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니까. 거짓말 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잘못한 거 없으니까. 단지 그것 뿐이고 또 그게 전부다. 얘기함으로써 얻는 불이익이 너무 많다는 걸 나도 뻔히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또 누군가 '남들 다 안 하는데 왜 굳이 나서느냐?'고 물으면 반박할 말도 많지 않다. 이게 난데…. 그 말밖에 더 없다." 홍석천씨의 고백이다. 커밍아웃을 선언한 홍씨는 요즘 하루 하루가 투쟁의 나날이란다. 원치 않게 투사가 된 것 같단다.

실제로 남성동성애자 인권모임 [친구사이], 동성애자 인권연대, 동성애전문지 <버디>,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등 단체들이 방송사를 향해 "방송사와 언론사는 홍석천씨에게 자행되고 있는 인권유린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여성중앙21>과 <일간스포츠>가 홍씨의 동성애 사실을 폭로한 이후 KBS와 MBC가 홍씨의 방송출연을 중단시키는 등 성적 소수자에 대한 인권유린을 자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을 인권유린 행위로 본 것이다.

어쨌든 홍씨의 커밍아웃 이후 인터넷 사이트를 비롯해 우리 사회가 동성애 문제에 푹 빠져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결코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이미 1998년에 퀴어영화제라는 동성애 영화제도 열렸다. 동성애 잡지가 생겼고, 동성애 사이트도 있다. 그들이 모여서 시위를 하기도 했다.

외국의 경우 이 문제는 훨씬 심각하다. 가령 미국은 작년에 동성애자 부부가 탄생했다. 이들 부부는 지난해 법적인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주정부에 대해 소송을 제기해 '이성 부부와 동등한 권리를 줄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냈으며, 주지사는 지난 4월 동성애 부부의 법적 권리를 공식 인정하는 법안에 서명한 상태다. 유럽의회도 이미 동성 부부의 권리를 인정하는 결의를 한 바 있으며 영국이나 독일로 확산됐다.

우리 사회도 예외지대가 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이미 유명인의 커밍아웃을 향해 달려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아직 동성애에 대해 그리 너그럽지 않다. 젊은이들이 주류를 이루는 인터넷에서조차 그렇다. <인터넷 한겨레>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동성애자임을 밝힌 이상 텔레비전의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퇴출된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여론이 38%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니 일반국민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한다면 방송출연금지 조처를 지지하는 여론이 훨씬 많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럼 이런 동성애자들의 요구가 교회에 미칠 영향은 어떤 것일까? 성인경 목사(한국라브리선교회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동성애자 교회>가 생겨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다. …안타까운 사실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점점 그(동성애자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죄책감은 커녕 신학적으로 혹은 성경적으로 동성애를 정당화하려는 사람도 있다. 세상의 냉대를 피해 그들끼리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둘째 동성애 문제를 인권문제로 변질시킬 우려가 있다. …이미 미국에서는 목회자들까지도 그들을 치료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동성애자들을 위한 교회를 세우고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는데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그런 조짐이 일고 있는데 일부 신문의 논조나 영화평론만 보더라도 동성애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 내지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셋째 죄악에 대한 혼돈을 불러일으킨다."

성목사가 지적하는 세 가지 가운데 우리는 두 번째와 세 번째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본다. 동성애 문제는 인권의 문제인가, 그리고 동성애자들이 말하는 것, 가령 기독교가 금욕주의를 부추기기 때문에 동성애를 죄로 본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동성애를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성적인 권리의 한 형태로 보면서 고유한 인권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성경은 적어도 동성애 문제에 관해 언제나 일치하는 견해를 보인다. 예외 없음이다. 뮌헨대학의 신학교수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는 이렇게 말한다.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판단은 분명한 거부이며 이 문제에 대한 모든 성경의 진술은 예외 없이 일치한다. 레위기(18:22)의 거룩한 법은 논쟁의 여지없이 단언하고 있다.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것이니라. 레위기 20장에서는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에 동성애를 포함시키고 있다. …이 문제들에 있어서 유대교는 자신이 언제나 다른 민족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사실 신약에서도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거부는 이어진다. 로마서 1장 27절에서 사도 바울은 동성애가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결과라고 지적한다. 고린도전서(6:9)에서는 동성애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행위들 가운데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나머지 행위들은 간통, 간음, 우상숭배, 욕심, 술취함, 도둑질 등이다. 성경은 성 문제와 관련해 언제나 결혼공동체를 위한 것에 국한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언을 시대에 뒤떨어진 문화적 상황의 표현으로 상대화시키려는 시도들이 거세게 일고 있는 것이다.

사실 교회가 갖는 딜레머를 이해할 필요는 있다. 신학자 토마스 E. 슈미트는 동성애와 관련된 그의 저서 <단정한 품행? 동성애 논쟁에 있어서의 연민과 명확성>에서 이런 교회의 딜레머를 설명하고 있다. "예배와 사역으로부터 동성애자들을 제외시키는 것은 그들을 기독교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도 있는 것인 반면 그들을 교회생활의 모든 면에 동참시키면 마치 교회가 동성애를 승인하는 것인 양보일 수도 있다. 도덕적으로 모호한 <묻지 말라, 말하지 말라>의 방침은 이 논쟁의 그 어느 진영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교회에서는 매우 비겁한 자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이보다 나은 방침은 교회 지도자들이 정기적으로 강단에서 그리고 사적으로 늘 강조해야 한다. 교회는 동성애 행위를 포함한 성적인 불순종에 대해서 구원에 이르는 징계를 할 뿐만 아니라 용서와 변화를 지향하고 있음을. 이를 목회적 차원에서 본 동성애 문제의 대응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동성애는 'NO'라고 분명히 말하되 동성애자와의 만남은 또 다른 차원으로 보자는 이야기다.

실제로 동성애 문제에 대해 좀 더 깊은 의학적 접근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동성애란 것이 유전적인 것이냐, 후천적인 것이냐 하는 데 있어 분명한 대답이 없기 때문이다. 두 가지 모두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지금으로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이 유전적일 수 있더라도 성경이 가르치는 죄된 것이기에 싸워야 한다는 게 성경적인 입장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멀렌 컷의 책제목처럼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란 관점에서 바라보면 목회적 차원에서 교회가 어떻게 동성애자들을 수용할 수 있을지 답이 나올 것이다.

김민웅 목사(뉴저지 길벗교회)의 이야기다. "개인적 은밀함을 넘어서서 집단으로 존재하고 있는 동성애자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될 것이며, 이들을 향한 사회적 자세가 적대적인 태도로만 일관할 경우 이들 동성애자들이 겪을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목회적 관심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

미국 신학교의 경우 1980년대에 이르러 동성애 문제에 대한 신학적 논의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동성애자들이 우리 주변의 이웃이란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처음에는 정죄만 하던 교회들이 그들의 성장과정에서 경험한 실존적 고뇌와 슬픔, 그리고 자아의식 등에까지 주목하게 된 것이다. 동성애자들을 교회가 끌어안을 수 있는 길이 여기서 열리기 시작했다. 동성애자들이 고민해 온 그들의 생체적 조건을 함께 고민하면서 인간의 면모를 더욱 새롭게 심화할 수도 있었다. 사랑이었다.

그걸 단지 윤리적인 정죄로만 보지 않고 교회가 그들이 대화할 수 있는 진정한 광장이 된 것이다. 낮은 데로 임하신 주님의 마음으로 교회가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동성애 금지명령이 세상에서 의미를 가지며 복음은 또 전파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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