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랴가 천사에게 말하였다. "어떻게 그것을 알겠습니까? 나는 늙은 사람이요, 내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 말입니다."(눅 1: 18)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기를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눅1: 34)

"예수는 사생아다". 대단한 선언입니다. 수십 억의 인구가 우러르고 떠받드는 존재를 쉰밥 내버리듯, 경멸 섞인 어조로 쓰레기통 속에 처박다니...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울분을 터트렸을까요? 이 말을 들으며 통쾌해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불어 광신적인 기독교인들의 테러 위협조차 감수하며 소신 내지는 진실을 밝히려는 순교자적 행동이라며 찬탄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겠지요.

이러한 선언을 한 사람의 심중에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학자적 양심이나 진실에 대한 열정만으로 그리한 것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도발적 선언을 하게끔 한 동력으로서, 기독교에 대한 분노(악을 정죄하기만 하고 해결하지도 못하며 오히려 악을 자행하는 종교에 대한 정죄)와 자신의 인식에 대한 두려움(자신의 지식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심중 깊은 곳에 숨어있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듭니다.

분노라 함은 하나님의 존재라는 것이,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과 고통을 바라볼 때 도무지 용납되어질 수 없다는 나름대로의 도덕적 의식에 근거한 감정을 의미합니다. 단순화하자면 하나님이 정녕 있다면 어째서 이 세상의 불의를 해결하지 않는가, 선과 의를 명령하는 자로서 직무유기가 아닌가, 과연 그는 선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그런 하나님이라면 욕먹어도 싸다, 식의 논리가 가능합니다.

두려움이라 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숱한 인간들이 믿고 있으며, 게 중에는 특별한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고백들이 있으니, 혹시 하나님의 존재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의식이 그를 망령처럼 사로잡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일상성을 벗어난 특이한 사건 - 흔히 기적이라고 불리는 - 을 증거로 내세우는 인간들에게서 느끼는 막연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대응기제로서, 그 특이한 사건이라는 것이 날조에 불과하다는 진단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요셉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라면 요셉과 마리아의 결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문제는 요셉이, 다른 남자의 씨를 가진 부정한 여인이지만 그래도 혼인을 해야 하겠다고 결심할 만큼 마리아가 어떤 매력(엄청난 부나 미모나 혹은 명성)을 가진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런 여자하고라도 결혼을 해야 할 만큼 사회적으로 소외된 신분의 사람이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정혼을 했다는 것은 양쪽 집안에 의해 정식으로 혼인의 절차를 밟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다가다 술집에서 눈이 맞아 그 길로 살림을 차리는 식의 행태를 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수라는 뚜렷한 직업을 가진 그가, 자신과 정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도 결혼한다는 것이, 처녀성이라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시 여겼던 사회에서 과연 가능할까요? 더구나 요즘처럼 이웃도 잘 모르고 지내는 도시의 떠돌이 이방인 사회라면 모를까, 이웃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조차 다 꿰뚫고 있었을 시골의 붙박이 친족 사회에서 말입니다.

예수가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기사를 믿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요셉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밴 마리아와 결혼한 것으로 보고 예수를 사생아로 단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요셉과 마리아가 정식으로 혼인하기 전 미리 관계를 갖고 임신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시대적 정황에 비추어 보다 현실성 있고 합리적인 추측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가 사생아다'라는 선언 자체에 흥분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살펴야 할 문제의 핵심은, 동정녀 탄생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믿음에 있습니다. 그 믿음의 정당성은 바로 과학이라는 권위에 의해 뒷받침되어진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동정녀 탄생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 선언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 탄생 기사가 과학을 모르던 미개한 사회에서나 통용되는 헛된 신화에 불과하다는 비아냥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지적 발달이 미숙한 사람들에게나 먹혀 들어갈 얘기라는 것이지요. 현대의 과학적 지식을 교육받은 사람에게는 씨가 먹히지 않을 허황된 주장이라는 말입니다.

좀더 정확히 언급하자면 인간이라는 개체에게서 단성생식(암컷과 수컷의 수정 없이 단독으로 새로운 개체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과학이 내린 처방입니다. 물론 자연계에는 암컷과 수컷의 수정이라는 과정 없이 새로운 개체를 생산하는 생명체가 여럿 있지만, 인간은 그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말합니다. "과학적인 것은 현실적이며 현실적인 것은 과학적이다". 정말 과학은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현실을 다 설명해줍니까?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은 모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까?

무당이 작두 타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날카로운 날 위로 사뿐사뿐 옮겨 다니는 무당의 모습을 과학은 어떻게 설명할까요? 무당이 작두 타는 순간, 그 무게가 저울로 측정되지 않다는 것은 무얼 의미할까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현실에서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우리가 지금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근대 서구에서 시작된 세계관입니다. 그 과학이 말하는 법칙이라는 것은 한정된 시각에서 얻어진 성과물일 뿐입니다. 물질, 다시 말해 일상적 감각을 통해 측정하고 수치화할 수 있는 것만을 믿겠다는 신념 하에서 세워진 건축물입니다. 따라서 일상적 감각으로 파악되지 않는 것이나 어떤 개인에게만 혹은 특수 상황에서 일회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과학이 말하는 법칙에는 예외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동양에서 말하는 기라는 것을 서양과학의 개념을 통해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가 없습니까? 동양의 학자들은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라는 것은 서양의 과학과는 다른 시각으로 이 세계를 이해하는 또 다른 과학(학문)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서구의 과학에 의하면 손가락은 오직 통각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각, 즉 글자를 보는 것은 눈의 기능입니다. 손가락으로 글씨를 읽는다고 하면 아마도 서양 과학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손으로 글을 읽는 사람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동양학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현실 세계에는 일어난다는 것을 서양의 과학도 시인을 해야 합니다. 서양의 과학은 모든 것을 다 파악할 수 있는 전지전능의 도구가 아닙니다. 세계를 파악하는 도구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건을 다 진단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어떤 특수한 조건이 조성됨으로써 가능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를 비과학적이라고 비난하지는 마십시오. 누구보다도 과학을 신봉하는 진화론자들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어떤 특수한 조건, 환경만 조성되면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생성되고, 또 다른 특수한 조건과 환경만 조성되면 그 유기물에서 다시 세포가 생성되고, 계속 이어지는 또 다른 환경과 조건의 조성을 통해 마침내는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물론 그들은 그런 환경과 조건들이 어쩌다 보니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겠지만, 저는 단호히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그때마다 그런 특수한 환경과 조건들을 만든다는 말입니까? 무기물에서 유기물을 생성하는 실험을 하기 위해 특별한 교육을 받은 전문가가 특수한 실험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우연이 아닌 계획된 시도를 끝도 없이 해대야 하는 상황에서, 저 자연 속에 우연히 그런 조건과 환경이 착착 필요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가정을 그리 쉽게 해도 되는 것인지 저는 이해가 잘 안 갑니다.

누구나 사가랴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해요. 저와 제 아내는 이미 출산을 할 수 없을 만큼 늙었습니다." 또 마리아처럼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그 일이 이루어질까요? 저는 남자를 모르는데...하지만 주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리 될 것입니다." 어찌 고백하든 주의 뜻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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