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마당 있는 집과 이웃

예전에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데, 그 마당을 어떻게 활용할까 고심하다가 거기에 고추를 심었습니다. 그렇다고 뭐 전문적인 농사일을 한 것이 아니라, 자세한 일은 기억이 없지만 그래도 하나 기억이 나는 것은 고추 등등 채소들을 내가 먹을 거니까, 조심에 조심을 해서 키웠다는 것, 농약은 안 하고 거름 아주 재래식 거름으로 지력을 보충하는 작업도 하고, 그렇게 거둬들인 것들을 이웃들과 나눠 먹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나누어 주더라도, 조금 더 싱싱한 것을 골라 이웃에게 주고 우리는 조금 덜한 것들로 먹었던 기억도 납니다. 그렇게 이웃과의 교제 나누던 일을 떠올리면서 본문을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본문 36절에 율법사가 등장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본문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강조하신 두 가지 계명을 살펴보면 대상은 다르지만 '사랑'이라는 공통인자(共通因子)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대체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사랑하라,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당연한 일이지요. 이웃을 사랑하되 네 자신같이 하라 하셨으니,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기본이고요. 그런데 예수님은 왜 사랑의 대상을 세 가지 – 하나님, 이웃, 나 - 로 한정해서 말씀하셨을까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라, 그러면 되는데 왜 하나님, 이웃, 나, 이렇게 열거해서 사랑의 대상을 한정하는 것처럼 말씀을 하셨을까요?

II. 하나님, 나, 그리고 이웃 '만' 사랑하라

예수님은 사랑이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이 세상에서 사랑해야 할 대상을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이 밖에도 더 많이 있겠지만, 예수님은 특별히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이웃, 그리고 나.

그런데 아무리 자의적으로 한다고 해도 그렇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을 그렇게 간단하게 나눌 수 있을까요? 아니 나눈다는 말은 어패가 있고, 사랑해야 할 대상을 그렇게 한정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이웃, 그리고 나, 이렇게 세 가지로?

다른 존재는 왜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까요? 사랑해야 할 대상이 모두다 이 셋 속에 포함된다는 것일까요? 사랑해야 할 다른 대상이 분명 더 있을 것인데, 왜 그 정도만 말씀하셨을까요? 혹시, 예수님이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요? 아니 단순한 것이 아니라, 너무 편협한 것이 아닐까요?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을 우리가 다양한 방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고작 나, 이웃, 그리고 하나님으로 구분해 놓고, 그 세 종류만 사랑하라. 그러면 그 나머지는?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요?

믿지 않는 사람들 말처럼,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그래서 편협한 사람들이고, 기독교는 편협한 종교인가요? 아니면 예수님은 우리를 그 정도로밖에 보시지 않는 것일까요? '너희들 뭐 그 정도면 되지 않겠느냐, 더 이상 사랑한다는 것은 너희들에게 무리다' 는 의미일까요?

그렇다면 이웃 말고 저 멀리 있는 타 지역 사람은 이 셋 중 어디에 포함되며, 우리나라 국민은 어디에, 또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디에 집어넣어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인가요?

'이웃'이란 개념은 국어사전적 의미에 의하면 "나란히 또는 가까이 있어서 경계가 서로 붙어 있음"이란 말이니 '우리 집에 이웃하고 있다'는 식으로 쓰이며, '가까이 사는 집. 또는 그런 사람'이란 의미로 쓰입니다. 따라서 사전적 의미에 의하면 국가도, 다른 외국도 일단은 이웃의 개념에서 벗어나기에 그런 사람들은 사랑할 필요가 없는 것들입니다. .

그러나 이런 저의 생각은, 이렇게 해석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뜻과는 무언가 다르지 않습니까? 이웃, 나, 하나님만 사랑의 대상으로 말씀하시고, 나머지는 언급하지 않으시다니, 그렇다고 예수님이 그 셋만 사랑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니 그렇다면 본문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나, 이웃, 하나님만 언급하시고는 나머지는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이 이웃이란 말의 뜻을 다르게 사용하셨거나, 아니면 우리가 예수님의 참뜻을 잘 모르거나, 그러지는 않을까요? 그러니 본문을 다시 살펴봐야만 합니다.

III. 이웃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본문에서 '하나님', 그리고 '나' 라는 말은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 '이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웃이란 말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니, 우리가 생각하는 이웃이란 개념에 뭔가 착오가 있다는 말이지요.

먼저 '이웃'은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사랑의 대상을 세 가지로 한정해서 열거한 것처럼 보이나, 그게 아니라면, 예수님이 이 세 가지 대상 속에 사랑해야 할 대상을 모두 다 집어넣은 것이라면, 본문은 해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아까 살펴본 것 같은 사전적 의미의 이웃과는 달라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가정하고, 이 구절이 우리가 단순하게 몇몇을 사랑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을 모두 다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라면 '나 =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제외한 그 무엇'이고, '이웃 =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이 되어 이웃이란 말의 범위가 무한대로 바뀌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이웃이란 존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려는데, 서두에 고추 농사를 지었다는 말씀드리면서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는 그 이야기, 기억나십니까? 그 정도의 이웃과 지금 말하려는 이웃의 범위가 차이가 나는 것을 느끼셨지요? 서두에 말씀드린 이웃은 좌, 우측으로 서너 집, 그중에서도 조금 친한 집만 말한 것입니다. 다행하게도 집 앞에는 공지였기 때문에 망정이지, 앞에 집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나마 전부 나누어 먹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웃이란 누구를 말합니까? 이 세상에서 나를 뺀 나머지 모두를 이웃이라 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자면, 본문에서 나오는 이웃을 그저 우리가 알고 있는 낱말의 뜻, '가까이 사는 집. 또는 그런 사람'이란 의미로만 생각했기에, 자연히 예수님의 말씀을 편협하게 해석할 수밖에 없던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본문에 의하면, '나'가 있으면 '이웃'은 누구인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이웃이라 정의할 수 있고, 결국은 '이웃'이란 단어의 개념을 확장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이웃'이라는 말을 하신 이유는 우리가, 우리 사람들이 이웃이라는 말을 그저 옆집으로만 생각하고 있기에, 그래서 그 정도만 사랑을 하기에 예수님은 그것을 깨기 위하여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눈에는 나, 그리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모두 다 이웃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이 세상을 좁게 보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웃이란 말에 홀려서 잠시 오해를 한 것입니다. 이웃이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며, 그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IV.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면 과연 그런 저의 해석이 맞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처럼 단순히 거리적으로 이웃하고 있는 사람의 이웃이란 의미가 아니라,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이웃이라 한다는 그 해석이 과연 맞을까요?

본문은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이 말씀을 예수님이 하신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은 다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눅 10:25~28)."

누가복음에서는 "(율법교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기록되어, 그 말을 율법교사가 하였고, 예수님은 그 대답을 들으신 다음에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율법교사가 또 다시 질문을 하는 바람에, 그 내용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눅 10:29)."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굳이 여기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누가 이웃이라는 말인가요? 강도 만난 자, 그래서 여리고 길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누워 있는 사람이 바로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그 이웃, 강도 만난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웃이 될 만한 사람이었던가요? 우리가 생각하는 이웃의 개념에 의하면 당연히 그는 이웃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첫째, 민족이 다르지요. 더군다나 유대 민족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원수처럼 지나는 사이인데 어찌 이웃이란 말로 서로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이일뿐더러 그 사람들은 (거리적으로) 이웃에 가까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이니, 우리가 말하는 이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이 이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비유는 본문이 말하고 있는 '이웃'의 구체적인 예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이웃이란 것이 그저 너의 옆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혀라, 너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내가 말하는 이웃이다'라는 '이웃' 개념의 확장, 그게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누가 살고 있느냐? 내가 살고 또 이웃이 살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데 그 모두를 사랑해야 한다, 이런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 잘 아시니까. 우리가 이 세상사람 모두 다 사랑해야 한다면, 너무 막연해서 우리가 도저히 사랑을 하지 못할 줄 아시니까, 우리더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듯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사랑해야 할 대상을 구체적으로 꼭 집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나의 이웃이 누구일까?'라고 의문을 갖는 사람에게는 바로 그 누구누구가 너의 이웃이다, 라고 구체적으로 꼭 집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무 비현실적인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끼리도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데, 나 아닌 이웃, 게다가 범위를 무지무지하게 확장한 이웃을 사랑하라니, 그게 될 법이나 한 말이냐, 라고 생각하는 것, 우리의 그런 생각을 그것부터 바꿔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난번 묵상에서 이웃을 사랑하자고 했지만 그때는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깊게 생각지 않고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결론은 지난번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 더, 덧붙인다면 지금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 끼리끼리만 좋아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의 생각은 우리가 더 많은 사람을 우리 이웃으로 넓혀 생각하고 사랑하기를 바라시는데 우리는 그 이웃을 좁히고 좁혀서 예수님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방향을 바꿔서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웃의 개념을 넓혀 가는 연습을 해 보도록 하십시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