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욱 목사는 기자가 쓴 '영화 <글레디에이터> 읽기의 오류'라는 글에 대해서 반박하는 글을 삼일교회 홈페이지에 간단히 올렸다. 전 목사의 반박글과 이에 대한 기자의 재반박글을 함께 게재한다.



<전병욱 목사의 글>

글쓴이가 오해한 것이 몇가지!

1. 마치 책 1권 읽은 사람의 단견이 드러남.  --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와  무화과 나무 비유만을 내세운다면, 예수님도 "성공주의자"라고 매도할 수 있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1개의 메시지로 판단하는 오류.  "제단이 있는 삶"이나 "약함의 철학"같은 설교는 전혀 듣지 못한 것  같음.

2. 다보스 포럼이나 글래디에이터의 한 측면에 대한 평가를 전체를 지지하거나, 마치 전목사가 글래디에이터 감독으로 착각한 경우. --  어찌보면, 전 목사를 감독의 자질이 있는 것으로 높이 평가한 경우.

3. 취사선택한 글이 "목회와 신학"의 "타임 분석"의 글들. -- 타임을 분석하는 것이지, 성경을 분석한 것이 아니다.  성경적 시각으로 세상의 잡지를 분석하는 측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경우.

=== 결론 "무식하면 용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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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욱 목사는 '글레디에이터 읽기 오류'라는 첫 번째 글에 대한 반응으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점을 지적하였다.

첫째는 필자가 전체의 메시지를 보지 못하고 한 개의 메시지로 판단하는 단견을 드러냈다고 한다. 설교 하나를 듣고 그 설교자의 취향이나 메시지의 성격, 그리고 설교 방식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분명 충분한 정보를 갖지 못하고 내리는 단견이다. 그러나 각 설교나 메시지는 그 하나로서 이미 자체적인 완결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시리즈라고 할지라도 그 자체로서는 완결성을 지닐 때에 메시지의 능력을 갖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설교나 메시지로서 불완전한 수준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메시지 하나로서 그 메시지를 통해 전하려는 중심테마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예수께서도 비유 하나에 완결된 메시지를 전하시고 계신다는 점에서 그의 비유 하나를 가지고 생각해보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로 직결되는 일은 결코 아니다. 도리어 그 하나를 통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 성서의 힘이라는 점을 주목한다면, 전병욱 목사의 경우 자신의 설교나 메시지에 그 자신의 전체적인 관점, 테마가 드러나고 있음을 스스로 비판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글레디에이터 읽기나 그의 강좌에서 이미 유사한 테마와 자세를 발견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단견이 아니라, 그의 신학적 관점에 기본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근본문제라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하나에서 열이 드러나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주제에 하나만이 드러난다 해도 이미 그는 도처에서 세속적 성공주의에 물들어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달란트 비유와 무화과나무 비유'만'을 내세운다고 어찌 예수님을 성공주의자라고 매도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매도한다면 그것은 그 비유의 본질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전병욱 목사는 성서에 대한 공부를 좀더 제대로 해야겠다. 달란트 비유와 무화과나무 비유만으로도 우리는 예수께서 세속적 성공주의를 배격하고 계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 두 가지 비유는 기회와 조건, 그리고 능력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관심이 엉뚱한데 가 있어서 정작 하나님 나라가 원하는 열매는 제대로 맺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준엄한 비판이다. 이 비유의 공격대상은 바리새파, 율법학자 등을 비롯한 예루살렘 성전의 중심 기득권 세력들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럴싸해 보이는 달란트를 가지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관련해서는 그 달란트를 쓰지 않는 능력 없는 자들이며, 외양만의 그럴 듯한 무화과 나무들이라는 비판이 여기에 담겨 있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일에는 재빠른 자들이며 상석에 앉기를 좋아하는 자들이자, 겉만 하나님 나라에 관심 있는 양 신앙인으로 포장된 위선적인 회칠한 무덤이라는 질타는 이러한 현실에 뿌리박고 있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메시지의 중심주제와 그 출발점은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 아닌가? 그러므로 그분의 모든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 성장과 열매에 집중되어 있다. 비유의 전제 자체가 이미 세속적 성공주의와는 인연이 없으며, 도리어 예수께서는 어린 나귀처럼 초라하게 비틀거리고 가더라도, 또한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혹 와중에 주저앉는 일이 있다 해도 그 영혼의 순결함을 높이 사시는 분이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능력의 부족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니 그걸 걱정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애초부터 예수께서는 세속적 성공주의와 관련된 비유란 그 어느 것을 하나만 뽑아도 없는 것이다.  

둘째, 다보스 포럼이나 글레디에이터의 한 측면만을 지지했을 뿐인데 전체로 착각하거나 마치 전 목사를 글레디에이터 감독으로 여긴 게 아니냐고 반박한다.
하나의 측면은 전체와 관련되어 있는 유기적 부분이라는 정도는 모르지 않을 것이다. 굳이 하나의 측면만 보려 했다면, 전체적인 평가를 전제하고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대목에 대한 적시(摘示)가 있어야 오해를 막을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지지한 한 측면이라는 점도 실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다보스 포럼에 참석한 이른바 대가의 문제는 다보스 포럼의 전체적 성격과 분리된 독자적 하나의 측면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들이 참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은 다보스 포럼은 가능한 것인가? 전 목사가 그토록 칭송해마지 않는 이들 소위 대가 자신들이 바로 다보스 포럼의 본질적 성격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요소라는 사실에 대하여 전 목사는 어떻게 반론을 펼 수 있을 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글레디에이터 영화 읽기 자체에서 심각한 문제를 보지만, 글레디에이터라는 영화의 전개 수법에 착안하여 첫 몇 분간이 중요하다고 한 점, 그 자체가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가 어떤 영화를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최초의 몇 분간이 갖는 중요성을 입증하기 위해 글레디에이터라는 영화를 원용한 것이 아니었던가? 이 명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는 일련의 구원사(救援史)와 정면으로 대립하는 논리라는 점이 그 글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인 것이다. 전병욱 목사는 영화도 바로 감상하지 못하더니, 남의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오류에 계속 빠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서의 핵심 메시지, 즉 최초의 몇분이 아니라 최후의 종장(終章)에서 드러나는 '파격적 반전'(反轉)이 갖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증언과 고백을 그는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전병욱 목사는 성서적 시각으로 세상의 잡지를 분석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도대체가 성서적 시각이라는 것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다. 성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사랑과 평화, 의로움이라는 기본적인 가치관을 제공해주고 있다. 따라서 세상의 잡지를 보는 방식은 바로 이 가치관에 기초한 것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는 타임 등의 잡지가 미국의 초국적 대자본의 이해를 얼마나 심각하게 반영하면서 세계 도처에 미국적 관점을 일방적으로 퍼뜨리고 있는 잡지인지를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그로써 강대국의 논리와 지배전략을 정당화하는 매우 교묘한 보도자세와 논지를 견지하고 있음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의 시각으로 이러한 잡지를 보고 분석할 때에는 이들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잡지들이 혹 약자들의 고난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세속적 성공주의를 부추기면서 이러한 성공주의의 실현과정에서 희생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없는지,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께서 당대의 기득권 세력들이 히브리백성들의 눈을 가린 것에 대하여 신랄하게 폭로하면서 서슴치 않고 진실을 말하셨던 모습을 그대로 뒤따른 것이다.

따라서 전병욱 목사는 성서를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서 이 세상의 무수한 약자들과 이름 없는 백성들의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자신의 몸과 영혼을 사랑으로 불태우신 예수님의 육성이 그의 영혼에 들리거든 그때부터 말씀을 선포하는 결단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젊고 전도가 양양한 목사를 너무 몰아 부친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의 진정한 장래를 위한 이 충고에 귀를 기울일 때에 그는 그의 신앙역정에 새로운 지평을 발견하는 감사를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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