 나뉘어 1967년 6월 4일까지 각각 '가자'는 이집트의 통치하에, '서안과 동예루살렘'은 요르단의 통치하에 놓이게 된다(예루살렘은 양측 모두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이스라엘의 서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의 동예루살렘으로 분할됨). 이것이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자주 언급되고, 두 국가 해법의 기본 경계로 거론되는 '1967년 이전 경계'이다. 1차 중동전쟁으로 약 75~100만 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난민이 주변 아랍 국가로 피신한다. 이때 이스라엘은 '부재자 재산법'을 만들어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손쉽게 몰수해 귀환할 수 없게 했고, '귀환법'을 만들어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은 모두 이스라엘로 돌아올 권리와 시민권을 받는다고 선포했다.

1956년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2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는데,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에 파병하고 이집트의 숙적이었던 이스라엘도 파병을 한다. 전쟁 결과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점령한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67년 이집트의 주도하에 아랍 국가들이 단결해 이스라엘에 전쟁을 도발, 3차 중동전쟁으로 불리는 '6일 전쟁'이 일어난다. 이스라엘은 이번에도 승리하여 이제는 가자와 서안 모두를 점령하게 된다. 약 43만 명의 아랍인이 추가로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났고 남은 약 100만 명은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 치하에서 생활하게 된다. 1969년 이후 유명한 정치인 야세르 아라파트는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결성해 투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큰 진전이 없자 '팔레스타인 전체에서 이스라엘을 내쫓고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이상은 완전히 포기한다. 대신 '1967년 이전 경계', 즉 가자와 서안에서만이라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수립하게 해 달라고 1976년 유엔 총회에서 요구하지만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마저도 거부한다. 1973년에는 욤 키푸르 전쟁이라 불리는 4차 중동전쟁이 일어난다. 욤 키푸르(속죄날)를 맞아 이스라엘 군이 금식 등으로 병력을 동원하기 어려우리라 예상한 아랍 연합군은 이스라엘을 공격한다. 초반에는 아랍 연합군의 우세한 상황이었으나 미국이 위기에 몰린 이스라엘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겨우 아랍군을 몰아낸다. 이때 이스라엘이 느낀 위기감은 비밀리에 핵 개발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인티파다

이런 중동의 상황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 1978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주도하고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서명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인데, 이 협정은 숙적이었던 이집트와 이스라엘 관계에 화해를 가져온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던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는 대신 가자지구에 대한 개입을 중지하고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을 맺으며,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팔레스타인의 권리와 독립을 인정하고 점령 지역에서 철군하기로 약속했다.  

▲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서 좌로부터 사다트, 지미 카터, 베긴

이후 이집트는 평화협정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매년 20억 달러를 받게 되고, 사다트가 암살된 후 권좌에 오른 무바라크는 미국의 지지를 업고 30년간 독재정치를 펼친다. 이집트는 협상의 약속을 지켰지만 이스라엘은 점령지에서 철수하거나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를 묵인하며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의 통치를 인정한 무바라크는 아랍 국가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아 왔다. 미국이 독재자인 그를 30년간 지지하고 최근 이집트의 민주혁명 초기까지도 쉽게 포기하지 못한 것은 이스라엘을 위해 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캠프 데이비드와 유사하게 1994년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클린턴의 지원하에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조약을 맺는다. 이 결과 요르단은 서안을 사실상 이스라엘의 영토로 승인한다. 대신 미국은 요르단의 부채 탕감과 군사 원조 2억 달러를 포함, 매년 5억 달러의 원조를 약속한다. 결국 미국의 주도하에 맺어진 이 평화조약들로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의 갈등은 방지하게 되었으나, 가자 지구와 서안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은 공고히 했다. 이스라엘은 PLO와 협상을 하는 한편 유대인 정착촌을 확대해 나갔다.

1982년에는 5차 중동전쟁으로 불리는 레바논 전쟁이 일어난다. 이스라엘은 민간인 정착촌을 미사일로 폭격한 레바논 거주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를 추격한다는 명분으로 레바논을 침공한다. 그 결과 한 달 만에 2만 명의 팔레스타인인과 레바논인이 사망한다. 이로 인해 레바논에서 강경 조직 헤즈볼라(Hezbollah)가 결성되었다. 강경 조직의 등장에는 역시 극단적인 폭력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난 2006년 여름에도 헤즈볼라의 로켓 공격으로 3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사망한 데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은 34일 동안 레바논을 공습했고 남부 지역을 침공해 1100여 명을 살해했다. 이스라엘 측에선 160여 명이 사망했다.

1987년 말의 1차 팔레스타인 민중 봉기(인티파다, intifada)는 팔레스타인의 참혹한 현실과 이스라엘의 억압 정책을 폭로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이 높아졌다. 1988년에는 PLO의 부패와 무능에 질린 팔레스타인인들을 중심으로 강경 조직 하마스가 창설되어 PLO와 경쟁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1992년 이후 PLO와 협상을 시작하는데 약 8년 정도의 협상 기간 동안 예루살렘과 서안의 이스라엘 정착민 수는 두 배 이상 증가해서 40만 명이 넘게 된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정착촌 정책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판결되었을 뿐 아니라, 미국의 관료들조차 비판하고 있다.

다음 지도는 짙은 색으로 표시된 팔레스타인 지역이 어떻게 축소되어 왔는가를 잘 보여 준다. 첫 번째 지도는 이스라엘 정착 초기, 두 번째 지도는 유엔의 분할 결정안, 그리고 왼쪽에서 세 번째 지도가 1967년 이전 경계이고, 현재는 서안의 상당 지역을 이스라엘 정착지가 침식해 들어가고 있다. 이미 40~50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서안과 동예루살렘 내에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은 법적으로 무장할 권리와 팔레스타인인에게 신분증을 요구하거나 그들을 영장 없이 체포할 권한까지 지니고 있다. 평범한 민간인이 아니라 준군사조직이라 할 수 있다.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영토 변화 지도. (Jewish voice for peace-chicago 홈페이지 갈무리)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영토 변화 지도. (Jewish voice for peace-chicago 홈페이지 갈무리)

2000년 캠프 데이비드 협상에서 이스라엘은 정착촌 제거, 1967년 경계 회복 등 팔레스타인의 요구를 최종적으로 거부한다.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자살 폭탄 테러를 동반한 팔레스타인의 2차 민중 봉기가 발생한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테러를 막는다는 명분하에 2002년부터 서안 지역에 총 길이 800킬로미터 이상, 높이 8미터의 콘크리트 분리 장벽을 건설한다. 이스라엘 정착지와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리시키고 지역 전체에 검문소를 설치하는 등 팔레스타인 마을들을 고립시킨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출근을 하기 위해 매일 몇 시간을 기다리고 가까운 거리도 분리 장벽 때문에 엄청난 거리를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다. 점령하의 이스라엘 군의 일상화된 폭력과 학대로 팔레스타인인들 상당수는 심각한 고통 속에 살고 있다. 

2004년 7월 국제사법재판소는 19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인 동예루살렘, 서안, 가자 지역은 국제법을 위반한 점령지이며 이스라엘이 이들 지역에 건설한 정착촌과 분리 장벽도 국제법 위반이이라고 판결한 바 있다. 지난 2008년에는 제6차 중동전쟁이라고도 불리는 가자 전쟁(Gaza War)이 발생했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 1380명이 사망했는데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이스라엘 측 사망자 13명). 민간인과 유엔학교, 유엔 구호 트럭, 비무장 국제 구호선까지 무차별 공격한 이스라엘은 국제 여론의 심각한 비난을 받았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 지구 한편에서 문명국가의 군사 공격으로 그렇게 많은 민간인이 살해되었다는 것은 실로 믿기 힘든 현실이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것은, 이런 현실에도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똑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팔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

2000년간 팔레스타인 땅에서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제 22%에 해당하는 서안과 가자로 밀려났다. 그나마 서안은 점령지 상태이고,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가자는 5년 넘게 봉쇄 상태이다. 60여 년 동안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현재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입장은 국제사회의 합의 사안이라 볼 수 있는 '1967년 이전 경계’에 기반한 해법을 받아들일 수 없고, 양측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예루살렘 땅을 조금도 내줄 수 없으며, 가자지구를 대표하는 하마스는 테러 조직이기에 협상할 생각이 없고,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도 허가할 수 없고, 팔레스타인이 완전 비무장하기 전에는 독립은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서안과 동예루살렘에 불법적으로 정착촌을 늘려 영토화하고 있다.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비참한 상황을 생각했을 때 그들의 독립 요구나 하마스와 헤즈볼라와 같은 강경 조직의 등장을 단순히 테러리즘으로 비난할 수 있냐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런 강경 조직이 등장한 데에는 극단적인 학살과 억압의 배경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미국 언론들은 훨씬 강력한 군대를 가진 이스라엘이 자행하는 폭력과 살인에는 '군사 작전'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국가나 군대가 없는 팔레스타인 측의 공격은 '테러리즘'으로 손쉽게 악마화한다. 식민국이 독립을 향한 피식민국의 저항을 '테러리즘'으로 규정하고 진압해 온 것은 역사적으로 흔한 일이다. 일제강점기에 안중근 의사는 자신을 독립군 중장이라고 주장했고, 일제는 그를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와 협상하는 것은 미국에게 알카에다와 타협하라는 것과 같다'며, 평화 협상과 독립 승인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특정 국가와 상관없이 '반미와 이슬람 근본주의'를 목표로 하는 다국적 테러 단체 알카에다와 달리, 하마스는 무장 세력인 동시에 정치 세력이기도 하다. 하마스는 선거에서 주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이스라엘의 점령하에 고통받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교육과 의료 등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해서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강경 조직이라고 하는 하마스조차도 현재 22% 영토 안에서의 독립이라는 현실적인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구체적인 평화 협상 과정이 진행된다면, 하마스도 현실적인 타협에 나설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스라엘 강경파는 팔레스타인의 테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지적도 있다. 노암 촘스키는 자신의 책 <숙명의 트라이앵글>(이후)에서 이스라엘의 강경파는 PLO가 온건화되어 이스라엘이 협상에 나서야 할 상황을 막기 위해 상대를 극렬화하는 정책을 썼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1982년 레바논을 침공하여 팔레스타인인들의 학살을 조장하였고, 심지어 PLO가 온건화되자 팔레스타인 사회의 분열을 위해 1987년 이스라엘 정보부가 종교적 색채가 강한 무슬림 형제단을 이끄는 야신을 지원해 하마스를 창설하도록 도왔다는 주장도 있다.

결국 이제까지 네타냐후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강경파의 정책을 살펴보면, 과연 팔레스타인과 평화 협상을 하거나, 궁극적으로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승인할 생각이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상당수 이스라엘 강경파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 국가는 없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결국 테러를 빌미로 협상을 거부하고 팔레스타인 내부를 분열시키며, 무력 충돌을 지속해서 이스라엘 내 극우파의 정치 기반을 확대하고, 유대인 정착촌을 확대하는 한편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하거나 해외로 쫓아내서 팔레스타인 영토 전체를 이스라엘화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극우파나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땅이므로 협상하거나 땅을 양보해서도 안 된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 이는 결국 준식민지 점령과 학살을 지속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이제 이런 상황이 지속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팔레스타인의 참상이나 이스라엘의 정책으로 자행된 인권유린과 학살이 세계 여론을 통해 폭로되고 있고,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 여론과 팔레스타인 독립에 대한 지지가 확산되고 있다. 과거 미국은 독재 정부를 지원하거나 분열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아랍 국가들을 제어하고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원해 왔다. 그러나 이제 아랍의 봄과 시민혁명의 확대, 한편으로는 근본주의 이슬람의 발흥으로 아랍권에서 반미 감정과 반이스라엘 감정이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굳건한 지지 세력이 되고 있는 이들은 바로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들이 말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주장은 역사적·성경적으로 정당성이 있는지 질문하게 만든다. 특히 이분들이 해석하는 성경의 가르침이 민족을 초월해 전파되어야 할 평화와 화해의 복음인지, 아니면 강자의 편에 선 인종주의와 선민의식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음 글에서는 이스라엘이 왜 현재와 같은 극단적인 인종주의 군사국가가 되었는지, 그리고 미국이 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는지에 대한 정치·신학적 원인을 정리해 보겠다. (계속)

이인엽 / 미국 조지아 주 University of Georgia에서 '미국의 대북 외교 정책'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시절 기독인연합운동(서울대기독인연합)에 참여했고,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며 공부 중이다. godnation@gmail.com, www.facebook.com/inyeop

각주
1) 이 글은 필자가 코스타 블로그(www.ekosta.org)에 올린 글을 수정·보완한 것으로 다음 글을 많이 참고했음을 밝힌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홍미정, 코리아연구원 <현안 진단> 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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