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창 17:1-2)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엷

이스마엘을 낳은 후 13년의 침묵을 깨고 99세의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전능하신 분’으로 소개하시면서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요구하십니다. 13년의 공백과 ‘완전하라’는 말씀이 책망으로 보이고 저도 그렇게 보아왔습니다만, 아삽이 깨달았던 것처럼 자신의 우매무지하기가 짐승 같음을 깨닫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시 73:22).

말씀에 대한 그릇된 이해는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더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참된 뜻을 놓치고 곡해하는 것이기에 성경의 신중하고 정확한 해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책망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를 위대한 믿음의 조상으로 길러내셨기에 참으로 위대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전능한 분으로 소개하시기는 여기가 처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전능하심을 들고 나오시는 이유는, 이 전능하심이 전제(前提)되지 않고는 지금부터 하는 말씀이 성립되지 않을 뿐더러 아브람이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기 때문이며, 아브람에게 완전하라고 요구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아브람에게 무엇을 요구하신 것도 여기가 처음입니다. 물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지만 이는 관계를 맺기 위함이고,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로는 땅과 후손을 주시겠다는 일방적인 약속만 해오셨지 아무것도 요구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또 15장에서 ‘두려워 말라’(1절)고 말씀하신 이유는 인격적 교제의 필요성 때문이었고, ‘너는 정녕히 알라’(13절)는 말씀도 ‘무엇으로 알겠습니까?’(8절)라는 아브람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아브람에게 일방적으로 약속도 하시고 보살피시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방패시며 상급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고, 아브람은 여호와를 믿었고 여호와께서는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15:6). ‘의(義)로 여기셨다’는 말씀은 부족하지만 의롭다고 인정해주셨다는 뜻으로, 언젠가는 완전할 것을 기대하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완전하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는 여겨주시는 수준을 넘어서 완전한 자로 서기를 기대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전능하심을 내세우면서 아브람에게 완전하라고 요구하시는 이유는 바로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엷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이제까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편무계약)이셨지만, 지금부터는 아브람이 언약 당사자가 되어 하나님의 맞은편에 서야 한다(쌍무계약)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 앞에 완전히 행하는 자리에 서야 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신 것이며, 이어서 나오는 할례가 바로 아브라함이 언약 당사자로 하나님 앞에 서는 의식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 하라’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3~8)

하나님께서는 ‘큰 아버지’란 뜻의 아브람이란 이름을 ‘많은 무리의 아버지’란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시면서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그의 생애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75세의 아브람을 가나안으로 부르신 후에 24년을 나그네로 살면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신 지금 그 이름을 바꾸시면서 언약의 당사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름을 바꾸시면서 하신 말씀은 이제까지의 ‘땅과 후손’에 대한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땅의 티끌 같고 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이 번성하리라는 추상적인 그림 언어로 보여주셨던 것을 지금은 나라와 왕들이 너로 인하여 일어서리라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말씀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새롭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구체화하여 마침내는 눈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으로 아브람을 부르셨고, 아브람은 말씀을 좇아 가나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애굽의 곤경에서 구해주셨고, 때때로 나타나 격려해주셨고, 연합군을 물리치고 롯을 구해내도록 도우셨으며, 아브람은 그때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단을 쌓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심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15장에서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 하시면서 ‘네 후손이 하늘의 별 같으리라’는 말씀을 아브람이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전에는 일방적인 관계였기에 문제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여호와를 믿은 아브람을 의롭다 하셨으니 여호와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분명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부인할 수 없는데도 왜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말씀을 하실까요?

하나님은 아브람의 하나님이요, 아브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아브람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지 그렇게 끝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단을 쌓지만 그러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던 아브람이 하나님과 대화하고 믿고 칭의 단계까지 왔지만, 아직도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심을 알아야 하고 그의 믿어지지 않는 약속을 믿어야 하기 때문에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을 알고 그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 자리에 서는 날, 비로소 여호와는 그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영원한 이름이요 표호’(출 3:15)라고 하시지만, 이들이 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을 온전히 믿은 이후부터 이 호칭을 쓰시지 그 이전에는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고 있음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 이후에 함축적으로(창 22:12~18), 이삭은 정식으로 야곱을 축복한 이후(창 28:13)에, 그리고 야곱은 베냐민을 내려놓은 이후(창 43:13~14)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심을 보신다면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 자식의 관계가 성립되고, 부모는 그 자식으로 인한 기쁨과 만족을 누립니다. 그렇지만 그 기쁨과 만족은 자녀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 미래를 배제한 지금의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만일 아이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포기해야 한다면 큰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같은 심정인 것입니다. 아브람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지만, 그 모습으로 멈춘 아브람이 아니라, 성장하여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믿음의 조상의 자리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하시는 것이고, 이삭을 향하여 칼을 빼든 아브라함에게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시면서 만족해하신 것이며, 이제까지 반복하셨던 약속을 맹세로 굳게 하시며 반드시 이루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창 22:9~18). 즉 아브라함이 여호와와 그 약속을 완전히 믿고 이삭을 바치려고 했기 때문에, 나도 너의 하나님이 되어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동안 반복된 모든 약속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자리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모두 유효한 것입니다.

‘할례를 받으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9~14)

할례는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언약 의식입니다. 집에서 낳은 자는 8일 만에 할례를 하고, 사온 사람도 할례를 하라고 하십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언약을 배반한 것으로 간주해 죽인다고 하십니다. 참 무서운 언약 의식입니다. 짐승을 쪼개고 그 사이로 지나면서 맺는 언약 의식과 다를 것이 없으며(창 15장, 렘 34장) 일방적인 편무계약인 것까지도 같습니다. 할례를 받는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언약의 내용을 이행하여야 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놓쳐선 안 될 것입니다.

남자의 은밀한 곳에 할례를 하게 하신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에 하는 언약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살에 생긴 흔적은 지울 수도 없고 지워지지도 않기 때문에 영원한 언약이라는 의미를 충분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둘째는 믿음은 본인과 하나님만이 아는 은밀한 내면의 세계이기에 ‘보이지 않는 곳에 표’를 하며, 이 언약이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에 ‘생식기에 표’를, 그리고 믿음은 수시로 확증할 필요가 있고 스스로 확인할 수 있기에 ‘자주 보는 곳에 표’를 하라고 하시지 않았나 싶습니다(고후 13:5).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런데 할례를 왜 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라고 하시지만 아브라함이 지켜야 할 일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혼자 행하실 일들이지 아브람이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번제를 드리라든가 십일조를 바치라든가 또는 안식일을 지키라든가 하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왜 할례를 하라고 하셨는지가 불분명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찬찬히 되짚어보면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 외에는 달리 요구하신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완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전제로 요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할례를 하면서 지켜야 하는 언약이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그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정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시면서 이제까지와 달리 계약 당사자로 설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이제까지는 아브람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일방적으로 약속하시고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셨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근거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완전하라고 하셨고 할례를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크게 네 단계로 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온 것(12장)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 여호와를 믿고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것(15장)이고, 세 번째가 이름을 바꾸고 언약의 당사자가 되어 할례를 받는 것(17장)이고, 네 번째는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향해 칼을 빼드는 것(22장)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향하여 칼을 빼든 것은 바로 할례를 행한 언약의 당사자로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그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은 ‘여호와 앞에 완전하게 행한’ 믿음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