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교인들 중에서, 성서를 읽지 않는 이들의 유형을 살펴보면, 대여섯 가지로 나누어진다.

1) 성서를 꼭 읽어야만 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목사가 하는 설교나 잘 들으면 되는 것이지, 어디 그뿐인가, 교회에서 성경공부라고 하는 것도 하는데, 그러한 기회마다 성서의 내용을 조금씩 들으면 교인 구실 하는데 특별히 모자랄 것도 없을 터이고, 더욱이 옛날 천주교에서는 일반 신도들이 성서를 함부로 읽다가는 오히려 해가 된다고 하여 개인들이 사적으로 성서 읽는 것을 금하기도 했다는데, 솔직히 말해, 읽어도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재미도 없는 성서를, 어떻게 따분하게 읽고 앉았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성서를 읽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성서를 안 읽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말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사실 그들이 성서 읽기를 기피하는 데에는 성서 자체에도 책임은 있다. 너무 어려운 말로 번역되어 있다든지, 고어(古語)체로 번역이 되어 있다든지, 어쨌든, 오늘의 독자가 쓰는 언어와는 동떨어진 언어로 번역되어 있어서, 읽으려 해도 읽기가 사실상 어려운 것이다.

2) 교인들 중에는 성서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성서를 읽을 기회가 생기면 읽고, 또 읽을 기회가 없으면 없는 대로 읽지 않아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교인들이다. 이러한 교인들이 성서를 읽는 기회란, 고작해야 예배 시간에 성서가 낭독되는 시간에 자기의 성서를 펴서 함께 읽을 때뿐이다.  

3) 성서를 무시하거나 우습게 보거나 심지어는 반대하는 교인들도 있다. 기독교는 그런 대로 받아들일 만한 종교인데, 성서 안에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현대의 과학적 사고와는 맞지도 아니한 미신적인 신앙, 교육적으로 볼 때 건전한 윤리에 반하는 그릇된 교훈도 들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성서를 의식적으로 읽지 않는 이들이다. 성서는 신앙을 체계적으로 진술하지 않고 여러 가지 자료를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성서를 읽는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 신도가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성서를 읽다가는 오히려 신앙에 혼란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서는 안 읽어도 성서의 진수를 뽑아 체계적으로 진술한 기독교에 관한 책이나 신학 책은 읽는다.

4) 성서를 읽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읽을 거리가 많아서 미처 성서까지는 읽지 못하는 교인들도 있다. 이런 독자들은 기독교가 세계 굴지의 종교인데, 성서는 바로 그 종교의 경전인데, 거기에는 해로운 말보다는 이로운 말이 많을 것이고, 들어서 유익한 말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성서를 읽을거리의 우선 순위에서 일간 신문이나 주간 잡지나 월간지보다 못한, 맨 꼴찌에 두기 때문에, 우선 읽을 거리를 먼저 읽다가 보면 성서를 읽을 시간은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성서의 가치를 인정은 하면서도, 성서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읽을거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5) 독서 자체에 익숙해 있지 않아서 성서를 읽지 않는 교인들도 있다. 영화나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는 즐겨서 보지만 인쇄 매체로 된 것은 신문이나 잡지나 소설도 안 보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독서를 게을리 하는 사람들이기보다는 정보를 얻거나 즐기는 데 있어서 그 매체를 달리하는 이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성서를 읽지 않는다고 비난받아야할 사람들이 아니라 이해 받아야 할 사람들이고, 그들에게 성서를 읽히고 싶어한다면, 그들이 사용하는 매체 곧, TV, PC 등으로 성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새로운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6) 기독교인으로서 성서는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생계를 위해 혹은 사업을 일으키기 위해 너무나도 바쁘게 활동해야 하기 때문에 성서를 못 읽는 교인들도 있다. 이런 교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신문도 텔레비전도 안보는 사람들이다. 물리적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그저 교회에 나와서 성서에 근거한 설교를 듣는 것이 성서와 만나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런데, 눈을 돌려서 성서와 관련된 또 다른 국면을 보면, 성서는 다른 책과는 달리, 몇 가지 세계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1) 성서만큼 많이 보급된 책도 없다. 최근 10년 동안 우리 나라 안에서 성서가 보급된 통계를 보면, 일반 출판사에서 보급하는 성서 말고도, 대한성서공회가 보급한 것만 해도 해마다 1백만 권이 넘는다. 해마다 1백만 권에서 2백만 권까지 보급되는 책은 성서 외에는 그리 흔하게 찾아볼 수 없다. 나라마다는 달라도 세계적으로 보면 성서는 영원한 베스트 셀러에 속하는 책이다.  

2) 성서만큼 전 인류가 쓰는 여러 언어로 번역된 책도 없다. 1997년 말 통계로 2,197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지금 계속되고 있는 성서번역의 진도로 보아서 아마도 21세기에는 인류가 쓰고 있는 4-5천여 개 언어가 모두 자기의 언어로 번역된 성서를 가지게 될 것 같다. 앞으로 한 세기 안에 새로운 언어가 더 생기지 않는 한 모든 언어는 제 언어로 된 성서를 갖게 될 것이다.  

3) 성서만큼 장기간 읽히고 있는 책도 없다. 성서가 구전 형태에서 책의 형태로 완전하게 바뀐 것은, 구약의 경우 에스라 시대라고 보고, 신약의 경우는 서기 2세기라고 본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읽히고 있다. 일반 책은 얼마만큼 읽히다가는 독자의 관심 밖으로 사라지는데, 혹은 지속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고전으로 남는 책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독자는 한정되어 있다. 다만 성서만이 예외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성서만큼 사랑 받는 책도 없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또 성서만큼 인류가 당면하는 문제에 대처할 깨달음을 주는 책도 없다는 말일 것이다.

4) 성서만큼 전 인류가 그들의 석학을 총동원시켜 연구하게 하는 책도 없다. 한 책에 대한 연구물이 성서만큼 많은 것도 없다.

5) 성서만큼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책도 없다. 성서가 생긴 이래 지금까지 성서는 계속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6) 성서만큼 매체를 달리하여 지속적으로 전달되고 있는 책도 없다. 구전 시대에는 구전으로, 문필 시대에는 책의 형태로, 멀티미디어 시대를 맞아서는 전자매체인 CD-ROM의 형태로 전달되고 있다.  

성서가 이런 기록을 가지게 된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성서 자체가 지닌 매력이라고 할까, 성서 자체가 지닌 능력이라고 할까, 성서가 사람을 이렇게 오래 동안 지속적으로 붙잡고 있는 자체의 힘은 무엇인가? 성서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 고백하는 말을 들어보면, 1)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2) 성서가 거룩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다고도 말한다. 3) 성서가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은, 불행하게도,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혀 본 경험이 없는 이들이나 성서의 신비한 세계 속을 여행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해도 안되고, 매력도 없고, 설득력도 없다. 이러한 포괄적인 진술은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혀 본 경험이 있거나 성서의 신비한 세계를 들여다 본 경험이 있는 이들끼리나 통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성서가 이러한 세계적 기록을 지닌 책이라면, 성서는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아니, 인류가 2천여 년 이상 매달려 온 책이라면, 우리도 한 번 진지하게 읽어 볼 만한 책이다. 쉽게 무시해 버릴 책이 아니다. 성서를 이해하면 할수록 성서를 그만큼 더 사랑하게 되고, 성서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성서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해와 사랑이 서로 맞물려서 돌고 돌수록, 곧 이 둘이 맞물려서 순환하면 할수록, 성서의 말씀에 대한 이해와 사랑, 사랑과 이해가 증폭될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성서의 말씀은 독자를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성서를 읽는 사람이 새로운 의식을 갖게 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발견하게 하며, 새로운 희망에 사로잡히게 하고, 새로운 믿음을 고백하게 하고, 새로운 삶을 계속적으로 추구하게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람은 책을 만든다. 그러나 성서는 사람을 만든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하기 때문에 성서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성서를 다른 책들과 구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라느니, 혹은 "생명의 말씀"이라느니, 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성서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거역할 수 없이 절대적인 명령으로 육박해 오는 말씀이라는 뜻일 것이며, 성서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 함은 그 말씀이 솟아나는 생수처럼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말일 것이다. 성서와의 관계가 이쯤 되면, 각자는 이런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나에게 가장 가혹한 형벌이 있다면, 그것은 나더러 성서를 읽지 말고 살라는 것이다." 성서를 애독하는 독자들이라면, 이것이 단순한 과장만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성서를 읽는 기쁨과 감격을 말하라면, 두서가 없긴 하겠지만, 필자로서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성서의 여러 곳에서 나는 나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자주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본질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한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자.

(1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18)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이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나에게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19)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는,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24)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표준새번역} 롬 7:15-8:1).

사랑과 미움, 죄와 용서, 믿음과 의심, 절망과 희망, 탐욕과 질투, 분노와 좌절, 포기와 극기, 위로와 격려 등과 같은 나의 갈등이 여기에 그대로 모자람이 없이 다 반영되어 있다.

나를 반기시는 분의 초청의 음성을 듣는 것도 성서에서이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표준새번역} 마 11:28-30).

성서에서 우리는 이웃을 발견한다 (눅 10:25-37). 형제 자매를 발견한다 (마 23:8). 어머니를 발견한다 (눅 2:34-35). 자식이 누구인지를 발견한다 (시 127:3-5). 자연을 발견한다 (창 1장; 호 2:21-23). 하나님을 발견한다 (요 3:16). 성령을 발견한다 (고전 12장).

성서에 가까이 접근할수록 성서도 내게 가까이 접근해 온다. 그래서 안 보였던 본문이 보인다. 늘 보던 본문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양쪽에 날이 선 검과 같이 되어 돌 같은 마음을 갈라놓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갈 길이 보인다. 말씀을 읽으면서 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한다. 말씀을 읽으면서 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죄의 선언을 듣는다. 성서를 읽면서 나를 외면하시는 하나님을 보기도 한다. 목회자의 기본적인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것도 배운다 (고전 9장). 목회자의 절망과 희망이 어떤 것인지를 본다 (고전 4:8-13),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해야 할 지 배운다 (시 34:11). 철없던 시절에는 성서를 읽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웠다. 나이 들어서는, 특히 인생을 다 살았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인생 설계도 하지 않으려 하는 유혹을 받는 이 나이에 이르러서는, 성서는 새로운 미래를 열어 보여준다 (사 41:23). 우주적 시각을 갖게 하고 우주적 전망에 관심을 갖게 한다 (골 1:15-20). 영원 전에 대한 저 아득한 우주의 과거를 명상하고 싶어하고, 저 머나먼 아득한 미래, 곧 우리의 인식 바깥에 있을 영원까지에 대한 비전을 보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바로 이 단계이다.

결국 성서에서 나는 내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발견한다. 궁극적으로는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성서에서 배우고 있다. 기독교가 성서를 경전으로 인정하여 성서가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니다. 성서 자체의 권위가 독자로 하여금 성서를 경전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게 한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