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손으로 변기를 닦다

26-27살 되었나? 교회 청년회에서 식목일에 모여서 교회 대청소를 했다. 나와 그 당시 회장을 맡고 있었던 누나가 화장실 청소를 맡았다. 나는 손에 오물을 묻히기 싫어서 고무장갑을 끼고, 그것도 모자라 화장실 청소용으로 나온 도구(이름을 모름)를 들고 소변기를 닦았다.

그런데 그 누나는 달랐다. 옷을 소매만큼 걷어붙이더니 수세미에 퐁퐁을 묻히고 맨 손으로 변기를 싹싹 닦는 것이 아닌가? 놀라웠다. 저 더러운 것을 맨손을 닦다니, 손이 더러워질텐데, 괜찮은가. 다들 오물이 묻을까 손이 더러워질까 꺼려하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맨손으로 청소를 하고 있는 누나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아직까지도 그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는 시골에서 돼지를 키우셨다. 시골에 가면 살이 통통 찐 돼지를 보는 것이 얼마나 재미가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싫은 것이 하나 있었다. 밖에서 보는 것은 좋은데 돼지우리 안에 들어가는 것은 정말 싫었다. 가끔 할머니께서 돼지우리에 들어가셔서 돼지들이 싸 놓은 오물들을 치우고는 하셨는데, 그때마다 나를 데리고 들어가시려고 하였다. 그것이 얼마나 싫었던지. 그 오물들이 내 몸에 묻으면 어떡하라고. 냄새나고 더러운 그곳에 어떻게 들어가란 말인가?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듯이 들어가 오물을 치우시는 할머니의 모습 내가 할머니를 뵐 때마다 떠오르는 모습이다.

"성숙하지 못한 교회와 교인은 결국 개인적 구원을 바라는 데 그칠 수밖에 없고, 사회적 책무를 떠맡지 못합니다. 한국의 개항 초기 기독교는 여성해방, 계급철폐 등 많은 역할을 해냈습니다. 하지만 지금 기독교가 남북통일, 노사갈등 등 사회적 이슈 해결이나 인권의 발전과 같은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기독교 윤리가 고작 술, 담배 안 하고 제사 안 지내는 식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적 가치를 공동체 안에서 실현하려는 노력이 한국교회의 당면 과제일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와 신학>이라는 잡지의 창간 14주년 기념강연회에서 빌립보서를 강연한 김세윤 목사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나의 아쉬움이기도 하다. 고작 술, 담배 안하고 제사 안 지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뜻이 그 안에 있을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여 우리의 삶 안에 구현하는 것,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술 담배 안 하고 제사 안 하면 좋은 믿음(?)

하나님의 뜻은 교회 안에만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무소부재, 어디에나 계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 또한 어디에서든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일터에서도 그분의 뜻을 찾을 수가 있으며, 학교와 가정에서도 그분의 뜻을 찾을 수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한다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삶의 전 영역 가운데서 그분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교회 안에만 있다. 교회 안에만 있다는 것은 종교적 영역의 틀 안에만 갇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매 주일 교회에 가고, 십일조 하고, 술, 담배 안 하고 제사 안 지내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였노라고 말한다. "선생님, 제가 그 모든 계명들을 어릴 적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말한 부자 청년처럼 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하신 것처럼, 내게 한 가지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이것은 종교적 영역의 틀 밖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적 영역의 틀 안에서 모든 것을 하였노라고 말을 하고 그렇게 만족해하지만, 주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네 있는 것을 팔아라". 성경에서는 그가 가진 모든 재물을 말한다. 그 재물은 그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이었으며 그의 신분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것은 무엇이 있을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신분을 보장해 주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탱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종교적 영역의 틀 안에서 우리가 행하고 지키고 만족해하는 것들이다. 주님은 그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따르라고 하시는 것이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종교적 영역에서 신분과 삶을 지탱해주는 것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따르며 그 뜻을 행하는 삶이다.

이것은 위험과 불안이 뒤따르는 삶이다. 나의 안전과 신분을 보장해 주는 것을 포기했을 때에 닥치는 불안감, 그리고 그 여행 가운데서 오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부자 청년이 모든 재물을 팔아 나를 따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근심하며 돌아간 이유가 그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나의 신분과 삶을 지탱해 주었던 종교적 영역의 틀을 벗어나 주님만을 따르는 삶을 선택한 당신에게는 어쩌면 그 신분과 삶을 지탱해주고 있는 모든 것에서 멀어짐으로 해서 혹시나 하는 불안감을 가질 수 있으며 믿음의 선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세상의 많은  영역 가운데서 위험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안전과 안정을 포기하고 세상 속에 뛰어들 용기가 있는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큰 결단을 요구한다. 오염되고 악취가 나는 세상의 냄새를 맡을 각오, 그 더러운 것들이 옷에 묻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안전이 보장된 모든 것을 버리고 과감히 세상 속에서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청년 그리스도인이여, 안전과 신분이 보장된 종교적 영역의 틀을 포기하고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않으려나? 더럽고 악취가 나는 곳으로 주님과 함께 가지 않으려나?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수세미에 비누를 묻히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서 변기들을 청소하지 않으려나?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갈퀴를 들고 돼지우리 안으로 들어가 그 더러운 오물들을 함께 치우지 않으려나?

불가능하다고 여기는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가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내세에 있어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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