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선 짚어볼 문제들

전병욱 목사의 강좌 첫 번째 "존귀한 자"에 대한 비판기사가 나간 이후 의견으로 들어온 글들을 보면 기사에서 제기한 본질적인 문제들보다는 곁가지 차원의 내용들로 되어 있다. 이는 본 기사에서 집중적으로 논란을 벌인 전병욱 목사의 신학적 기초와 그 방향, 그리고 이것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의미 등에 대한 접근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먼저 분명하게 밝힐 것은 본 기획시리즈가 전병욱 목사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이나 그의 메시지 일부분을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그의 견해를 왜곡시키려는 의도를 결코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전병욱 목사의 경우는 한국교회의 강단의 주류가 노출하고 있는 문제의 특징들을 두드러지게 보이고 있는 경우일 뿐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교회 전체가 고민해야 할 내용들을 우리는 그의 사례를 통해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양적 성장의 깃발을 향해 치달으면서 정작 진정한 복음의 내적 실체와 사회적 함의(含意)에 대하여 외면하고 있는 현실이 우리의 기획시리즈가 딛고 있는 땅이다.  

따라서 전병욱 목사에 대한 비판은 한국교회 갱신을 위해 매우 중요하게 통과해야 할 신학적 논쟁의 출발점의 하나인 동시에, 이의 연장선 위에서 우리는 21세기적 신학의 새로운 방향에 대하여 진지한 논의의 기반을 마련해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차원에서 이 기획시리즈가 전병욱 목사 당사자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비판을 담고 있을 지라도 그에 대하여 함께 고뇌하고 풀어나가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한국교회의 새로운 장이 형성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를 해보는 것이다. 전병욱 목사 개인에 대한 우리의 인간적 애정과 신앙적 기원은 끝까지 유지될 것이다.

희망하기로는 앞으로 이 논쟁과 관련해서 기사가 집중하고 있는 문제의 본질과 관련한 토론이 벌어질 수 있으면 한다. 그러한 과정의 건강한 지속을 통해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신학적 답보상태와 목회적 현실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매우 의미있는 공동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보내온 의견들과 관련하여 두 가지 특별히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선 첫째 그의 설교나 강좌 하나 둘 정도만을 보고 이 기획시리즈가 마련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메시지 하나 하나에서 중대한 문제가 발견되고 있다는 점으로 해서 우리는 아직 충분한 신학적 성숙이 이루어지지 못하거나 잘못된 대목들이 특히 순수한 청년들에게 공급되고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둘째, 이 기획 시리즈는 기자 한 사람의 개인적이고 독단적인 판단에 의해 구성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매주 연속적으로 설교를 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집단적인 토론의 과정에서 정리된 내용을 기초로 작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기사를 쓰는 기자 개인에게 혹 특수사정이 생겨 글쓰기가 중단되는 일이 있다 해도 이러한 작업은 다른 사람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계속 될 것이라는 점을 알리고자 한다. 이 대목을 굳이 알리고자 하는 이유는 본 기획기사가 나간 이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압력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앞날을 위해 별로 건강하지 못한 방식이다. 이러한 압력을 거부하는 동시에, 그 압력을 이겨내는 일이 기자 개인의 차원에서 만일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더라도 이 작업이 공동작업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번 기획시리즈의 문제제기와 논쟁은 결코 일과성적 선정주의에 따른 것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2) 전병욱 목사 두 번째 강좌의 대략적 내용

그는 그의 사역에서 있어서 개인적인 초점을 꿈과 비전을 제시하려는 것에 있다고 밝힌다. 그러나 이 꿈과 비전이 제대로 실현되고 감당되지 않는 이유를 꿈에 대한 댓가를 치르지 않으려는 자세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댓가의 내용은 신앙적 진지성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그 꿈과 비전을 실천의 장으로 옮길 수 있는 현실적인 노력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가령, 선교사의 꿈이 있다면 어학공부라는 실천적 작업에도 소홀하면 안 된다고 일깨우고 있다. 댓가의 중요성에 대한 치열한 인식이 바로 서있지 않아서 교회는 그 꿈과 비전이 제시되는 만큼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것을 전 목사는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 댓가 위에서 교회는 부흥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댓가의 중요성에만 몰두하면 '은혜'에 소홀하기 쉽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은혜에 충만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상황은 놀랍게 변화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은혜란 되는 사람에게 주는 것, 능력 있는 사람에게 기회와 조건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규정한 그는 이 은혜의 세계관과 달리 정의의 원리에 집착할 경우 생기는 문제를 제기한다.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장발장을 뒤쫓는 자베르 경감은 "한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이다, 전과자는 변화될 수 없다"는 식으로 정의의 원리로 똘똘 뭉친 반면에, 장발장의 난처한 처지를 구해준 신부는 그에게 은혜의 원리를 일깨웠다고 갈파하고 있다.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이 그러한 경지를 보여준다면, 알렉산더 뒤마의 작품 <몬테 크리스트 백작>은 권선징악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정의의 원리로 되어 있으나 은혜의 차원으로 나가지는 못했다고 지적한다.

이어, 은혜로운 교회의 특징을 보자면, 십자가 외에는 길이 없다는 것을 철두철미 인식하고 있는 교회, 그로써 참다운 변화가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회라는 점을 강조한 그는 이 체험이 오늘날 교회에게 신앙적 돌파구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이 은혜의 풍성함 속에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돈을 바치는 일부터 시작하는 충성된 헌신이 이루어질 때에 영혼을 살리는 일이 이루어짐을 설파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자세를 분명하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롭고 귀중한 일꾼들로 청년들이 성장하기를 바란다는 말로 그의 두 번째 강좌는 끝을 맺고 있다.  

이렇게 대강의 내용만 정리해놓고 보면 그의 강좌가 얼핏 큰 무리가 없는 내용으로 전개되는 듯 하다. 꿈과 비전도 좋고, 그것을 위한 댓가를 치르는 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힘있게 변화하는 것이 모든 신앙생활의 기초라는 메시지는 제대로만 그 내용이 채워지면 훌륭한 메시지가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강좌를 구체적으로 분석해 들어가면 우리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들과 만나게 된다.



(3) 문제발언들 내지는 잘못된 사례들

그의 메시지가 담고 있는 신학적 문제점들을 거론하기 전에 먼저 그의 강좌에서 듣게 되는 문제발언들과 잘못된 사례들을 몇 가지 추려보겠다. 앞뒤 전후를 잘라서 그 대목만 뽑아 논의하는 것은 전체적인 컨텍스트를 무시한 해석이 되기 쉬운 위험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전 목사의 강좌가 담고 있는 전체적인 내용과 그 대략적 방향을 이미 전제하고 접근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컨텍스트가 어찌되었던 거론된 사례에 대한 전병욱 목사의 잘못된 이해를 하고 있고, 그 발언 자체로서도 매우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는 점을 또한 주목하게 되는 바이다.


A. 복권당첨과 새벽기도
그는 댓가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LA의 한 집회에 가서 경험한 예를 들고 있다. 식사 중 한 집사님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기를, '복권 당첨하게 해주십시오' 하면서 10년 동안 새벽기도에 열중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복권 당첨되게 해달라는 네 기도가 너무 유치하다. 그러나 10년을 하루같이 기도하니 내가 부담된다. 좀 고려 중인데, 한 가지 부탁 좀 하자. 복권 좀 사가면서 기도할 수 없니?" 이랬다는 것이다. 기도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복권 이야기가 나오니 다소 엉뚱한 내용이었지만, 그래도 그가 10년 동안 줄기차게 새벽기도라는 댓가를 치르면서 그의 꿈을 향해 살았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그는 이 이야기의 의미를 총평한다.  

우선, 복권 판매구조는 자본주의 사회의 명백한 사행술(邪行術)이다. 무수한 사람들의 허황된 욕구를 이용하여 한꺼번에 돈을 모아, 그것으로 무언가 왕창 일확천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게 만들 것처럼 만드는 이 복권의 존재는 교회가 이 사회에서 몰아내야 할 죄악이다. 복권 당첨은 성실한 삶을 좌절하게 하는 사탄의 덫이다. 너무나 절박한 현실 앞에서 복권에 꿈을 걸 수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들, 그에 대한 아픔이라면 몰라도 복권을 꿈으로 걸고 이를 위해 새벽기도를 하는 것을 '꿈에 대한 댓가의 예'로 드는 것은 따라서 신앙에 대한 철저한 모멸이다. 복권당첨을 기도제목으로 삼는 것은 유치한 것이 아니라 실로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이 "복권 좀 사가면서 기도할 수 없니?"라고 했다는 대목 또한 혹 우스개의 차원임을 인정한다 해도,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이기조차 하다.  

복권판매에 앞장서는 하나님? 기가 막힐 지경이다. 물론, 전병욱 목사 자신은 이 복권기도에 대하여 동의한 것은 아니다. 단지 복권 당첨에 대한 꿈을 가지고 새벽기도 10년을 했다는 그 정성에 감동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감동의 대상이 아니라, 치열하게 질타해야 할 모습이다.  그 내용만 다르지 실상은 각자 복권당첨을 바라면서 새벽기도 하는 교회,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진면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것을 꿈에 대한 댓가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하여 우리는 전병욱 목사가 말하는 꿈이 이런 식이 된다면, 그것은 '욕심을 포장한 단어'라는 점을 주시하게 된다. 기독교 신앙인에게 있어서 꿈의 실체를 감당하는 인간형은 복권당첨을 기원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그래서 물질의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인이다. 새벽기도에 열중하는 신실함은 중요하지만, 그 신실함이 엉뚱한 욕심을 위해 바쳐지는 행위가 되고 있다면 신앙의 이름 아래 한국교회는 세상의 논리와 대세, 풍조에 충실한 존재가 되어 가는 것을 직시해야 할 일이다.


B. 죽여버려야 할 동성연애자?
그는 은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예로 필립 얀씨가 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을 언급한다. 그 책은 대체로 좋지만, 중간에 동성애자들까지도 용납하는 것을 은혜라고 하고 있어서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 다음에 이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동성연애자는 죽여버려야지 그걸 왜 놔둡니까?" 우리의 언어 현실에서 "죽인다"라는 표현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놀랍도록 완벽하다"는 뜻으로 "끝내준다"와 대체되기도 하고, 사회적 매장이나 직장에서 "짤린다"거나 기타 정치적으로 제거한다, 신앙적으로 하나님 앞에 굴복한다 등등 그 문맥을 파악한 전제 위에서 뜻을 헤아려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여 "죽인다"는 것이 곧 "육신적인 살해"를 그대로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들을 강좌의 어법상 경박한 농담조로 <죽임의 대상>으로 몰아 부치는 그의 태도는 우려되지 않을 수 없는 태도이다. 여기서 동성애에 대한 동의와 반대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죽여버린다"는 식의 표현과 발언은 목회자로서도 적절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그 발언 자체가 폭력적인 방식이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C. 자베르 경감은 정의의 원리로 똘똘 뭉친 사람? 몬테크리스트 백작, 복수극?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빵 하나를 훔친 죄로 중형을 살아야 했던 봉건적 정치경제 구조에 묶였던 혁명 이전의 프랑스 사회의 비인간적 현실을 고발한 작품이다. 장발장은 바로 이러한 정의롭지 못한 구조에 희생된 인물이었고, 자베르 경감은 이 억압적인 체제의 하수인으로 등장하여 그러한 전근대적 불의를 정의라고 착각한 존재를 보여주고 있다. 장발장은 그 억압의 처절한 현실에서 희생되어 사회적 복수를 결의할 수 있는 조건에 놓여 있었으나, 인간의 문제, 역사의 문제는 그렇게 해결될 수 없음을 촛대를 훔쳤다가 그를 보호해준 신부의 말없는 일깨움 속에서 엄청난 인간적 변화의 실마리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는 가난하고 약한 이웃을 위해 자신을 헌신적으로 나누며 사는 존재로 성숙해간다. 이후 자베르 경감의 자살은 자신이 추구해온 것이 실상은 거짓 정의였으며, 그가 죄인으로 보아온 장발장의 삶과 인간 속에서 자신의 삶이 도리어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절감한 결과였다.  

프랑스 혁명의 역사적 현실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빅톨 위고는 혁명의 논리로도 인간의 존엄성을 해칠 수 없으며, 인간적 위대함이 보다 위대한 혁명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깨우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이 불굴의 고전이 될 수 있는 저력이며 따라서 자베르 경감의 정의란 사실 전근대적 체제의 억압이 위장된 것이었으며 이러한 위장된 정의로 인간이 얼마나 끔찍하게 희생될 수 있는가를 빅톨 위고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자, 그런데 전병욱 목사는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세계관, 즉 하나는 은혜의 세계관이며 다른 하나는 정의의 세계관"으로서 정의는 선하긴 하지만 인간을 근본에서 변화시키지 못한다면서 "자베르 경감은 정의의 원리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고 언급한다. 자베르 경감은 정의의 원리가 아니라, 빵 하나 훔친 것 이상의 죄를 짓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억압하는 지배층들의 하수인이 자기도 모르게 된 자라는 점을 우리는 주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자살이라는 선택으로 자신의 삶이 진 빚을 갚으려 했던 것이다. 전병욱 목사의 고전 읽기 실력은 이러한 점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가 과연 작품이나 제대로 읽고 말하는 것인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알렉산드리아 뒤마의 <몬테크리스트 백작>과 관련한 언급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몬테크리스트 백작은 '암굴왕'이라는 제목으로 소년소녀들이 읽기에 좋게 각색되기도 했는데, 그 주제는 전병욱 목사가 말하고 있듯이, 주인공 에드몬드 단테스가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자들을 오랜 수형생활의 탈옥 이후 차례차례 복수하는 것으로 '권선징악'을 이루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의 청춘을 파괴하고 그의 사랑마저 붕괴시켰던 존재들을 향해 복수의 칼을 날렸지만, 그것이 그의 삶을 되찾게 해준 것도 아니며 그 복수의 인연 사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애정과 혈연의 인연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인간현실 앞에서 결국 모든 욕심과 원한을 버리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으로 그의 작품은 끝난다.  

바로 여기에 뒤마의, 작가로서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며 그 작품이 고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에드몬드 단테스는 사랑 앞에서 모든 복수의 끈을 놓아버리고 무릎을 꿇는다. 이만큼 성서적 주제를 훌륭하게 다룬 작품이 있을까 싶을 내용을 전병욱 목사는 그의 무지로 권선징악 수준으로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전병욱 목사가 유독 청년들에게 공부를 강조하는데, 그 자신 고전에 대한 공부를 다시 할 수 있으면 한다.  


D. 작은 교회 집회는 좀 문제가 있으나, 큰 교회에서는 마음이 편해
그는 자신의 발언이 듣는 사람에게 상처를 줄 소지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독자 여러분들이 우선 직접 판단해보시라.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리면 상처 입는 사람들 있을지 모르지만 솔직한 이야기인데, 너무 작은 교회의 집회는 제가 잘 안 갑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적기 때문에 안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가서 설교를 하면 상처를 받아요. 약이 오르는가 봐요. 설교를 하다보면 우리 교회 부흥한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는데 그런 얘기를 해도 상처를 받아요. 우리 교인 몇 명이다 하면 상처를 받아요. 그런 얘기 왜 하냐 그러고, 내가 무슨 책을 읽었다 하면 그래 너 혼자 책 많이 읽었다 그러고, 그때 제가 느낀 것은 너무 은혜가 없는 사람하고 얘기를 하니까 상대가 안돼요. 맨날 상처예요, 맨날 상처. 반면에 소위 큰 교회 부흥하는 교회에 가면 제가 집회를 할 때 편안합니다. 그런 교회는 무슨 소리를 해도 다 받아줘요. 아유, 젊은 놈이 잘 놀고 있군, 그러니까 여유만만이예요. 그래서 제가 또 하나 깨달은 것이 뭐냐면? "아, 이래서 은혜가 필요하구나." 여러분, 우리가 왜 노처녀 옆에 가기를 두려워하죠? 은혜가 없기 때문에 옆에 가면 맞아 죽어요." 이거 그냥 웃고 넘겨야 하는 것일까?

만일 작은 교회가 수에 의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 열등감을 헤아려 수의 작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 믿음과 복음 안에서 바로 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원칙이라는 점을 강조해 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혹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겸손한 자세를 취하지 않아서 생기는 반감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 평가는 기자의 주관적 주장이나 추측에 그칠 뿐이다. 문제는 그가 작은 교회는 은혜가 없다고 자기도 모르게 단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은 교회는 수에 대한 열등감과 경쟁주의적 비교의식과 시기심에 찌들어 있는 듯이 여기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큰 교회는 은혜가 있다는 식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수로나 물질로나 넉넉하고 크니까 무슨 소리를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이 수치스러운 성장주의의 반(反)복음성을 그는 알고 있는 것일까? 또한 은혜를 이야기하면서 은혜없는 사람과는 상대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는 모순이다. 그리고 이건 또 뭔가? 노처녀는 은혜가 없는 존재라니? 웃자고 한 이야기일지라도 적어도 목회자의 말이라면 그 안에는 인간에 대한 모독이 없어야 한다. 작고 약한 교회들의 고뇌, 노처녀들의 답답한 삶, 그에 다가가는 마음의 정성스러움과 따뜻함을 그는 보이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 것인지 심히 염려되는 바이다.


E. 여러분 1억을 바칠까요? 팔 하나를 자를까요?
전병욱 목사는 돈으로 바치는 헌금이 헌신의 기초라고 강조한다. 그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는 것인지 모르나, "성경은 헌금에 대해서 헌신의 기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요한복음 12장의 막달라 마리아가 옥합을 깬 장면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  

"잔치를 성경 전체를 놓고 보면 가나안의 혼인잔치 같은 경우는 혼인할 때 예수님을 부른 거죠.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어 준 것은 이 장면이 처음이예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고귀한 향유를 부어 주었습니다. 300데나리온 짜리를 박살을 내서 콸콸콸 붓지 않습니까? 1데나리온이 일당이니까 일당 한 5만원 잡으면 천오백만원 짜리를 깨서 콸콸콸 붓자 그러자 옆에 있던 가롯 유다가 그 향유 아깝다,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지 라고 말합니다. 꼭 은혜를 모르는 녀석들은 이따위 소리를 한다고요. 한번 생각을 해봐요. 여러분들이 일곱귀신 들렸고, 결손가정에다 창기였는데, 그것을 다 회복시켜줬어요. 천오백만원짜리 그것 하나 못 깨서 회복 못시켜 줘요? 그걸 못 붑니까? 저는 은혜받은 사람의 증거중의 하나가 헌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생각할 때 드릴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것 중에 제일 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돈입니다. 돈. 돈 바치는 게 뭐가 힘들어요? 여러분, 1억을 바칠까요? 팔 하나를 자를까요? 뭘 하시겠습니까? 1억이요. 있으면 1억이 아니라 10억도 주죠. 팔을 왜 잘라요? 1억을 바칠래 네 딸을 바칠래? 하면 무엇을 바칠까요? 1억을 바치죠. 생각만 해도 귀중하고 가슴이 뭉클한 딸을 어떻게 바쳐요. 생각해 보라고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제일 드리기 쉬운 것이 뭐예요? 돈이죠, 돈. 그래서 성경은 헌금에 대해서 헌신의 기초라고 생각합니다."

이러면서 이어지는 헌신의 목표를 그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사역 감당에 도움이 필요한데 문제는 돈이라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뭔지 아십니까? 돈이 없답니다. 6억이 없어서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사용하라고 주신 것 아닙니까? 목요일날 헌금하겠습니다. 여기 만명이 모였다고 하는데 돈 없는 사람 있다는 거 다 알아요. 만원만 헌금하십시오. 1억이 나옵니다. 여기 장년들 많지 않습니까? 100만원씩만 헌금하십시오. 돈 뒀다 다 뭐할 거예요. 1억 나와요. 그리고 4억은 판매해서 만듭니다……죽어가는 영혼들이 있는데 1억만 쓰면 만명이 주님께 돌아오는데, 10억을 쓰면 10만명이 주님께 돌아오는데 그거 안 하겠습니까?" 그리고는 하나님을 위한 귀한 종들이 되기를 바란다면서 그의 강좌를 마치고 있다.

독자 여러분들은 위의 인용문을 읽고 어떤 생각이 드시는가? 하나님이 공갈단 두목에다가, 교회집회가 무슨 공갈단 집회인가? "팔 짤릴래, 돈 내 놓을래? 네 딸 데려갈까, 돈 내 놓을래?" 그렇게 협박성 비교를 하게 해놓고, 그러면 그렇지 돈 내놓는 것이 아무래도 계산이 맞지? 하는 식의 윽박지름이 과연 은혜를 구하는 자세요, 그에 따른 헌신의 결단인가? 전병욱 목사는 자신의 말이, 돈 내놓지 않았다가는 무슨 궁지에 몰릴 일을 당할지 모를 것이라는 은근한 협박성 공갈이라는 오해를 과연 피할 수 있을까?  

한국교회의 타락과 물질주의, 그리고 과도한 헌금강요가 바로 이러한 심리적 구조를 기반으로 하여 교인들을 압박해가고 있으며, 그로써 이들에게 신앙의 기쁨과 자유를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기나 할까? 그리고 이 세상에는 무한한 은혜를 그의 삶 속에 충만히 경험했어도 헌금할 사정이 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무모한 헌금의 강요로 죄책감을 심어주고 그로써 교회를 살찌우고 목회자를 살찌우는 이른바 교회 지도자들의 무리 속에 전도양양한 젊디젊은 그가 벌써부터 가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강조한 헌신, 그리고 헌금의 목적이 전도와 선교에 있는 것이라고 변호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선교관은 실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1억만 쓰면 만명이, 10억만 쓰면 10만명이 주님께 돌아온다? 아, 나사렛 예수께서 진실로 이렇게 우리들에게 가르치셨다는 말인가? 인간의 영혼을 돈과 수치로 재서, 선교전략을 세우고 밀고 나가는 방식은 예수님의 가르침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자본주의적 계산방식이자 세상의 물질주의적 지표에 휘둘리는 첩경이다.

사도 바울도 그의 선교 여행 중에 교회들의 헌금을 통한 재정적 지원이 필요했다. 하여 우리는 선교와 전도라는 목표를 위해 물질적 지원이 필요치 않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명의 구원을 위해 1억이라는 계산을 하고, 이를 산술적으로 확장하여 그 십배의 돈은 십배의 인간을 구원할 능력을 보장한다는 전병욱 목사의 사고방식이 우리의 우려대상이다. 선교사역에 "6억이 없어서 못한다"는 식의 발언은, 세상의 권세와 재력의 힘을 뛰어넘는 성령의 역사를 모독하는 것이자 선교와 전도의 결정적 역량을 돈에서 찾는 자세이다. 복음의 전도는 내놓을 금과 은이 없어도 예수의 이름 하나 믿고 나서는 성령의 역사에 합류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사건이다. 하여, 그는 이 성령의 역사에 뜨겁게 나서는 마음을 무엇보다도 강조하여 이것이 충만해진 헌신이라면 그것이 돈이 되었던 그 무엇이 되었든 귀중한 것임을 격려하고 그로써 이루어질 하나님의 사건에 대한 감사에 찬 기대와 소망을 전파해야 하는 것이다.      



(4) 신학적 오류

더 많은 지적이 요구되지만 이 정도로 하고, 이제 마지막으로 그의 강좌 전체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오류와 불투명성의 문제를 정리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도록 하겠다.  

우선, 첫째, 그는 강좌의 본문으로 디도서 1장 10절에서 16절까지를 선택하고 있지만, 기이하게도 본문에 대한 해설은 전혀 없는 강좌로 진행했다. 디도서 본문은 사도 바울이 디도를 크레타 섬에 남겨두고 그 선교사역의 과제를 정리해주는 대목으로 등장하는 내용이다. 자신의 제자 청년 디도에게 교회 지도자들을 바로 세우고, 온갖 논란과 방해, 그리고 위선이 팽배한 곳에서 복음의 순결을 지켜내는 일의 어려움을 일깨우는 동시에, 고난과 박해를 견뎌내면서 사도의 임무를 완성하라는 격려에 찬 기원문이 이 디도서의 본질이다.

따라서 이 디도서의 정신에 따르자면 그는 복음의 진리대로 사는 것이 세상풍조와 대립되는 일이지만, 굳건히 견디면서 그 어떤 고난과 박해가 온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말고 온유함과 말씀의 능력을 잃지 말라는 일깨움이 기독청년들에게 힘차게 불어넣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강좌는 이 디도서의 본질적 메시지와는 전혀 관련 없이 전개되었음을 우리는 본다. 이것은 그가 안타깝지만, 성서적 기초가 약한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꿈과 비전에 대한 명확한 성서적 규정이 그에게는 없다. 돈과 권력과 기타 사회적 지위 등이 힘을 쓰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뜻이 이 세상에 실현될 수 있도록 간절히 자신을 헌신하는 기독청년의 기백과 정의감, 그리고 열정에 대한 메시지가 그의 강좌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난하고 약한 이들이 온갖 모멸과 비인간적 처우를 받아가면서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청년다운 양심적 각성과, "세상의 작은 이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뒤좇는 제자들로서의 결단이 그의 메시지에는 흔적조차 없다. 그는 기독청년들에게 꿈과 비전을 주는 교회 지도자로서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셋째, 아무리 새겨들어도 그의 강좌에는 은혜의 성서적 본질에 대한 바른 이해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은혜에 대한 규정은 다음과 같은 대목에 등장한다. 포도원 비유를 거론하면서, "은혜는 처음 오든지 마지막에 오든지 다 똑같이 주는 것이 은혜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그 다음에 미국의 현실을 예로 들면서, "퀄리티(quality) 있는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라는 앞뒤가 맞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은혜는 능력이 없는 자에게조차 주어져서 그가 능력이 있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점을 그는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  

인과응보, 공평의 원리가 아니라 능력 우선이 은혜라는 것인데, 그 예를 또 미국의 그린스펀 연방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들고 있다. 그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에게 일을 맡기고 있는데 이것이 은혜의 원리라는 것이다. 이런 해괴하기는. 포도원 비유는 능력위주와 성과위주의 세상논리를 철저하게 배격하면서, 뒤늦게 온 일꾼의 삶의 현실에도 같은 한 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한 정황이 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일깨워주는 이야기이다. 순서의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이 비유의 초점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대한 하나님의 공평하신 마음씀이 이 비유에 담겨 있는 그 사랑의 깊이를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능력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축복,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특징이다. 은혜란 본질적으로 우리의 능력에 의한 획득이나 성취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의 보기들은 모두 은혜의 의미를 예증하는 보기로는 잘못 선택된 것이다. 전병욱 목사는 은혜를 강조하면서, 능력주의, 성취주의, 엘리트주의로 빠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감당할 만한 자격이나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시기 위해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의 능력과 힘을 부어주셔서 완성의 길로 향해 가도록 도와주신다. 이것이 은혜에 대한 우리의 감격이 우러나오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 은혜란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목숨 그 생명 전체를 십자가에 걸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에 놀랍고 감사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는 생명을 건 약속과, 그 생명의 무게가 실려 있는 것이다. 죽음의 자리에서 무너지지 아니한 하나님의 생명, 그 축복의 능력, 바로 이것을 믿기에 우리는 압도적인 세상의 힘과 권세, 그리고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지 아니하며 얼핏 약하고 당장에 답이 아닌 듯 하지만 오로지 하나님의 은사에 기대어 이 거칠고 악한 세파를 이겨내는 선한 능력을 끈질기게 길러나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 까닭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헤아림을 넘어 우리가 감당치 못할 바까지 감당하도록 해주셔서 마침내 당도해야 할 땅에 당도하도록 해주시기 때문인 것이다. 청년들이여, 잠시 세상의 힘에 압도되기도 하고 유혹에 넘어가기도 할 수 있겠으나,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가 비록 부족하고 능력 없으나, 그 은혜의 능력을 확고히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선한 능력을 부어주셔서 세상이 구할 수 없는 능력과 힘을 주실 것이다. 이를 믿고, 굳건히 믿음의 길로 나서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귀한 축복이 충만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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