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석 목사(비인중앙교회)가 이곳에 들어 온 지도 4년 반 세월이 흘렀다. 뭘 준비해서 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가라"는 명령에 순종해 지금의 서천군 비인면으로 들어왔다. 농촌목회에 대한 특별한 두려움도 없었다. 그만큼 아무 것도 몰랐다. 누군가 농촌목회는 3년만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잽싸게 나오는 게 최선이라고 했는데, 하필 지금 "혹시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생긴다.  

그래도 이곳에 와서 보낸 시간이 외롭거나 고통스런 시간만도 아니었다. 차라리 주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이 오히려 즐거움이었고 보람이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마을 사람들에게 교회는 그야말로 별 볼 일 없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뭐 그쯤이었다. 그게 싫었다. 똑같은 이웃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떳떳하게 환영받고 싶었다. 류 목사가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한 동기는 어쩌면 이 뿐이었다.

마을을 다니며 집집마다 인사를 올렸다. 새로 온 목사라며 잘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교회 윗쪽의 절에도 찾아가서 손을 내밀고, 무당 할머니에게도 큰절을 올리며 이웃 할머니 대하듯 했다. 그들 역시 복음을 들어야 할 이웃이라는데 예외가 아니었다.

뭣보다 마을 사람들의 애경사엔 빠짐 없이 찾아갔다. 연락을 받자마자 얼굴을 내밀어 위로의 말을 건넸고, 발인하는 날 아침에도 꼭 찾아가서 끝까지 지켜봤다. 때론 상여 맬 일꾼이 없을 땐 류 목사가 그 자리에 슬쩍 들어갔다. 만장을 들고 앞장서기도 했다. 처음엔 "목사님이 이런 걸 하시면 안됩니다"며 말리던 사람들이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그의 바람대로 어느새 마을 사람들의 '이웃'이 된 것이다.

심지어 2년 전에 건설한 교회 식당을 무허가 건물이란 이유로 깨끗이 허물었다. 교회가 부끄러움이 있으면 권위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도 교회 마당엔 농구장을 만들어 지역 청소년들이 모이는 길거리 농구대회를 열었다. 100만원 넘는 돈을 들여서 매년 5월에 개최하는 이 농구대회엔 이제 멀리 군산이나 서천에서도 청소년들이 참여한다. 교인들이 하루 종일 국수를 끓이고 간식을 대준다. 몇 해 지나고 나서부터는 교회에 나오지 않는 마을 사람들과 유지들까지 수박을 사오고 음료수를 대는 큰 행사가 됐다.

학교에도 찾아갔다. 어린이날엔 연필이나 공책을 선물했고, 운동회때도 찾아가서 선물을 건넸다. 게다가 교회가 아이들을 위해 뭐든 하고 싶다며 장학금도 내놓았다. 형식적으로 이름만 걸어 놓는 게 아니라 정성을 기울인 액수였다. "작은 교회가 어떻게…", 라며 도리어 만류하기도 했다. 졸업식 때도 우체국장상, 면장상과 함께 비인장로교회가 주는 특별상이 생겼다. 사랑상이란 이름으로. 류 목사도 이런 지역 유지들과 나란히 졸업식장에 앉았다. 아이들은 그런 목사님을 본 적이 없어서인지 신기해했다. 차츰 교회도 우체국과 경찰서와 같은 '중요하고 필요한 곳'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면사무소에서 복지를 담당하는 직원은 어려운 일만 생기면 이제 류 목사를 찾는다. 대개 도움이 필요한 일이다. 류 목사가 이런 도움을 거절한 경우는 거의 없다. 지난 추석엔 면사무소 직원이 사과상자를 들고 류 목사를 찾아와 사례까지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류 목사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에 언제나 열심이다. '칭찬합시다' 프로그램에 추천한다며 나서는 걸 말리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군수상은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교인들 앞에서 이건 제가 받을 상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주는 상이라며 손을 털었다. 학교에선 학부모들이 좋은 일 하자면서 모임을 갖고 돈을 모아선 비인장로교회에 맡기기로 했다. 마을 사람들이 사랑하는 교회가 된 것이다. 이게 뭣보다 류 목사에겐 기쁨이다.

얼마 전 류 목사는 신학교 동기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 놓았다. 남 모르게 앓아온 고민이었다. "사경회도 해보고 성경공부도 하지요. 그러나 대개가 노인인 교인들은 이런 저를 못따라 오십니다. 게다가 IMF 때문에 젊은이들은 대개 도시로 나가고 노인들만 늘어납니다. 저 자신을 아는데 노인분들에게 맞출 만큼 저에겐 인생경험도 풍부하지 않고, 그런 말주변도 없습니다. 신학적으로 틀이 잘 맞는 설교보다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던지는 한 마디 설교가 훨씬 큰 힘이 될 것이라 생각하면 솔직히 이 자리가 무겁게 느껴집니다.

허기야 3년 전만 해도 목사 없는 농촌교회에서 단지 내가 있다는 것 하나로도 교인들에게 면목이야 섰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잖아요. 목사 초빙광고 하나만 내도 수십명이 몰려드는데 그들 가운데 저보다 나은 분들이 없지 않겠어요? 그런 생각하면 잠이 안옵니다."

진심이었다.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는 고민이다. 게다가 열 살, 일곱 살, 네 살인 세 딸 세희 세영 세록이를 생각하면 또 도시가 그립다. 주위의 많은 목회자들이 도시로 떠나는 것을 볼 때도 솔직히 다른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이런 이유 때문에 주님이 머물라 명하신 목회지를 떠날 자신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나 자신이 성도들에게 참 행복을 주지 못한다, 생각할 때면 자신도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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