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1~6)

이 후에

15장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장입니다. 그런데 '믿음과 칭의'를 논하는 15장을 '이 후에'로 시작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나안에 도착한 아브람이 이제까지의 여러 사건들을 겪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알아왔기 때문에, 지금부터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알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12장 1~3절에서 아브람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시면서 복을 주시겠다는 언약을 일방적으로 선언하십니다. 그렇지만 아브람이 12장 후반의 애굽에서의 수모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고, 13장에서의 롯과의 헤어짐, 14장의 롯을 구출하는 전쟁과 살렘 왕 멜기세덱과의 만남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여기 15장에서 하나님과 아브람의 대화가 가능해졌으며 아브람의 믿음을 이끌어내게 하였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고 말문을 여시는 것은 이제까지 아브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절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님을 일깨워 주십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면 단을 쌓고 그 이름을 불렀지만 그 배경이 두려움 때문이었다면 우리가 본받을 만한 믿음의 행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우상을 섬기던 이전 습관대로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타나시기만 하면 열심히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부르면서도 한번도 하나님께 질문을 하거나 말씀을 드린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브람에게 자신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기쁨과 감사의 대상이요, 믿음과 교제의 대상임을 알라고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주시렵니까

그러면서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아브람은 마음으로 머리를 끄덕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바로를 혼내시면서 빼앗긴 아내를 되찾아주신 하나님이 바로 자신의 방패이셨음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고, 감히 싸울 엄두도 내지 못했던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쳐서 이기고 조카 롯을 구하도록 감동하시고 도와주신 하나님 또한 자신의 방패 되심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말씀도 수긍이 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 외에 자신을 위해 무엇을 요구하신 적이 없으셨고 오히려 일방적으로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만을 거듭하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애굽에서와 이번 롯을 구하는 전쟁에서 많은 재물을 얻도록 도와주셨을 뿐만 아니라 아브람의 위상을 왕들의 영접을 받을 정도로 높여주셨으며,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을 때와 조카 롯과 헤어졌을 때에 즉시 나타나셔서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시는 '큰 상급'이심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드디어 하나님께 그 입술을 열어 말하기를 시작합니다. 이제까지의 아브람은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단을 쌓았고 그 이름을 부르며 섬겼을 뿐, 하나님과의 대화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방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런 아브람이 드디어 인격적인 교제의 관계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은 그동안 궁금하고 답답했던 이야기를 봇물 터뜨리듯 쏟아 놓습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은 '두려워 말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었고, 하나님이 자신의 방패와 상급이라는 말씀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후손과 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반복하시면서도 자식도 땅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땅이야 어느 날 주시면 그날로 자신의 소유가 되겠지만, 이제 노인인 아브람에게 자식은 마냥 기다릴 수 있는 것이 못됩니다. 언제 생식 능력이 끊어질지 모르고, 자식을 낳는다고 해도 사람 노릇을 하려면 20년 이상을 키워야 하는 것인데 왜 초조하지 않겠습니까? 또 땅을 주신들 자식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브람은 가장 궁금했던 이야기를 꺼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자식이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들였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씨를 주시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낳은 자가 아닌 길리운 자로 제 상속자를 삼았습니다."

아브람의 믿음을 언급하는 여기 15장에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아브람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기만 하면 부지런히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던 일방적 관계에서, 궁금하고 답답했던 마음을 봇물처럼 쏟아내는 모습 말입니다. 우리는 믿어지지 않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아멘" 하는 것을 믿음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장성한 믿음의 경우이고 이제 믿음을 갖기 시작하는 아브람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것을 눈 딱 감고 "믿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궁금하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는 인격적 신뢰의 관계를 믿음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겐 자식이 셋 있습니다. 나중에 후처에게서 난 아들들 외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의미 있는 아들은 이스마엘과 이삭 외에 이 엘리에셀이 있습니다. 이삭은 '약속의 자식'이며 '주인의 자식'이고, 이스마엘은 '육체의 자식'이며 '종의 자식'입니다. 그리고 여기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은 ‘사람의 뜻으로 난 자식’입니다. 물론 이후에 엘리에셀을 자식으로 언급한 일은 없지만, 묵상할만한 의미가 있기에 지적하고 넘어갑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

믿음과 칭의
(1) 여호와를 믿으니

아브람의 답답해하는 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뜻으로 난' 양자가 아닌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람을 밖으로 불러내십니다. 이미 어두워진 밤하늘은 온통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별들을 보라고 하시면서 수없이 많은 별들처럼 아브람의 자손이 번성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늘의 별들을 쳐다본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집니다. 말씀을 좇아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나타나셔서 격려해주시던 하나님, 애굽에서 바로를 혼내시면서 빼앗긴 아내를 되찾아 주신 하나님, 조카 롯과 헤어지자 즉시 나타나 격려하시면서 이 땅을 주시고 후손을 땅의 티끌 같이 많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던 하나님, 조카 롯을 구하도록 도우시고, 왕들 앞에 높임을 받게 해주신 하나님….

아브람은 그 일들을 떠올리면서 지금 하나님이 하신 말씀처럼, 두려운 분이 아닌 아브람의 방패가 되시며, 아브람에게 큰 상급이 되시는 분이심이 믿어졌고, 지금 "네 후손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해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졌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은 것이 그의 위대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리와 성정이 같은 아브람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라도 아브람의 자리에 있었다면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아브람의 믿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믿음의 시작이 우리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말씀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수고와 섬세한 보살피심이 우리 마음에 믿음의 씨앗을 심으시고 싹이 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실 때가 있는데, 그때에 우리의 믿음을 화합하여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몫이고, 아브라함은 여기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믿음의 생성 및 성장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우물에서 숭늉 찾듯 결론을 가지고 비난하거나 반박하지는 마시기를 부탁합니다.

(2)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는 이 아브람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은 칭의(稱義) 또는 의인(義認) 즉 아브람의 믿음을 여호와께서 '의롭다고 불러주셨다', '의롭다고 인정해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죄인은 뵐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브람이 갑자기 의로워졌다고 보기엔 좀 그렇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쌓고 엎드리는 행위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나아갈 수 없었지만, 이제 하나님께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인격적 신뢰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아브람과는 바른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람의 믿음이 온전한 것이 아니라 아직 부족하고 미숙하지만 하나님께서 온전한 것으로 여기고 인정해주시고 그렇게 불러주신다는 은혜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믿었으니 얼마나 확신에 찬 믿음이겠는가'라고 생각하지만 아브람의 믿음은 그렇게 탄탄한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보다는 아브람이 12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 말씀을 좇아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온 이후에 여러 가지로 하나님을 경험한 지금에야 믿음이란 단어가 처음 나오고 있음을 주목하여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많은 분들이 믿음이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신념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세상은 신념이 강한 사람이 성공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히려 매우 위험한 인물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12~13)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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