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 형제의 빈소에서

저는 오늘 오후 아내와 아이 둘과 함께 부산의료원 고 김선일 형제 빈소를 다녀왔습니다. 월요일부터 시험기간이라고 투덜대는 아이들이었지만 기어코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집안일에 뒤밀려 늦은 밤이지만 어제부터 마음 먹은 글을 적어봅니다.

지난 24일 서울서 가진 우리 '한국연합교회' 준비모임을 마치고 25일 오후 무궁화열차로 부산을 내려오는 중이었습니다. 전국 목정평 사무국으로부터 긴급히 연락을 받고 곧바로 고 김선일 씨의 빈소가 있는 부산의료원을 찾았습니다. 제가 오후 6시경 도착하니 조금 전 부산지역 사회시민단체 대표자들 12~3명과, 손님으로 오신 서울지역 '파병반대 범국민 촛불대회' 지도자 5~6명이 도착하여 조우를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공동으로 조문을 한 후 빈소 옆으로 돌아 노조사무실로 옮겼고, 조금 후 도착한 유족대표와 대면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족대표는 고 김선일 씨의 형님 되는 '장' 아무개 라는 전도사님이었는데, 검정 양복에 완장과 흰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와 인사를 나눈 장 전도사님은 춘천에서 모 교회(성서침례교단) 교역자로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대표는 고인의 안타까운 죽음에 온 국민을 대표해 애도를 표한다고 말하고, 이곳을 찾은 이유는 향후 일정 등을 유족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보수기독교가 말하는 죽음의 미화작업 '순교'

내용의 요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지금 속속 드러나고 있는 고 김선일 씨 참수 전후 진상의 은폐의혹에 대한 전면 '진상 규명문제'에 대한 대책이고 둘째, 장례를 '국민장'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여부 문제를 의논하려는 것이며 셋째, 향후 '보상문제' 등에 대한 대처의 문제였습니다.

장 전도사님은 비보를 듣고 내려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으나, 우선 선일이가 신학교를 나올 수 있도록 도운 안락동 모 교회의 목사님을 찾으려 노력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차선으로 선일이가 이라크 현지 교회를 출석하며 봉사했던 교회의 목사님이 서울 온누리교회의 파송한 선교사였다 하여 연락했지만 자세한 의논은 못했으나 지금 내려오시는 걸로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장 전도사님은 자신의 형님같이 지내는 목사님(성서침례교단)이 있어서 의논을 했고, 어느 정도 장례일정 등을 마련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장 전도사님의 비교적 자세한 경위 설명을 듣고 난 후, 몇 명이 각각 고 김선일 씨의 죽음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와 국민적 관심과 애도 등을 담아 낼 '국민장'과 함께 '진상규명의 대책위'를 꾸려야 한다고 호소하였습니다. 장 전도사님은 A4용지 위에 무언가 열심히 우리의 이야기를 메모하면서 침착한 자세를 유지했고, 그간 여러 단체가 와서 다양한 입장과 요구를 해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구체적이고 간결한 정리를 적어서 달라 했다고 했습니다.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순교자'?

잠시 헤어진 뒤 우리는 장례준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보수 기독단체의 실무 일을 보고 있는 한 두 명을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부산 NCC 권 목사님 3명과 고 김선일 씨를 가르쳤던 부산신학대학 김 아무개 교수님 등 4명을 세워 기독교적인 정서로 대화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2차 만남에는 장 전도사님 대신 부산기윤실 전 실무자였던 박 아무개 목사님과 반송지역에서 목회 한다는 이 아무개 목사님과(성서침례교단) 대화를 재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협의를 하는 중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이미 부산지역 보수 기독교단체 깊이 개입해 어느 정도 장례일정의 밑그림을 그려놓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1부 순서로 '찬양'과 2부에는 '발인예배' 3부에 '추모행사'로서 잡힌 문건을 보여주며 우리의 요구가 3부 추모행사에 해당되는 것이니 구체적인 내용은 이 자리에서 당장 정리할 입장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고 김선일 씨를 파병반대나 정치적 이용물에 내주지 않고, 순수하게 선교를 위하여 죽음의 자리에서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순교자'라는 점에만 장례의 초점을 맞출 뿐 일체 우리의 접근을 경계하였습니다. 김 교수님의 에큐메니칼 건학 이념의 설명과 학교측의 추모행사 소개도 효력이 없었습니다. 대화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고인의 엄연한 유언이 속속 비디오 테입과 이메일 등으로 밝혀지고 있음에도, 우리의 제안을 불순한 의도로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 불순함이란, 우선 '순교자'의 빛을 가리고 세속적 '희생자'로만 세계에 드러난다는 것이고, 파병반대나 한미관계 등 분명한 양대 세력에게 이용물로 내 줄 수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미 보수적인 기독교세력에 의해 먼저 선점 당한 뒤의 우리의 설득은 씨가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장시간 마라톤협상은 이어졌고 극적인 타결점을 찾아 노력하였습니다. 저도 거기에 끼어 협상에 임했는데, 1부 장례예배는 이른바 '순교'에 초점을 맞춰 하시되, 2부는 '국민장'으로 떼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따로 준비위원회 조직을 갖고 장소도 부산지역에서는 하되 달리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이 안은 어느 정도 합의 가능성을 남기고 곧 도착한다는 서울 온누리교회 관계자가 오면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2차 협상은 밤 12시경에 마쳤습니다. 고 김선일 씨의 시신이 이라크에서 25일 저녁시간으로 부산까지 도착될 예정이기 때문에, 시간을 다투는 긴장과 긴박감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온누리교회 측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우리는 3차 협상에 나섰습니다. 이번에도 서울서 오신 손님들은 자진 나서지 않기로 하고 부산 NCC 목사님 두 분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예상보다 긴 협상시간을 불안하게 기다리면서 될 거라니 안 될 거라니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이윽고 새벽 1시경 우리 측 한 실무자가 들어오더니 이와 같은 큰 구도는 합의가 되었다고 전해 왔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YTN, KBS, 10여명의 사진기자들이 모여들었고 협상장에 우리가 함께 발표하려고 입장하자, 놀랍게도 유족 및 이른바 '순교장례 준비측'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당황한 표정으로 흥분하면서 기자들과 카메라들을 물리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잠시 후 방송사 및 신문 기자들은 모두 철수해 버렸고 우리는 어쩔 수없이 독자적인 준비로 해야한다는 긴급회의를 하고 매듭을 짓고 있었습니다.

김선일의 죽음은 전쟁 세력의 희생자

고 김선일은 죽음의 공포와 고독의 한 가운데 서서 우리 고국과 국민을 향해 절규하며 살려달라 외쳤건만… 제발 이라크에서 철수하고 더 이상의 파병은 안 된다고 노 대통령에게 실수했다며 간절히 호소했건만….

이게 웬 말입니까! 그들은 '장렬한 순교'라고, 이교의 나라 이라크의 선교의 문을 열게 한 영광과 승리의 메시지며, 이라크 구원을 위한 한 알의 밀알이라고 합니다. 또 한편은 우주보다 존엄한 한 생명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국익과 세계평화를 내세우며 전쟁을 정당화하는 세력에 의한 희생자요, 역사적 한 알의 밀알이라 합니다. 혹 어떤 이는 양시론이나 양비론을 내세우며 둘 다에 의미를 인정한다든지 아니면 둘 다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데 이용하려는 술수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과거행적이 아닌 '죽음'에 초점을 맞춰라 

그런데 선교를 내세우는 점령군이나 평화를 내세운 점령군은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선교'라는 것과 '평화'라는 말 이면에 숨은 의미를 살펴보면, 당사자(희생당하는 이라크 국민이나 김선일 씨 같은 외국인)의 절절한 요구와 희망은 외면당한 채, 관념적이거나 이념적인 명분만을 내세운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살아있던 김선일 씨가 무엇을 그토록 바랐으며, 이라크의 국민들이 어떤 것을 진정 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8시간의 협상 과정에 참여하며 두 눈으로 생생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협상의 한편에서 협상의 성공을 이끌기 위해 상대편의 '순교론'도 생각 없이 긍정해 주면서 '국민장' 요청도 받아들여지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경과하면서, 특히 주일설교를 구상하고 깊이 생각하면서 이른바 선교를 위한 '순교'에 초점을 맞춘 분들이 얼마나 왜곡된 뜻으로 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김선일 씨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토록 절규했던 생생한 말과 글이 남아 있는데, 그들은 그 사실보다 고 김선일 씨의 과거 생각과 행적에만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선일 씨가 고등학교 때부터 선교사의 꿈을 가지고 기도했으며, 시종 일관 그 뜻을 품고 신학교에 갔고 이라크에 준비과정으로 들어갔다는 점을 애써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지 교회 목사도 위험한 상황에서 철수했으나 그만 죽음의 자리를 지켰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온통 평화와 전쟁 담론 속에 서로 김선일을 끌어들여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고 하며, 선교와 순교의 거룩한 뜻을 드높이 살리는 것이 지금의 해야 할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 정말 이렇게 고 김선일 씨의 죽음은 역사에 남아야 하는가?

정말 가슴 아프고 애통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바짝 다가와 협조를 아끼지 않는 부산시 공무원이 예사롭지 않더니, 연일 정부의 아낌없는 보상약속 보도도 못내 제 마음을 심난하게 합니다. 부산의 달동네 안창마을 7~8평 가난한 한 가정과, 다소 복잡한 형제들 관계가 자꾸 마음에 걸리는 건 왜 그런지 모를 일입니다.

2004.6. 27 밤 김홍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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