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자가 인구(人口)에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으므로 중용(中庸)에 나오는 공자 할아버지의 말씀에서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가자.
"知者過之"(뭘 좀 안다는 자는 오버한다).

이성규 기자는 기독교권이 사회과학에 대한 지적 기반이 취약한 줄 알고 지자(知者) 특유의 오만함 가운데서 선을 넘는 면을 보이는 것 같다. 일반 운동권에서는 한물간 담론들을 기독교권에 끌어와 전가의 보도(寶刀)처럼 써먹으면서 순진한 크리스천들에게는 마치 굉장한 디스꾸르를 구사하고 있는 것처럼 분장하는 유치함을 보인다.

이성규 기자는 지금까지 자신의 텍스트를 아무도 문제삼지 못했음을 은근히 과시하면서 자신에 대한 텍스트 비판을 목마르게 사모하는 것 같다. 독자들의 침묵을 자신의 글쓰기 실력에 제압당한 것으로 오만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기자의 말을 들어보자.

"이 기획기사의 내용에 대하여 불만이 있는 경우 그 내용 자체에 대한 비판과 논쟁을 벌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 기사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못했던지..."
이 기자가 텍스트 비판을 너무나 간절히 사모하는 것 같기에 우선 지나간 몇 부분의 텍스트에서 텍스트 맞장뜨기를 시도하겠다.


이 기자는 해방신학의 편협성에서 벗어나라

이 기자는 '신앙이라는 깃발...성취욕'(1)에서 칼빈과 루터에 대해 평했다. 그런데 그 흐름에서 맑스적 계급 투쟁 논리를 수용한 해방신학적 관점을 보이고 있다. 이 기자의 글을 보자."그러나 바로 이 존 칼빈의 권위주의적 신학체계가 종교개혁의 불길이 민중적 차원에서 새롭게 생명력을 얻으려는 상황을 질식시켰다는 점을 안다면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없을 것이다......마틴 루터나 존 칼빈이 가톨릭의 억압적 위계질서에 항거한 시점에서는 그들의 지식과 신학은 개혁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당대의 신흥 정치경제 지배 세력과 손을 잡으면서부터는 개혁성보다는 또 하나의 억압적인 체계를 지향하기 시작했고, 봉건적 질곡 속에 있던 가난한 농민들의 아우성을 짓밟는 일을 정당화하는 일에 앞장서고 말았던 것이다.종교개혁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역사적 지식은 따라서 나사렛 예수께서 선포하셨듯이 가난한 민중들의 삶에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이루어지기보다는, 성서의 본래적인 정신이 이렇게 새로운 기득권 세력의 이념적 도구로 변질되어 간 과정에 대한 파악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만이 우리의 지식이 올바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기준과 내용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이 기자는 루터와 칼빈이 그때 당시 기득권 경제세력과 손을 잡고서 가난한 농민들의 아우성을 짓밟았다며 그들의 종교개혁가로서의 전체 업적을 도외시했다. 그들이 마치 정치적인 책략을 깔고서 그들의 지식으로 기득권 세력에게 봉사했던 것처럼 매도하는 것은 계급투쟁적 사관(史觀)에서 나오는 침소봉대적(針小棒大的) 종교개혁사 이해이다. 이 기자의 이런 지적을 종교개혁사학회에서 한번 개진해보라. 맑스의 학동(學童)이 하는 순진한 객담으로 알 것이다. 루터와 칼빈이 교회사 전반과 지성사에 던진 충격은 경천동지할 사건인 것이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저들의 엄청난 업적을 등한시하고 저들이 (오늘날의 가치기준인) 민중해방에 기여하지 못했다고 해서 저들을 기득권에 아부하고 예수 정신을 구현하지 못한 자들로 매도하는 것은 루터와 칼빈에 대한 모독이다.

루터와 칼빈에 대한 이 기자의 독서가 편식이었음을 지적하고 싶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차분히 완독하기를 바란다. 루터의 저작집을 좀 차분히 정독하기를 바란다. 러시아 공산혁명 후의 계급투쟁적 안목으로만 그들의 책을 읽지 말고 500년 전 그 시대로 들어가 좀 넓은 안목에서 읽어주기를 부탁한다. 그런 다음에 두 분에 대해 비판하기를 바란다. 이성규 기자는 루터와 칼빈이 그들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맑스와 레닌처럼 무산자와 농민을 위한 해방가가 되었다면 저들의 종교개혁을 성공했다고 평가하겠는가? 이 기자는 여기서 좌파 해방신학에 경도된 정체성을 드러내는 치명적 오류를 범했다.

이성규 기자는 좌파적 사회과학의 편향된 관점으로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가로서의 엄청난 업적을 등한시하고 외눈박이 시각으로 그들의 종교개혁을 실패한 것으로 매도하는 치졸함을 보인다. 나는 매카시즘으로 해방신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해방신학은 이미 세계 성경신학계에서 그 주경적 편협성과 그 해석학적 경박성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또한 이성규 기자는 해방신학적 예수 이해의 일단을 보이고 있다. 이 기자는 무슨 근거로 가난한 민중들에 편향된 예수 이해를 하는가? 이 기자 말대로 예수가 가난한 자에게만 편향해서 하나님 나라 정의를 전파했는가? 예수는 가난한 민중들의 편도 아니고 부자들 편도 아니다. 가난한 자든 부자든 저들의 회개를 촉구했다. 예수는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에 마음문을 여는 자들의 편이셨다. 예수를 계급적 파당성의 인물로 곡해하지 말라. 성경의 특정구절을 증폭시켜 '민중의 예수'로 각색시키는 해석학적 편협성에서 탈피하기 바란다. 이성규 기자가 그렇게 편애하는 민중들이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질렀던 자들임을 명심하라. 가난한 민중이든 부자이든 권력자이든 용서자 예수를 필요로 한다.

이제 이 기자와 이 기자의 글쓰기 후원세력의 모항(母港)이 어디인지를 만천하에 공개한 셈이다. 이제 뉴스앤조이도 이런 자유주의적 해방신학에 물든 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그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적어도 뉴스앤조이는 성경적-복음적 신앙의 공통분모를 지향하는 줄 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성공주의, 엘리트주의도 경계해야 하겠지만 계급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해방신학도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이 기자는 인문학의 기초를 잘 닦기를 바란다

내가 볼 때 이 기자는 인문학의 A, B, C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이 기자는 루터와 칼빈을 20세기 인물로 착각하는 것 같다. 저들이 맑스와 레닌과 모택동 이후의 인물들인 줄 알고 있다. 루터와 칼빈에게 20세기 인민 해방적 가치관을 요구하는 넌센스를 보인다. 그렇다면 다윗에게도 민주정치의 이상을 요구해야 하고 종을 거느렸던 아브라함에게도 노예해방의 가치관을 요구해야 한다. 현대 언어학의 기초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금언(今言)으로 고언(古言)을 해석하지 말라."(오늘의 언어로 옛날의 언어를 해석하지 말라)
즉, 공시태는 공시태로 파악해야지 통시태로 파악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금사(今思: 오늘날의 사상)로 고사(古思: 옛날의 사상)를 판단해서는" 더더욱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이성규 기자는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민중해방의 신학)를 준거틀로 삼아 500년 전의 루터와 칼빈을 난도질하는 인문학의 초보도 모르는 일을 감행했다.

이성규 기자도 21세기 조선 반도에서 사는 명백한 한계를 지닌 사람인데, 앞으로 600년 후에 태어날 뭣도 모르는 애송이 평자가 27세기의 가치관을 가지고 600년 전의 이 기자를 평가한다면 정당한 자세겠는가? 자, 이러니 이 기자가 얼마나 우매한 짓을 했는지는 자명하게 드러난 셈이다.


어떤 작품을 전체 흐름의 토대 아래서만 인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성규 기자는 전병욱 목사가 <꿈>에서 레미제라블과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파편적으로 인용하여 예화로 써먹는 우(愚)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전체 작품의 의도를 전병욱 목사가 간과하는 무식함을 보였다고 지적하면서 이 기자의 페이퍼 냄새를 자랑하듯 말했다. 나도 이 기자가 그 작품들은 잘 이해했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그러나 이 기자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우를 범했다. 현대 문학비평에서도 '독자비평'은 엄존하고 있다. 어떤 작품이 발표되고 나면 독자의 것인 측면이 있다. 물론 전병욱 목사가 이런 측면을 생각했을 수도 있고 안 했을 수도 있다. 정확히는 전병욱 목사가 설교적인 편의성에서 자기 설교 취지에 도움이 되도록 작품을 끌어당겨 써먹었다고 생각해야 맞을 것이다.

그런데 이성규 기자는 이것이 마치 못할 짓을 한 것처럼 펄펄 뛰는데, 이것은 위대한 철인의 저작이나, 아니 신약에서의 구약 인용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원래 시경(詩經)은 남녀의 운우지정을 노래한 것이 주종이지만 주자(朱子)는 이것을 단편적으로 인용하여 아주 형이상학적인 문맥에서 고도의 사상적인 구절인 양 써먹기도 했다. 신약에서의 구약인용 부분도 원래 구약의 문맥에서는 일차적으론 그런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지만, 신약 기자의 메시아 성취를 드러내기 위한 목적일 때는 구약의 본디 문맥에 그리 구애받지 않았다. 이것은 구약의 기독론과 신약의 구약 인용 부분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에게는 초보신학이다. 종말론적인 메시아의 구약 성취 신학이 신약 기자의 마음의 초점이었고, 이 의도하에서 구약의 본디 문자적 문맥을 뛰어넘는 인용을 했다. 임마누엘 예언, 베들레헴 유아 살해 예언, 애굽 피신 예언, 뼈가 꺾이지 않은 예언, 기타 구약을 인용해 메시아 성취를 주장하는 예언을 검토하면 이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전병욱 목사가 자기 설교를 뒷받침하는 예화적인 목적으로 특정 작품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여 써먹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모든 작품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게 철저히 알아야 예화로 써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한 영화의 전체 의미를 말하지 않고 단편적인 장면만 인용해서 얼마든지 자기 설교에 써먹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기자는 설교를 논문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설교는 '엄밀한' 과학이 아니다.

뉴스앤조이나 이성규 기자가 텍스트 비판을 목마르게 사모하므로 내가 오늘 텍스트 비판의 편린만 보였다. 계속 텍스트 비판을 사모하면 "미워도 다시 한번" 속편은 계속 나올 수 있다. I'll be back.


이 기자는 설교한 시점의 컨텍스트를 존중해야 한다

설교는 설교한 시점의 사회 경제적 형편과 교회의 형편, 즉 삶의 정황 가운데서 파악해야지 텍스트만 가지고 파악하면 설교자 후려잡기가 딱 좋다. 나는 전 목사의 꿈에 대한 설교를 작년 팔구월경 수원에 있는 모교회에서 집회한 테이프에서 처음 들었다. 그러니 삼일교회에서는 훨씬 그전에 했던 설교임을 짐작할 수 있다. 98년말이나 99년초의 우리 사회 형편에서 그 설교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시점에서는 우리 사회가 경제난에 짓눌려 있는 데서 조금씩 빠져나오면서 사람들이 증권에만 매달리는 사행심을 보이는 상황에서 젊은이들에게 진취적 기상을 불어넣고 꿈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자세를 강조한 것은 당연하다. 쉬운 길로 가지 말고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이다.

전 목사의 소위 '성취' 이데올로기라는 것도 젊은이들이 사회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자리에 앉아야 할 선교적 필요성의 '앞자리'인 것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그의 이런 선교적 열정을 간과한 채 그를 신자유주의 '성공주의자'로 매도하지 말라. 법조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교인들에게 사법고시를 준비시켰다는 전 목사의 말을 경청해야 할 것이다. 이것도 엘리트주의, 성취주의로 몰아세운다면 이성규 기자는 운동권 근본주의자이다.


이 기자는 정말 전병욱 목사를 사랑해서 이런 글을 쓰는가?

이 기자는 전병욱 목사를 사랑해서 이 글을 쓴다고 했는데, 그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를 '몰인격'으로 몰아가는가? 나는 그의 이런 사랑타령을 들을 때 어느 유명한 왕년의 은막스타가 이혼하면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 이런 신파조 논리로 이성규 기자의 글쓰기를 정당화하지 말라. 아예 사내답게 전 목사가 미워서 쓴다고 고백하라. 그가 부흥해서 싫고, 건방져서 싫고, 잘 나가는 자 자빠뜨려 좋다고 하라. 사랑한다는 명목하에 더 이상 강제키스를 하지 않기 바란다. 나는 솔직히 이 기자를 사랑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이 기자가 좁은 기독교권에서 교만한 글쓰기의 전범을 보이기 때문에 나는 이 글쓰기를 시도했을 뿐이다.


이성규 기자는 유령선 글쓰기를 중단하고 커밍아웃하라

금번 이성규 기자의 글쓰기는 교계에서 처음 시도되는 실명비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그런데 이상한 것은 공격의 대상은 실명인데, 이런 비중있는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해 최소한의 소개가 없다는 것이다. 전번에 실린 "기독교죄악사 독서평" 기사에서는 기고가의 학력, 근황, 비전까지 친절히 소개되었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스타 이성규 기자의 배경에 대해서는 전혀 소개가 없는가? 그가 어느 학교 출신이며, 소속 교단은 어디이며, 어떤 신학적 배경을 가졌는지 왜 전혀 소개하지 않는가? 나는 그의 글냄새에서 적어도 그가 합동측이나 고신측 라인이 아닌 현대 신학의 물을 먹은 자인 줄 짐작한다.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 글쟁이인 줄 직감한다. 남이 추리하지 말게 하고 자신이 직접 정직하게 커밍아웃하기 바란다. 죄 지은 게 아니지 않는가? 뭐가 꿀리는 것이 있는가? 혹 자신의 문패를 밝히면 글쓰기의 중립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치명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더 이상 잠행적 글쓰기를 하지 않기 바란다. 정말 명실공히 실명비판의 전범을 보여주기 바란다.


이성규 기자는 패거리주의자인가?

이성규 기자에게 중요한 말을 해주고 싶다. 내 뒤에 누가누가 있으며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세력을 대표해 내가 이 글을 쓴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라. 이 기자가 독존적으로 글을 쓰고 이 기자가 독존적으로 책임지기 바란다. 이 기자 뒤에 글 쓰는 후원 세력이 있다면 실명을 다 밝히라. 그들의 교단이 어디이며, 누구의 녹을 받고 목사 노릇하며, 부목사 노릇하는지 다 밝히라. 실명 비판의 정신을 지키기를 바란다.


뉴스앤조이의 한탕주의, 선정주의를 경계한다

뉴스앤조이는 한탕주의, 선정주의를 경계한다고 했다. 그럼 한번 따져보자. 보통 헤드라인 기사로 올라오면 대개 이틀 정도 있다가 기사가 밀리든가 아니면 색션별로 배치가 된다. 헌데 전 목사 기사는 다른 기사와는 비견되게 줄창 첫화면에 끝까지 버텼다(물론 사이트 구성을 새롭게 한 뒤론 인기가 좋으니까 따로 한살림 차려줬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가? 완전히 뜬 프로라 그런가? 아니면 문제가 있는 기사의 주인공들 가운데서 걸출한 괴수(魁首)라서 그런가? 인기가 좋아서 그랬다면 이건 뉴스앤조이가 가장 많이 공격한 세속주의, 성공주의의 한 단면이 아닌가?

뉴스앤조이가 창간 후 전병욱 목사 기사는 거의 대부분 첫 화면에 어떤 모습으로든 장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 목사가 그렇게 나쁜 사람인가? 이제까지 기사화된 내용 가운데서 최악의 인물이란 말인가? 이것은 또다른 의미에서의 언론의 한탕주의, 선정주의가 아닌가? 뉴스앤조이가 뜨는 데 이성규 기자의 글이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래서 전략상 이 이쁜 것을 버리지 못하겠는가?

나도 뉴스앤조이가 교계 인터넷 언론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기존 교계 언론보다는 개혁성을 가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좀더 공정한 언론의 길을 걷기를 바란다. 기왕 개혁의 길에 나선 것 철저한 개혁 언론의 길로 가기를 바란다. 또 뉴스앤조이가 항상 건전한 신학사상의 정초(定礎) 위에 서기를 바란다.


P.S.나의 이 글도 메인에 올려주는 것이 공정한 글쓰기 게임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구걸하진 않겠다. 뉴스앤조이가 자체 편집권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인물과 사상> 정도의 반론권이 보장되기를 바란다.


김선호   2000-10-31 오후 6:3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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