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비평>은 2000년 가을호에서 [쟁점 - 한국의 지식권력 시리즈] 세 번째로 '권력으로서의 한국종교'를 다뤘다. 주제에서도 암시되듯이, 한국의 종교는 이미 하나의 권력으로 상징되고 있다. 그 권력의 힘이란 언론계와 더불어 절대성역으로 자리매김되어 있기도 하다.

'한국종교, 열광과 침묵 사이에서'(장석만) '개신교와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이진구) '불교계, 종단 권력의 정치학'(김종찬) '한국 천주교회의 빛과 그림자'(조현범) 등 4개의 글로 구성돼 있다. <뉴스앤조이>는 그중 이진구 선생(서울대 종교학 강사)이 쓴 '개신교와 성장주의 이데올로기' 게재를 요청했고, 이진구 선생이 기쁜 마음으로 흔쾌히 응했다. 이진구 선생의 글을 두 개의 작은 주제로 나눠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하고 있다. 두 번째 얘기다.




3. 밀월과 저항의 시대
개신교가 폭발적 성장을 거듭한 것은 60년대 이후 산업화 시기이지만, 개신교의 사회정치적 기반이 닦이기 시작한 것은 미군정과 제1공화국 시대이다. 이 시기에 개신교는 인적, 물적, 제도적 차원에서 타종교의 추월을 불허하는 확고한 기반을 닦았다. 이러한 '기반 닦기' 작업에서는 국가권력과의 유착관계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몇 가지 주요 사례를 살펴보자. 일제의 퇴각으로 통치행정에 심각한 공백이 생기자, 미군정은 행정상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친미적 인사를 대거 등용하였다. 당시 미군정에 한국인을 천거하던 임무는 미국 선교사의 아들이며 해군 대령인 윌리암스(G. Z. Williams)가 맡았는데 그는 주로 개신교인을 천거하였다. 그 결과 제1공화국의 주요 국가기관과 고위직에는 개신교 인사들이 광범위하게 포진하였다. 최고통치자인 이승만 대통령 자신이 감리교회의 장로였으며, 부통령이었던 이기붕도 감리교회의 집사였다.

해방 직후 '적산'으로 분류된 일본 종교의 재산 중 상당수가 개신교 예배당으로 전환되었다. 당시 개신교계의 지도급 인사인 김재준과 한경직은 미군정청의 도움으로 천리교 재단을 접수하였다. 그래서 천리교본부가 있던 동자동에는 조선신학교(현재 한신대학교의 전신)와 성남교회가 창설되었고, 가장 큰 천리교회가 있던 저동에는 영락교회, 그리고 두 번째로 큰 천리교회가 있던 동사헌정(町)에는 경동교회가 창설되었다.

이 시기의 개신교는 선교활동 및 교세확장에 유리한 여러 가지 제도적 특권도 얻게 되었다. 해방 당시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친 기독교 인구는 총인구의 2-3%에 불과하였으나, 미군정하에서 크리스마스가 국가의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었으며, 당시 국영방송의 성격을 지니고 있던 서울방송을 통하여 기독교의 복음이 일요일마다 전파되었다. 그리고 1948년 총선 일자가 처음에는 일요일로 정해졌지만 기독교계의 반대에 부딪쳐 월요일로 변경되었으며, 1951년에는 대통령령으로 천주교와 개신교만이 참여하는 군종 제도가 시행되었다. 이처럼 제1공화국은 개신교가 사실상 '국교'의 역할을 하는 '개신교 공화국'이었다.  

국가권력으로부터 이러한 여러 가지 특혜를 입은 개신교는 그 반대급부로 이승만 정권에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다. 제2대 정,부통령 선거 당시 개신교는 한국기독교연합회의 이름으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승만이 국기 경례를 주목례로 변경하고, 군종 제도를 허락하고, 국가의식을 기독교식으로 하였다는 점이 그 이유였다.

이승만 정권과 개신교의 밀월관계를 강화시킨 주요 매개체의 하나는 친미 반공주의이다. 미군정의 반공주의를 계승한 제1공화국은 개신교의 적극적인 친미 반공노선과 궤를 같이 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 개신교는 투쟁적인 선악 이분법에 입각하여 북한을 사탄세력으로 규정하였으며, 이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기독교 전통의 하나인 반전평화주의는 당시 한국 개신교 안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개신교의 이러한 친미 반공 이데올로기는 전쟁을 전후하여 월남한 개신교인들에 의하여 더욱 고착화되어 갔다.

이처럼 제1공화국 하에서는 정치권력과 개신교의 유착관계가 매우 노골적으로 나타났으나, 4.19와 5.16을 거치면서 국가권력에 대한 개신교의 태도는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한편에서는 자유당 정권의 부정과 부패에 동조하여 교회의 '소승적' 이익을 도모한 과거의 행위를 '경거망동'으로 규정하는 자기비판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그후 군사독재 반대투쟁과 사회민주화, 그리고 인권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은 이러한 개신교 '진보' 진영의 신학적 패러다임으로 정착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도시산업선교운동이 대두하였다. 산업선교 운동은 노동자의 생존권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활동을 선교의 주요 과제로 삼았다. 이들은 '이교도'를 교회로 끌어들여 개종시키는 전통적인 '복음전도'보다는 사회적 조건의 개선을 통한 '인간 해방'을 참된 의미의 선교로 보았다. 즉 '인간화'가 전제되지 않은 '구원'은 무의미한 것으로 보면서 '사회구원'의 길을 강조하였다. 당시 군사정권은 이러한 성격을 지닌 산업선교 운동을 '정교분리' 정신에 어긋난 교회의 정치적 월권행위로 규정하고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개신교 인사들이 구속되었으며, 종로 5가에 있는 '기독교회관'은 가톨릭의 '명동성당'과 함께 민주화의 메카로 알려지게 되었다. NCC와 민중신학으로 대표되는 개신교 '진보' 진영의 이러한 사회운동은 한국 개신교의 사회적 '공신력'을 제고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나아가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에도 실질적인 기여를 하였다.

'하느님의 선교' 신학이 고도성장기의 그늘 지대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소외와 인권 억압에 주목하여 대항하였다면, 한국 개신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보수' 진영은 교회의 보호와 교세확장을 위해 군사정권의 경제논리와 성장주의 모델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 시기에는 '익스플로 74'와 같은 대형집회와 '민족의 복음화'를 위한 대대적인 전도 운동이 연일 계속되었다.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는 이 시대 '보수' 진영의 성격을 가장 핵심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당시에 '여의도 광장'은 개신교 대형집회의 단골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마침내 그곳에 수십 만 명의 신자를 자랑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세워졌다. 서울 시내에 다방보다 교회당의 숫자가 많다는 이야기나,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밤하늘에 붉은 빛을 발하는 수많은 교회당의 십자가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것도 이 무렵에 나온 이야기이다. 교회 건물도 중세 고딕 성당처럼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면서 위로 치솟아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맘모스 교회, 초대형 교회의 시대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외형적 성장에 주력하였던 '보수' 진영은 국가권력에 대해서는 어떠한 태도를 취하였는가? 이들은 '복음'의 순수성과 '정교분리'의 이름 하에 교회의 사회참여와 민주화 운동을 철저하게 비판하였다. "세상의 권세에 복종하라"는 로마서 13장의 구절은 국가권력에 대한 이들의 기본 지침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국가권력의 도덕적 정당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일단 정권을 잡은 지배집단에 대해서는 거의 전적인 복종과 순응의 태도를 보였다. 집권세력이 교회의 '고유한' 영역에 개입하지 않는 한, 정부에 충성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신앙인의 행위라고 굳게 믿었다. 이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입장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복잡한 정치적 현실 속에서는 어떤 집단도 어떤 개인도 정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의 '순수한' 정치적 중립은 현실 정치 속에서는 대체로 기존체제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귀결되었다.

개신교 '보수' 진영은 이러한 '소극적' 지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권력에 대하여 '적극적' 지지를 보내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군사정권 시절에 등장한 '조찬기도회'이다. 이 기도회는 '나라를 위한 기도회'라는 명분을 지니고 있지만 실제로는 국가원수를 위한 기도회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이러한 기도회는 정권과 교회 사이의 '연결고리'로 작용하면서 개신교 교회의 전체 이익을 침해하는 각종 법령이나 조치를 사전에 혹은 사후에 무력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 사회의 개신교는 정부기관만이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신도조직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조직력이 뛰어난 종교이다. 국회의원, 대학교수, 의사, 변호사, 실업인 등 각계에 개신교인 조직이 강력하게 존재한다. 이 단체들은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기독교인 사이의 친목 도모를 기본 취지로 하여 조직되었지만, 유사시에는 개신교 교회의 이익을 전 사회적으로 관철시키는데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는 '로비 기관'으로 변신한다. 몇 년 전에 '주일성수'를 근거로 일요일에 공무원 시험을 치루는 것을 평일로 변경하자는 기독교계의 운동이 있었다. 결국은 일반 여론에 의하여 무산되기는 하였지만, 이처럼 개신교는 자기집단의 '이해관계'에 걸린 문제가 등장하면 똘똘 뭉쳐 엄청난 사회적 여론을 일으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4. 승자 콤플렉스
정치영역에서 개신교가 '보수'와 '진보'의 구도로 나타난다면, 종교 시장에서는 '근본주의'와 '포용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정치적 '보수'가 종교적 근본주의, 정치적 '진보'가 종교적 포용주의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은 분명하다. 정치권력에 순응하거나 유착하는 '보수' 진영이 전통문화나 타종교에 대하여 공격적 선교 태도를 보인다면, 정치권력의 부당성에 저항하는 '진보' 진영은 전통문화나 타종교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관용적이다. 이 두 가지 입장이 한국 개신교 내에 공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한국 개신교의 전체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보수 근본주의'이다.

90년대에 일어난 군부대 내에서의 불상 파괴 사건, 대학 캠퍼스 내에서의 장승 및 불상 파괴 사건, 98년 제주도 원명선원에서 일어난 수 백 개의 불상 훼손 사건 등은 개신교 근본주의의 부산물이다. 올해 6월에는 불교계 종립 대학인 동국대학교 캠퍼스의 석가여래입상이 수난을 당했다. 누군가 야밤을 틈타 불상 정면에 붉은 색 스프레이로 십자가를 그리고 그 밑 부분에 '오직 예수'라고 쓴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동국대학교와 불교계가 들끓고 있다. 비록 극소수의 '광신도'에 의하여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근본주의 신앙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최근에는 한문화운동연합이라는 단체가 전국의 초등학교에 세운 수백기의 단군상을 기독교인들이 부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단군상 논쟁'이 전 사회를 시끄럽게 할뿐 아니라 자칫하면 국론의 분열까지 초래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개신교의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NCC는 처음에는 종교간의 화합 분위기를 고려하여 단군상 설치에 대하여 '묵인'하는 입장을 취하였었다. 그러나 나중에 근본주의 진영의 공격을 받고 입장을 철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문제는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 그리고 민족의식의 고양이라는 여러 가지 차원이 혼재하여 있기 때문에 보다 심도있는 논의를 필요로 하지만, 대화와 토론 이전에 단군상에 직접적 테러를 가하는 모습에서 근본주의의 공세적 태도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개신교 근본주의의 기본적 에토스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승리주의'이다. 이 땅에 들어온 개신교는 처음부터 전통문화와 타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이고 공세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우상 타파'와 '미신 타파'의 이름 하에 조상제사 거부는 물론 전통문화와 타종교의 수많은 종교상징물을 비난하고 훼손하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화제국주의적 태도가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지 않았던 것은 개신교가 '문명개화'의 종교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근대화는 '서구화'와 '미국화'의 과정이었기 때문에 서구종교이자 미국종교로 간주된 개신교는 처음부터 '무임승차'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개신교 교세 성장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신교는 의식적 무의식적 차원에서 강력한 '승자 의식'을 갖게 되었다. 불과 한 세기만에 소수(minority) 종교집단에서 다수(majority) 종교집단으로 성장한 사실에 대한 성취감, 이제 거대한 종교권력인 교회가 원하는 것이라면 국가권력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 한민족의 완전한 기독교인화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확고한 믿음과 기대, 이러한 복합적인 심적 태도로 인해 한국 교회에 '승리주의'가 자리잡게 되었다. '승리주의'는 항상 '힘'을 숭배하며, 외형적 '팽창주의'로 나아가며, 타자에 대해서는 '정복주의'로 일관한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승리주의'는 다원적 종교시장을 교란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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