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한번쯤 사진기나 녹음기, 혹은 비디오 카메라 같은 것이 2천여 년 전에 발명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질 것이다. 예수의 말씀을 녹음해 둔 테이프가 있다면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록된 말씀 가운데 어느 것이 진정한 말씀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예수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 목소리에서 느끼는 것도 있을 테니까. 그 말씀의 억양을 들으면서, 그 말씀을 하던 당시의 예수의 마음이나 느낌까지도 놓치지 않고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예수의 사진이 한 장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분의 외모에 대한 논란도 사라질 것이고, 그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보았으면 하는 사람들의 아쉬움을 달래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나아가, 2천여 년 전에 갈릴리 나사렛에서 태어나 예수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함께 이웃으로 산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직접 보고, 그 인품을 느끼고, 직접 가르침을 받으면서 예수를 무척 따랐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그때 그곳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점을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복음서를 보면 사실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고향을 찾은 이야기에서, 그 어디에서도 예수를 직접 본 사람들의 감격이나 기쁨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정반대로 예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한 이야기만 나온다.

그 당시에 예수는 이스라엘을 두루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어서 사람들에게 상당히 잘 알려진 때이다. 혼자 온 것도 아니고 제자들과 함께 왔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금의환향을 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어찌하여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보고 그렇게 달갑지 않게 여겼을까?

예수가 고향의 회당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에, 그 말을 들은 고향 사람들이 놀라면서 한 첫 마디는 이렇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막 6:2) 다시 말해서,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는 전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은 예수를 직접 보고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낸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은, 예수의 어린 시절 모습과 성장 과정까지도 다 알고 있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를 더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그들이 어찌하여 이런 반응을 보이는가? 그들의 그 다음 말에서 그 이유가 잘 나타난다.

“이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는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3절)

이 구절에서 핵심은 “이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하는 물음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그가 마리아의 아들이니, 누구 누구의 형이니 하는 말들은 ‘그 목수’라는 단어를 설명하는 것들일 뿐이다. 예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를 대했을 때, 맨 먼저 떠올린 것은 목수라는 그의 직업이다. 목수라는 직업은,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 사회에서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직업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수 출신 예수가 사람들을 가르치고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을 믿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예수의 고향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에서, 예수는 그의 고향에서 실제로 목수로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의 직업이 목수라는 것을 알고는 있으면서도, 그저 그것은 명목상의 직업일 거라고 생각하지, 실제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 번역상의 문제이다. 본래 이 구절은, 헬라어 성경에서는, ‘이 사람은 목수요, 마리아의 아들이요’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말로 옮기면, 우리말은 헬라어와 어순이 다르므로,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요’ 이런 식으로 될 수 있다. 실제로 주요한 우리말 성경들에서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이렇게 번역할 때 문제는, 이 구절의 핵심이 예수가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것이 되고, 그가 목수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된다는 점이다.

두 번째 이유는, 예수의 직업을 목수라고 분명히 밝히기를 꺼린 초대교회의 영향이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목수’라는 말을, 마태복음에서는 ‘목수의 아들’(13:55)로, 누가복음에서는 ‘요셉의 아들’(눅 4:22)로 바꾸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두 복음서 모두 예수의 직업에 대해 분명히 말하는 것을 피하고 있다. 이는, 예수의 직업을 목수라고 분명하게 말하기를 꺼린 그 당시 교회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쓰여졌을 뿐 아니라, 평범한 예수의 직업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 마가복음의 기록이 다른 복음서의 기록보다 믿을 수 있는 것임은 물론이다. 또 마태복음의 기록을 따른다 할지라도, 당시에 부모의 직업은 자식에게 대물림을 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여전히 예수의 직업이 목수라는 사실은 부정되지 않는다.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를 ‘그 목수(ho tekton)’라고 부른 것은, 예수가 목수라는 직업을 그저 형식적으로 갖고 있기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확실하게 자기 몫을 하는, 잘 알려진 목수였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예수가 사람들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주는 것을 보고, 어떻게 그가 ‘그 손으로’ 그런 기적들을 일으킬 수 있느냐고 묻는다(2b절). 굳이 그의 손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 것이 특이한데, 이는 그들이 기억하는 예수의 손은, 성직자의 부드러운 손이 아니라, 목수의 투박한 손이기 때문이다. 망치질이나 능숙하게 할 굳은살 박인 그 손으로 사람들을 어루만져 병을 고치고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그들은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가 진짜 목수였다는 사실에서, 부드럽고 가늘고 긴 손을 가진, 평생 노동은 해 본 적도 없는 것 같은, 근육 없는 어깨와 팔뚝을 가진, 기이한 그리스도 상은 사람들의 상상의 산물임이 드러난다. 예수는 건강한 노동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십자가의 못 자국이 나기 전에 이미, 험한 목수 일로 생긴 투박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영광의 그리스도는 알면서도, ‘그 목수’ 예수는 낯설어 한다. 예수의 손에 난 못 자국을 생각하면서 그 십자가 사랑으로 자기의 죄를 씻기는 원하면서도, ‘그 목수’ 예수의 투박한 손에 박인 그 굳은살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은 척척 들어주는 어떤 존재로 상상하기 때문에, 그런 그가, 가족을 위해서, 또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서, 손으로 직접 노동을 한 진짜 목수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러는 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며, 자신들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어떤 상을 그리스도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얄궂게도,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이와는 정반대 되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그 목수’ 예수를 모르는 것이 문제이지만, 그들은 오히려 ‘그 목수’ 예수를 아는 게 문제였다. 그들은, 예수가 사람들을 가르치고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으면서도, 그들이 알고 있는 과거의 예수, ‘그 목수’ 예수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눈이 가려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그 목수를 아는데, 그는 우리 동네 누구의 아들이고, 그 사람 동생들도 다 아는데, 그의 집안도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데, 그런 데서 어떻게 인물이 나와?’ 하는 고정관념이다. 그들은 예수를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로 보지 못하고 ‘그 목수’로만 보았다. 그들은 예수를, 그 자신만으로 보지 못하고, 항상 누구의 아들, 누구의 형제, 어느 집안의 자손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을 예수와 함께 지냈으면서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그들에게 예수는,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고, 뼈 있는 한 마디를 한다(막 6:4). 이 말에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답답함 뿐만 아니라, 고향이니 친척이니 집안이니 하는 것들이 사람을 규정하고 구속하는 것에 대한 한탄도 들어 있다 하겠다.

여기서 사용된 고향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fatris’이다. 이것은 ‘아버지(fater)’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인데, ‘아버지의 땅’이라는 뜻이다. 이 점은 우리의 경우와도 같다 하겠다. 고향이라는 말은 현대인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예수가 볼 때, 그것은 자기에게서 난 예언자를 배척하는 곳이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고향에서는 그 사람 자신으로 평가되지 않고, 누구의 아들, 어느 집안의 자손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특히 어느 집안이 천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기라도 한다면, 그 집안의 후손은 아무리 잘나도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우리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우리 나라 인구의 7할 가까이가 농사를 지으며 시골에서 살았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이 대대로 살아 온 고향 땅에서 살았다. 오늘날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 그 시절을 살던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행복했던가? 진정 자기를 실현할 수 있었던가? 누구도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힘들 것이다. 고향에서는, 어떤 사람의 이름보다는 그의 성씨가, 그의 됨됨이보다는 그의 집안이, 그를 더 규정하고 제한하기 마련이다. 그런 곳에서 사람들은, 공동체 의식을 길렀을지는 몰라도, 개개인의 능력과 가능성을 마음껏 꽃피우는 데는 부족함을 느꼈을 것이다.

산업화의 물결과 함께 농촌 사람들이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었는데, 그들은 꼭 돈을 벌겠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몰려든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고향이 개인에게 주는 그 속박과 굴레로부터 벗어나서, 도시의 익명성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자신의 가능성을 한껏 펼치고 싶은 갈망도, 그것 못지 않게 큰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서구문화를 비판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개개인으로 하여금 그런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능성을 마음껏 실현할 수 있는 장들을 만들어 주는 데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도시 문명을 비판하지만, 그래도 이 도시가 개개인에게 주는 자유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은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도시는 사람을 그 능력에 따라서 평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넓혀 준다.

오늘날도 예언자가 나타난다면, 그가 살 수 있는 곳은, 그의 고향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일 것이다. 환경을 파괴하고 죽임의 문화를 방치하는 도시를 그대로 두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부작용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을, 그 사람 자신만으로 보고, 가능성 속에서 볼 수 있게 해주는 환경은, 고향보다는 타향이고, 시골보다는 도시라는 말이다.

예수는 2천여 년 전에 그의 고향에서 목수로 살면서 이미 고향이 주는 속박이 어떠한 것인지 충분히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고향에서 별로 일을 하지 못하고, 고향을 떠난 다음에 그렇게 많은 활동을 한 것이다. 그렇게 많은 기적을 일으킨 그였지만, 그의 고향에서는 몇몇 병자를 고쳐준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킬 수 없었다(6절). 여기에서 ‘일으키지 않았다’고 하지 않고 ‘일으킬 수 없었다’고 한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사람을 새로운 가능성에서 보지 못하는 곳에서는, 예수도 아무런 기적을 일으킬 수 없었다는 말이다. 하물며 우리들이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예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를 대한 것과 같은 이런 방식을 두고, 바울은 ‘육신을 따라서(kata sarka)’ 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부르심 받았을 때에, ‘육신을 따라서는’ 그들 가운데 지혜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고전 1:26). 여기에서 ‘육신을 따라서’는 ‘육신의 기준으로 볼 때’ 또는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라는 의미이다. 그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기준은 그런 세상적 기준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한다.

‘이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에는, 그들은 어리석고, 약하고, 비천하고, 멸시받는 것들, 곧 아무 것도 아닌 것들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새로운 가능성 속에서 보고 택하셨다는 것이다(1:27-29).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육신의 기준을 따라서’ 본다면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다른 사람보다 조금도 못할 게 없지만,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는 그 모든 것들을 오물로 여긴다고 한다(빌 3:4-8). 바울은 이와 같이 ‘육신의 기준을 따라서’ 사람을 평가하는 것과 정반대 되는 것을 두고, ‘그리스도 안(en Christo)’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새로운 가능성 속에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선언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늘 어제 본 그 사람, 과거에 알고 있는 그 사람과 똑 같은 사람으로만 보고, 새로운 가능성에서 보지 못한다면, 우리가 대하는 사람은 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될 뿐이다. 누구를 만나도 그저 헐뜯거나 경쟁할 대상이고, 만나고 나면 피곤할 뿐이다. 먼저 내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나의 고정관념이 되고 있는 ‘육신의 기준들’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 삶에서 별다른 만남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새롭게 보는 사람이다.

나의 가족, 가장 친한 친구들, 매일 만나는 직장 동료들, 속을 훤히 들여다 볼 것 같은 교우들에 대해서, 이전에 갖고 있던 모든 부정적 이미지와, 그들을 둘러싼 조건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 속에서 보고, 그들에게 새로운 기대를 거는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외치는 사람이다(빌 4:13). 그가 바로, ‘그 목수’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이다.

※이 글은 『그 목수』(한국신학연구소, 1999)에 실린 것을 조금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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