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동성애’는 없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모든 시대에 '동성애'가 성적 지향성으로서 존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창세기의 저자도, 바울도 이성애와 동등한 선상에 자리하는 동성애의 존재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동성애와 양성애, 이성애에 대한 섹슈얼리티적 연구가 과학적으로 시작된 것이 고작 100여 년 전이다. 동성애가 정신병 목록에서 제외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성서 기록자들은 여성(남성)이 남성(여성)을 사랑하는 것과 동등하게 동성이 동성을 사랑하는 ‘동성애’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그저 ‘남성’이 ‘남성’의 항문에 성기를 삽입하는, ‘동성 간 항문 성교’밖에는 보이지 않았다(성서는 또한 가부장적 고대 사회에 기록된 탓에, 여성 동성애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다). 따라서 성서에서 현대적 ‘동성애’에 대한 반대 근거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매우 비합리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동성애 논의는 대부분 결코 동성애를 수용할 수 없다는 강한 거부감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동성애 반대자들의 성서적 근거는 창세기의 소돔 이야기, 바울의 로마서, 고린도전서, 디모데전서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나 많은 사람들이 소돔 이야기에서 동성애 반대의 근거를 찾기를 즐기는데, 이는 창세기가 소돔의 심판 전후의 이야기를 매우 극적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동성애가 나타난다는 것은 인간 타락의 극치며 이에 곧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은 생생한 드라마틱함이다. 이에 깊게 감화(?)된 한국 교회 신자들은 동성애에 대해 일단은 ‘정죄’를 퍼붓는다. 동성애는 그들에게 있어 당장이라도 심판받을 수 있는 죄악이기 때문이다.

소돔이 멸망한 진짜 이유

소돔의 죄악이 과연 ‘동성애’였는가. 창세기를 한번 살펴보자. 소돔 성으로 찾아온 두 천사를 롯이 영접하자, 타락한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으로 몰려와 그들을 내놓으라며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과 ‘상관’하리라”(창세기 19:5). 롯은 이를 완강히 거절하며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을 내놓으려 하면서까지 천사들을 지키려고 애쓴다. 천사들은 롯에게 하나님이 불과 유황으로 소돔을 멸망하시리라 경고한다. 롯과 그의 가족이 도성을 빠져나가자마자 소돔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불타 없어져 버린다.

김홍도 목사를 비롯한 많은 현장 목회자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다룬 이 창세기를 인용하며 동성애를 가차 없이 정죄한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유가 다름 아닌 ‘성적 타락’ 때문이었으며, 이 ‘성적 타락’의 극단이 바로 동성애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유황불을 내려 멸망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한 이유는 ‘동성애’가 아니다.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에서 우리는 현대적인 의미의 ‘동성애자’를 단 한 명도 발견할 수 없다. 다만, 소돔 사람들은 그들의 도시를 처음 방문한 손님들을 환대하지 않고 끌어내 ‘학대’하려 했으며 그 ‘학대’의 수단이 ‘동성 간 항문 성교’였을 뿐이다.

당시 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을 처음 방문하는 ‘손님’을 융숭하게 대접할 신성한 ‘환대의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손님을 환대하기는커녕 그들을 끌어내 ‘항문 성교’의 수치심을 주려 했던 것이다. ‘동성 간 항문 성교’, 즉 ‘비역질(sodomize)’은 당시 고대 사회에서 전쟁 포로에게 행하는 모욕적인 처벌이었다. 남성이 남성의 항문에 성기를 삽입한다는 것은, 삽입을 당하는 남성의 ‘남성성’을 소멸시켜 버리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당시 고대 사회에서 엄청난 모욕이었다. 소돔 사람들은 환대의 의무를 행해야 할 손님들에게 다짜고짜 이러한 치욕을 주려 했던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패역적인 죄악이었다.

이러한 소돔의 죄악은 성서의 다른 문서에서도 반복되어 서술되나, ‘동성애’에 대한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을 책망하며 그와 비견될 소돔의 죄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네 아우 소돔의 죄가 무엇인지 아느냐? 거만을 떨고 실컷 먹고 마시며 태평 세월을 즐기면서 천하고 가난한 자들의 손을 붙잡아주지 않은 것이 바로 소돔과 그 딸들의 죄였다. 거만을 떨며 내 눈에 역겨운 짓들을 하기에 내가 물리쳐 지금 네가 보는 대로 없애버린 것이다”(공동번역, 에스겔 16:49~50). 혹자는 ‘역겨운 짓’에서 ‘동성애’의 흔적을 찾고 싶어 하나 이는 당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하며 하나님을 배신하고, 아이를 제물로 잡아 바치며 살인을 일삼았던 것을 가리킬 뿐이다. 설사 그 ‘역겨운 짓’이 소돔의 죄악을 가리킬지라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49절에 정확히 나온다. 바로 이웃을 따뜻하게 품어주지 못한 ‘냉대’와 ‘학대’의 죄였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 가장 유명한 언급은 또한 예수님의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태복음 10:14~15). 예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계셨으며, 또한 그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간명하게 상기시키셨다. 바로 하나님이 본체이신 그분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내려와 직접 그 몸을 찢으면서 흘린 보혈로 세운 법, ‘이웃 사랑’(마태복음 19:19)의 법을 내팽개쳐 버리는 죄악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의 죄였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 그토록 맹렬하게 진노하셨던 이유는 바로 그분의 본체 예수님의 입에서 명료하게 선언되는 것이다.

‘냉대’를 일삼는 한국 유대교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문제의 본질은 외면한 채, 여전히 성서에 대한 근본주의적이고도 문자주의적인 이해에 사로잡혀 동성애 정죄에 혈안이 되어 있다. 문자주의에 대한 그들의 집착은 마침내 율법주의로 귀결한다. 성서에 이러이러한 구절에 따르면 동성애는 명백한 죄악이며, ‘거룩’과 ‘성결’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닌, 유대교다. 그들은 마치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처럼 근엄한 태도로 동성애를 완벽하게 정죄할뿐더러, 동성애의 원인을 그 어느 학자보다 명쾌하게 제시하며 심지어는 그 해결책(이성애로의 전환!)까지 친절하게 내놓는다. 그러나 그러한 추상적인 논의가 동성애와 구체적으로 관련돼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인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현재 한국 교회에는 많은 동성애자들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동성에 대해서 성적 끌림을 느낄 뿐이다. 동성애에 대한 정죄와 해결책 제시까지 손쉽게 끝난 한국 교회에서,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들이 연애를 하듯, 동성 애인을 만날 생각은 꿈에서조차 하지 못한다. 그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정죄하며 괴로운 시간을 보낼 수밖에는 없다. 숨을 죽이고 살아갈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동성애자들에 대한 정죄는 ‘소돔과 고모라’를 운운하며 수시로 이뤄진다. 율법주의적 문자주의에 얽매인 한국 유대교인들은 자신들의 일이 아니라고 너무나도 ‘쉽게’ 말하고 너무나도 ‘간단히’ 말한다. 동성애는 죄라고. 성서에 나와 있다고. 말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그들의 가슴에 비수를 박고 또 후비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소돔과 고모라가 저지른 냉대의 죄가 아닌가. 율법을 어긴 이들에게 돌을 던졌던 유대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말한다. ‘동성애’는 정죄하지만, ‘동성애자’는 정죄하지 않는다고. ‘틀린 것은 틀렸다고 해야 한다고.’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러나 ‘동성애’는 그렇게 쉽게 재단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도둑질'과 같은, 죄라는 많은 것들이 일시적인 ‘행위’로서 규정될 수 있다면, 동성애는 일시적인 ‘행위’로 결코 파악될 수 없다. '동성애'는 도둑질과는 완전히 다르다. 동성에 대한 성적 끌림은 양심의 괴로운 투쟁 끝에 ‘선택’하는 일시적 행위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주어진 ‘지향’이기 때문이다.

이성애자에게 이성을 보고 성적 호감을 느끼고 동성에 대해서는 전혀 그럴 수 없는 것이 자연스럽듯, 동성애자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한 사람의 성적 정체성은 그 사람의 존재를 지탱하는 기둥과도 같다. 따라서 ‘동성애’를 정죄하는 것은 곧 ‘동성애자’를 정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동성애’와 ‘동성애자’를 구분하는 것은 구체적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추상적 구분이요, 또한 기만적인 짓이다. 동성애에 대해 논의하려면 이러한 복잡한 상황을 모두 인지하고 신중하게 나서야 한다. 말 못하는 이웃에 대해 모두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손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돌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이웃을 정죄할 수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결코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으며, 그분 앞에서 의롭지 못한 모든 행위가 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죄인의 자리에 있지만, 오로지 예수님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그분 앞에 나아갈 뿐이다. 죄인인 우리가 모두 저주스런 율법과 정죄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사함의 은혜를 받는다. 따라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늘 이뤄지는 순간순간의 죄 사함에 감사하며 그 은혜로 살아가야 한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판단하거나 정죄할 ‘지식’이나 ‘율법’을 주신 바가 없다. 그리고 동성애자들의 구체적인 상황을 뼛속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돌을 던져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결코 예수님의 사랑에 부합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유대교의 율법주의적 정죄와 같다.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자들에 대해 ‘사랑해야 하는 것은 맞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결과는 정죄요, 돌을 던짐이다. 기만적이며, 위선적이다. 근엄하게 차려입고 짐짓 거룩한 체했던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 모두가 본래 죄인인데 도대체 누가 누구를 정죄한단 말인가. 스스로의 눈 안에 있는 들보를 볼 일이다.

나는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고 단정짓는 것은 아니다. 동성애는 죄일 수도 있고 죄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살펴보듯, 동성애는 매우 복잡한 맥락으로 얽혀 있으므로 손쉽게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즉, 우리의 판단 범위를 넘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성서조차 그 역사-문화적 한계를 걷어내보면 동성애에 대해서 중립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성애가 죄인지 아닌지 명확히 아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성애에 대해서 언급할 때 성급히 그것을 정죄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진정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동성애를 정죄하는 것이 혹여나 '냉대'의 죄를 저질렀던 소돔 사람들을 닮아가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

곧 성탄절이다. 거리마다 성탄을 축하하는 노래가 메아리칠 것이며, 온 세상이 아기 예수의 오심을 축복할 것이다. 행복에 겨운 이성애자 연인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교회에 가기도 할 것이요, 성탄을 축하하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랑을 속삭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단지 ‘동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정죄 받아야 하는 우리의 이웃들은 이 추운 겨울에도 자기 자신을 꼭꼭 숨겨둔 채, 어딘가에서 그 추위를 견디고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뉴스앤조이>에서의 동성애 논의를 보니, 냉대 받고 멸시 받는 동성애자들의 이 겨울은 유난히 추울 것 같다. 한국 유대교인들에게는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랑하라 명령하셨던 구체적인 ‘이웃’이 아닌, 그저 율법으로 정죄해 버려야 할 ‘추상적 타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 그대 한국 유대교인들이여, 열심히 ‘동성애’를 거부하라. ‘이웃 사랑’하기를 거부하고 그들을 냉대하라. 아기 예수께서도 유대인들의 ‘냉대’ 속에 외롭게 이 땅에 오셨다.

참고) 이 글에서 동성애에 대한 성서적 이해의 틀은 다니엘 헬미니악의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기독교 내의 동성애 논의에 관심이 있으신 분에게 이 책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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