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노회를 가보면 우리나라 노회처럼 개교회의 문제가 많이 올라오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목사의 성추행, 거짓, 교리문제, 인간관계에 얽힌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교회가 시험에 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를 가나 사단이 역사하기 때문에 인종을 초월하여 교회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교회의 교인들은 교회가 문제가 발생하면 교인들 스스로 떠나거나 아니면 노회가 중재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래서 웬만하면 노회의 중재를 따르고 노회를 탈퇴하는 예는 좀처럼 드물다. 일단 상회의 결정에 승복하는 것이 미국사람들의 법 정신인 것이다.

대체로 노회가 개교회의 문제를 접하면 노회는 공평하고 합리적이고 투명하게 처리해서 교회가 안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나라처럼 인맥이나 학맥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그것이 시스템이 작용하는 나라인 것이다. 그 시스템은 단체의 힘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인 힘으로 말미암은 문제들은 단체가 힘을 갖고 해결해 나가기 때문에 웬만하면 분쟁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한국교회나 미국교회에서 발생하는 교회문제 한 가운데에는 항시 목회자와 장로의 힘이 뒤에 웅크리고 있다. 앞에는 충분한 정보가 없이 소문과 자신들의 보스의 얘기만 들은 민초들만 날뛰고 있다. 그러한 민초들은 장로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고 목회자를 지지하는 경우도 있다. 목회자를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도 전 목회자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고 현 목회자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다.

교회분쟁, 흑백만 있고 회색은 없어 

그러나 미국인들은 법 정신이 강하고 자신들의 인권과 주권이 최대한 강조되는 민주화된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일사불란하게 집단적으로 뭉쳐서 행동을 통일하여 힘을 과시하거나 한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미국 의회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민주당이라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공화당의 정책에 동조한다. 우리나라는 야당이면 거의 99% 일사불란하게 여당 정책에 반대하고, 여당이면 무조건 99% 야당정책에 반대한다. 그것은 우리가 계보정치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자유결단이 성숙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의 분쟁이 있게 되면 흑과 백만 있지, 회색은 없다. 절충지대가 너무 미흡하기 때문에 중재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남이면 남이고 북이면 북이지 송두율 씨처럼 남도 북도 아닌 경계인이 별로 없는 것이다. 흑과 백만 있기에 좌우익 싸움이 그렇게 치열했고, 남과 북이 한 핏줄이면서도 그처럼 으르렁거렸고, 민주주의자들과 반민주주의자들이 한민족이면서 철천지원수였으며, 친노 세력과 반노 세력이 마치 일본사람들을 대하듯 서로 입에 거품을 흘리면서 비난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근성이다.

미국에 가보면 서로 갈등을 일으키다 안 되면 상대방을 불법체류자라고 INS(미국이민국)에 고발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민족밖에 없다. 싫고 미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피를 맛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다. 물론 일부분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넘어뜨리고 재기하지 못하도록 짓밟는 것이다. 대통령이 싫으면 국민의 뜻과 상관없이 국회를 동원해서라도 탄핵을 해서 끌어내려야 하고, 상대방이 싫으면 한국 최초로 받는 영광스런 노벨상도 못 받게 민족의 망신까지 시켜가면서 스웨덴까지 가서 방해를 놓아야 하고, 대통령이 되고자 같은 민족을 희생시켜서라도 정권을 찬탈해야 하는 것이 부끄럽게도 우리민족의 실상이다. 자신들의 목표를 위한다면 국익도 없고 민족도 없는 것이다. 극단의 이기주의만 남아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단적 이기적인 일들이 불행하게도 가장 신성하다고 여기는 교회 안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면 우리는 "설마, 신성한 성전에서 그럴 리 없어" 하고 끔찍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요즈음의 교회문제를 보면 생각보다 너무  나가는 것 같다. 싸우더라도 '룰'(rule)이 있어야 하는데 이제 '룰'(rule)조차 무색하게 한다. 상대방을 이기고 거꾸러뜨리기 위해서는 잘못된 줄 알면서도 없는 말도 만들어야 하고, 없는 증거도 변호사를 사서 거짓으로 꾸며야 하고, 고발도 해서 기선도 제압해야 한다. 그러한 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폭로정치에 매몰되어 이성을 분간하지 못하고, 내가 지지하는 보스의 행동이 모두 옳다고 믿어버린다.

계보정치의 충복은 '맹목적인 충성'

이렇듯 교회분쟁의 이면에도 계보정치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계보정치의 결과는 보스들의 세력다툼 때문에 민초들은 십자군들처럼 자신들도 모르게 이용당해 그 보스를 위해 맹목적으로 목숨을 바쳐 결국 희생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일찍이 교황이라는 거룩한 '종교 보스'를 위해 수백만이 희생한 십자군 전쟁에 잘 나타난다. 보스를 위해 충성하다보면 자신의 친구들이나 형제들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보스만을 교주로 삼고 움직인다.

삶의 무게중심이 형제자매가 아니라 보스쪽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자신의 주위에 있던 성가대원들, 교사들, 구역원들, 동료교역자들 모두 원수로 변해있게 됨을 알게 된다. 더 나아가 가정까지 분란하게 되어 부부문제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사업은 사업대로 안 되고 교회에 나오면 주의 형제자매들은 서로를 보고 얼굴보기까지 민망한 것이다.

어느 한 순간에 평화로운 교회에 미움이 찾아오고 사랑해야 할 교회에 원망과 분노가 상대방 교우에게 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좌우익의 악령이 되살아나고, 남과 북의 원한이 조성되고, 천사의 자녀들과 사단의 자녀들이 대립하게 된다. 예배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아멘'하고 드리지만 마음은 '오월동주'인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같이 심야기도도 하고 찬양도 하며, 예배를 드린 어제의 친구며 사랑하던 성도들이 오늘은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서로 입에 거품을 물고 비난하며 '사단의 자식'들이라고 대든다. 그러면서 예배도 따로 드리고 서로 불법 예배라고 아우성이며 폭력까지도 불사한다.

이것이 보스의 야심에 의한 현대판 십자군의 희생인 것이다. 그리고 양쪽의 보스들은 '하나님의 뜻,' '거룩한 계시'라고 말하며 상대방을 증거도 없이 '거짓 선지자'라고 민초들을 계속 부추긴다. 그러면 아무 것도 모르는 순수한 민초들은 보스의 거룩한 목소리가 진실임을 믿고 '주여 나를 보내소서' 하면서 눈물로 기도를 하며 순교자의 자세로 앞장서면서 자신의 보스의 반대자에게 갖은 비난과 선동을 해 가면서, 사단의 자녀들로 가정을 한다. 자신이 마치 종교개혁자 루터인 마냥 사단의 세력들과 투쟁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렇게 된 것이 혹시 계보정치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우리의 정치사는 계보의 정치사였다. 진리와 민주주의 의식, 개혁 등은 상관없이 자신들의 보스를 따라서 움직인 것이 오늘 허울 좋은 민주정치의 산실인 것이다. 그것은 민주투사가 뇌물투사로 갑자기 변한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보스를 위해서라면 ‘차떼기’라도 하고 보스는 자신의 야망만 달성한다면 졸개들의 '차떼기'도 선진 민주화 건설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감언이설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아니면 자신의 명예를 위한다면 국민 몰래 '퍼주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대쪽이니 민주주의 투사하면서 하면서 백성들을 거룩하게 기만하는 것이다. 그들의 기만은 그들의 자식들을 통해서 너무나 명백하게 드러났다.

원로파, 담임목사파가 아닌 '예수'에 관심갖자

이와 같이 이러한 계보정치의 불명예스런 역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세대도 못가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계보정치의 부작용을 파악하면서도,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이 이러한 정치를 채택하고 있다면 얼마나 구시대적인 발상일까? 언제까지 자신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명예와 야심을 위해 선동하고 기만할 것인가? 그리고 그 민초들은 언제까지 자신의 성찰 없이, 비상식적인 선동에 휩싸여 보스의 입만 따라갈 것인가?

보스가 당을 탈퇴하면 같이 탈퇴하는 철새정치인이나 정치모리배들처럼 보스가 노회와 총회를 탈퇴하면 우리 교인들도 그러한 과정을 밟아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보다 보스가 더 좋으면 할 수 없지만…. 불행하게도 요사이 몇 장로교회들이 총회나 노회의 결정에 수긍하지 않고 민초들을 데리고 탈퇴하는 쪽으로 간다. 그러면 많은 민초들은 보스들에 따라서 움직인다.

그러나 이제 민초들이여, 솔로몬의 지혜를 갖고 크게 외쳐라. "이제 우리는 '원로파'니 '담임목사파'니 '장로파'니 하는 그런 계보정치에 관심 없고 오직 예수에만 관심 있는 '예수파'라고. "우리는 더 이상 계보정치에 십자군처럼 희생자가 아니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 결단해서 우리의 길을 갈 것"이라고. 그러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보스가 상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교회나 노회를 탈퇴한다면 마지막 한마디 해라. "장로교의 주권이 보스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으며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들을 통해서 드러냈기에 이제는 그 주권이 우리에게 있다"라고.

이제는 "우리가 기도해서 우리의 길을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고. "갈 테면 보스 당신이나 가라. 나는 뒤에서 기도해주겠노라"고. 그것이 계보의 늪에서 벗어나 저 멀리 뵈는 시온성, 거룩한 곳 아버지 집을 향하여, 보스에 의해 속박된 노예의지가 아닌 자유의지를 갖고서, 잠시 사단에게 속아 서로를 미워했던 사람들을 이전 처럼 다시 얼싸안으면서, 한걸음씩 걸어가는 것이 진정한 순례자 장로교도의 자세가 아닐까?

황규학 목사 / 목회교육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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