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뽑기.
요즈음 십일조 논쟁을 보면서 나는 '거룩한 제비뽑기론'이 생각난다. 너무도 흡사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섬짓 놀라기 까지 한다.

많은 기독인들은 우상을 무슨 단군상이나 부처의 불상 무당의 잡신상을 일컫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타종교의 우상에 대노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모습을 흉내낸 우상을 가장 싫어하신다. 하나님을 능욕하는 것은 언제나 거짓 복음이요, 거짓 하나님이요 거짓 예수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가장하여 하나님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이 거짓 예수가 되는 일은 바로 인간의 공로가 신앙에 삽입될 때이다. 즉 인간의 행위가 일체 들어가서는 안되는 것이 신앙이요 은혜요 십자가의 복음이건만, 자신의 행위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행위에 대한 당연한 대가임을 은연중에 주장, 주님의 완전한 은혜를 행위에 대한 값싼 은혜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우상이 되는 거이다. 제비뽑기를 했으면 그냥 제비뽑기라고 하면 될 것을 '거룩한 제비뽑기'라고 인간 편에서 자신들이 하는 행위에 미리 신적인 거룩성을 첨가해 놓고, 거룩한 제비뽑기라고 장담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거룩한 힘을 삽입시키는 교만한 짓을 하는 것이다.

자기의 행동에 스스로 거룩성을 부여하는 행위는 참으로 교만 중의 교만인 것이다. 그런데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십일조도 거룩한 제비뽑기와 동일하게 거룩성이 첨가되는 것 같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라디아서 5장 4절)라고 일갈하고 있으시건만, 무지한 우리 기독인들은 십일조가 거룩하다는 것이다. 잘만 지키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열변을 토하는 것이다.

우상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자기의 행위에 대해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탐심이요, 우상숭배다. 주님의 은혜를 먹고 사는 자가 아니라 자기의 행위를 먹고 사는 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자각하고 사는 자와 자기의 행위에 자부심을 먹고 사는 자와의 차이다.

십일조에 대한 스스로의 거룩성이 첨가되지 않았다면 십일조란 말은 결코 해서는 안될 말이다. 자신이 한 십일조란 행위에 자긍심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십일조를 중요하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중요하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성이 임재할 때에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에게 임한 것이 느껴질 때 거룩을 말하는 것이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지, 인간 스스로 어떤 행위에 대해 중요하다고 하거나 거룩하다고 말하는 행위는 하나님보다 높아 지려고 자신을 우상화하는 것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십일조를 하지도 않았으며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십일조란 의무규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발적 행위만이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모두 그릇된 복음을 전한 자이고 잘못된 신앙인들일까?

자원하여 하지 않는 행위에 대해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양심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다. 또한 자원하여 하지 못하게 하는 십일조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진리의 자유를 속박하는 일이다. 심은대로 거둔다는 말을 하신 주님은 인간들이 주님의 뜻에 따르는가, 아니면 자신이 정한 규칙에 움직이는가를 보아서 판단하시겠다는 것이다. (의무적 행동을 요구하는 자는 성령을 훼방하는 자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자는 육신의 생각대로 사는 자요, 구원은 오직 주님의 뜻대로 사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십일조를 지키지 않은 분은 예수님이시다. 예수의 제자들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십일조란 행위는 없었다. 몇 세기 동안 거의 언급되지도 않던 십일조가 교회의 거대한 부와 권력에 의해 강제적 제도가 정착된 것이다.

유럽에서는 땅을 임대해준 대가로 그 수익의 십분의 일을 거두었다. 그것이 국가에서 교회로 유입된 것이다. 교회가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되자 10%의 임대료를 받기 시작하고 결국은 법으로 정해지기까지 한 것이다. 자발적 헌금에서 십일조의 법으로 변천한 것이다.

기독교의 타락과 함께 자발적 헌금도 강제적 도구로 이용되었으며, 부정직한 중세교회의 성지자들의 탐욕의 물질로 사용되고, 가난하고 무지한 (성경을 모르는 자가 대부분이었다) 자들을 이용하여 십일조의 우상을 세워놓고 교인들의 피와 땀을 빨아먹는 도구로 십일조를 사용한 것이다. 중세시대의 타락한 성직자들이 성경을 인용하던 궤변을 지금의 한국교회는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 유럽의 거의 모든 교회들이 십일조란 우상을 제거해 버렸는지 깨닫지를 못하는 것이다. 돈이 꼬이는 곳에 사람들은 몰리게 되어 있다. 이제 돈이 사라진 유럽교회에는 거짓 교인들이 모일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탐욕을 이루지 못할 공간인 교회에 가라지가 발붙일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복받기 위해 모인 자들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들만이 모여 드는 것이다.

자신이 행한 행위를 두고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은 우상이다.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것을 바친 것을 가지고 "나는 참 잘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을 우상으로 삼는 짓이다. 헌금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많이 하는 것이 적게 하는 것보다 좋을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는 많이 했다고 자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인간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죄가 됨을 깨닫는 일은 오직 주님의 은혜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스스로는 결코 행위의 교만을 눈치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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