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전교회 이상금 목사의 12년 오지목회

충북 청원군 문의면 소전1구. 대청호를 굽이돌아 산자락을 끼고 한참을 들어가면 영화 속에나 봄직한 산골 마을이 펼쳐진다. 가지가 꺾일 듯 은행 알맹이들이 매달린 노란 은행나무, 당장 뛰어 올라 가지를 흔들면 주렁주렁 달린 감들이 후두둑 떨어질 것 같은 감나무, 소전리는 그렇게 깊은 산골에 홀로 떨어진 세상의 섬 같은 땅이다.

거기 봉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 저쪽 마을이 있고, 전부 합해야 60호 가옥에 100명 남짓한 주민들이 살고 있다. 소전교회는 소전리에서 하나 뿐인 교회다. 100명의 주민들을 위해 30년 세월을 존재해 온 셈이다. 물론 모든 교회는 그 교회가 터잡고 있는 지역을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고 모든 교회가 주민들로부터 사랑 받는 건 아니다. 더 심하게 왕따가 돼버린 교회들도 적지 않다. 소전교회도 한 때는 그랬다. 특히 이상금 목사(63세)가 오기 전에는.

무속신앙이 생활이던 소전리 사람들에게 교회는 일종의 이방이었다. 교회 종소리가 들리면 한번쯤은 교회를 향해 욕설이라도 질러대야 속이 풀리던 사람들이다. 새해가 시작되면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는 온 동네가 굿으로 시끌벅적했다. 얼마 전까지도 그랬다. 이곳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한결 같이 소전리는 이방의 선교지나 다름없는 곳이라 불렀다.

남자 목회자들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6개월 있으면 오래 머무른 걸로 쳐줬다. 여기 홀몸의 여자 전도사가 부임했다. 역시 교회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목사는 종소리를 멈췄다. 그게 도리어 주님 뜻이라 여겼다. 답답한 마음에 목놓아 기도라도 하면 역시 거센 항의가 들어왔다. 술에 취한 이웃 남자가 손찌검까지 해 입원도 했다. 처음 부임할 때 친구 목회자들이 “거긴 안 된다”며 막을 때 차라리 들을 걸..., 후회도 했다. 밤을 새며 기도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 목사는 소전리를 떠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주민들과 하나가 돼야 했다.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에게 필요한 교회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루에 세 번 버스가 들어오는 이 외딴 산골에 이 목사의 낡은 승용차는 앰뷸런스가 되기도 하고 때론 택시가 될 수도 있었다. 주민들은 이제 환자가 생기거나 급히 밖으로 나갈 일이 생기면 교회로 전화를 한다. 그러면 이 목사가 ‘출동’해야 할 상황이 발생하는 셈이다.

농번기에 바쁜 사람들은 이 목사를 찾아서 소여물 주는 일도 부탁한다. 가끔은 집배원이 되어 편지를 전해주는 일도 이 목사 몫이다. 어버이날이면 이 목사는 경로잔치를 연다. 자신도 어디를 가든 노인 대접받을 나이지만 소전리에선 노인 축에도 끼지 못한다. 젊은이들은 모두 소전리를 떠나고 결국 노인들만 마을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새마을운동(?)’도 한다. 가령 이 목사가 지붕을 개량하면 마을 사람들은 따라한다. 우물을 길러다 먹어야 하는 그들에게 모터를 돌려 수도시설을 처음 한 것도 마을 사람들에겐 모델이 됐다. 무엇보다 6개월이면 떠날 줄 알았는데 12년을 함께 있으니 이젠 누구도 이 목사를 남 대하듯 않는다. 고맙다며 식사초대도 곧잘 한다. 이 목사가 목사로 안수받은 것도 주민들의 칭찬 때문이다. 이 목사가 소속한 노회로선 그가 여성이고 정규과정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자격을 갖춘 목사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하나됨’이 곧장 교회를 부풀리는 데까지는 연결되지 않는다. 좋은 건 좋은 거고, ‘예수쟁이’ 되는 건 또 다른 일이라 여긴다. 그래서 전도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말은 안 해도 주민들의 생각임을 잘 안다. 그래도 어른들이 10명씩이나 된 건 기적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라도 생기면 늘 찾아서 대화를 한다. 어쩔 수 없이 대화 속엔 전도 메시지가 담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 또한 적지 않다.

게다가 언젠가부터 그 요란하던 굿 풍습이 하나 둘 사라졌다. 무당들도 떠났다. 교회가 마땅히 있어야 할 이웃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교회 못 가서 미안혀” 하는 말이 이 목사를 만나 하는 인사말이 돼 버렸다. 가고 싶지만 못 간다는 의미다. 소전리를 아는 사람들은 여기까지 온 게 얼마나 큰 변화인지 잘 안다. 이제 주름이 완연히 패인 이 목사의 얼굴만큼이나.

몇 달 전 이 목사는 심하게 앓았다. 몇 주간 병원신세를 졌다. 사례비 20만원에 승용차 연료비 5만원이 수입의 전부인 이 목사로선 감당하기 불가능한 입원비가 나왔다. 다행히 주변에서 해결해줬다. 그러나 옆에서 이 목사를 지켜보는 이들은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니다. 또 그렇게 입원하거나 거동이 힘들게 되면 간호해 줄 사람도 없고 병원비는 또 어떻게 감당할 지 걱정스러운 게다.

이런 주위의 걱정을 의식한 듯 이 목사는 늘 같은 대답을 준다.
“혼자 사는데 사례비 많이 받아서 뭘 해요. 게다가 교회도 크게 키우지 못한 건 모두 내 책임인데 무슨 낯으로..., 이것도 고마운 따름이죠. 그리고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채우시지 않을까요? 가끔 엘리야를 생각해요. 까마귀까지 동원해서 엘리야를 돌보시던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에요. 그분께 인정받으면 결코 비참하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이렇게 보면 결코 홀몸이라 해서 내 장래를 걱정할 이유가 없지요.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기에 불안하시면 데려가면 그뿐이니까요. 고통 당하며 하나님께 누가 되도록은 안 만드실 것 아니에요? 그래서 내게 가장 큰 기도제목은 이 거에요. 맡기신 일이 끝나는 대로 곧장 하나님이 불러주십사 하는 거죠. 너무 큰 욕심인가요?”


<취재단상>

점퍼 차림의 이상금 목사. “이렇게 해서 사진을 찍어도 되나 몰라...”, 말하는 모습이 소녀 같다. 뭘 가득히 준비했다. 삶은 밤에 말린 대추, 볶은 은행, 푹 퍼진 연시, 따끈한 대추차. 이 목사의 정성이 느껴진다. 주민들을 전부 모았댔자 100명, 어느 목사의 독설을 빌자면 이 목사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목회를 12년째, 자신의 삶을 바쳐 해온 셈이다.

이 목사의 목회는 한계를 밀어부칠 수밖에 없는 ‘변방목회’다. 한국교회란 척박한 땅에서 여성 사역자란 시작부터가 그렇다. 이혼을 경험한 아픈 과거도 불리하면 불리하지 유리할 건 하나도 없다. 게다가 농촌목회, 아니 오지목회는 마치 실패를 ‘위한’ 목회처럼 인식되는 현실이다. 해외선교엔 아낌없이 재원을 쏟아붓지만 정작 바로 곁의 오지 목회자들에겐 후원도 인색한 풍토다. 그럼 이 목사는?

물론 말한다, “훌륭한 목사님이네요” 라고.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훌륭한 목사님’들은 모두들 누군가에 의해 가려져 있다. 훌륭한 것과 성공은 또 다른 얘길까? 고속도로로 들어서는 순간 조금 전까지 내가 있었던 곳이 어딘지 깜빡하고 말았다. 그렇게 가까운 곳에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땅이 있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다. 나는 거기에 다녀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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