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돌리’라는 이름의 양의 복제는 우선 그간 성취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사안 두 가지를 우리들의 현실 속에 제기했다. 첫째는 암수교배가 아닌 체세포 주입 방식, 즉 번식에 있어서 특히 수컷의 존재가 전혀 필요치 않은 상황, 둘째는 다른 생물도 아닌 인간 자신의 복제 가능성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그 기술적 차원만 해결된다면’ 어느 누군가의 일방적인 의사로도 기존의 형질 가운데 특정형을 기하급수적으로 다수화시킬 수 있으며, 더욱이 그 과정은 인간의 경우 복제되는 당사자 자신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진행될 수 있는 상황을 예견케 하는 것이다. 나치스의 인류학이 자신들이 설정한 우생학적 형질을 제외한 나머지를 집단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인간복제는 원하는 형질의 추가라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셈이다.

생산되는 인간, 권력과 자본의 주도권

바야흐로 일체의 생물과 인간이 ‘공장에서의 생산품’이 될지도 모를 현실이 오고 있는 것이다. ‘복제상황’은 서유기의 손오공이 자기의 털을 뽑아 부리는 변신술이 그 고전적 원형이라고 할 만한데, 이는 자신의 세력을 다수화시키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구를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다. 즉, 복제는 그 출발이 기본적으로 ‘힘의 증대’와 관련이 있다. 손오공의 털이 무수한 손오공들로 변신해서 싸움에 나서는 것은 투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정세를 장악하는 일과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똑같은 생각과 행동, 그리고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세력을 대세로 삼아 사유화(私有化)하려는 권력의지는 그래서 언제나 복제의 가능성을 꿈꾸게 마련이다.

한 사람이 움직이는 듯한 나치스 군대의 획일적인 일사분란함도 그 복제의 권력의지가 최대로 관철된 경우이다. 이것이 오늘날에 들어와서는, 어떤 형질의 존재가 주도권을 잡기 바라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권력의지적 관심과 고도 산업사회에서 가능해진 첨단수준의 생산주의가 결합한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여 개인적 차원에서 인간복제가 가능해지는 경우에 생기는 문제도 깊이 따져봐야 하겠지만, 인간복제가 그 복제기술의 독점과 관리를 충분히 장악할 수 있는 권력과 자본의 구상에 맞닿아 추진되는 사태가 실로 우리들의 최대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인간복제를 가능하게 하려는 힘의 배후에는 바로 다름 아닌 이 ‘권력과 자본의 세계개조론’이 교묘하게 은폐된 모습으로 깔려 있으며, 이들의 이해와 구미에 맞는 특정 형질의 선택이 주도권을 잡아가는 세상의 문제를 우리들에게 첨예하게 제기하기 때문이다. 즉 권력과 자본은 자신들의 주도권에 그 사회를 의문없이 복종시키기 위해서 어떤 형태로든 복제 시스템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의 가닥은 이 생명복제의 기술이 영국과 미국이라는 두 역사적 자본주의 강대국에서 나온 점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과학사의 발전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어떤 특별한 과학기술의 등장은 단지 축적된 학문적 과학성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 체제의 역사적 요구와 내적 연관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가령, 근대 초기의 서구 열강들의 선박제작술과 제국주의의 발전, 영국의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그리고 각종 과학의 발달, 미국의 세계자본주의 주도와 첨단과학의 전개과정 등을 간단히 돌아보아도 과학의 신기술 개발은 특정 국가와 체제의 주도권, 그리고 그에 의해 추진되는 세계적 구조 조정의 과정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대량생산을 위한 포드 시스템과 이에 기초하여 기계적 반복행동의 반경을 계산하는 경영학의 발달, 그리고 여기에 집단적으로 거의 동일하게 적용해야 하는 자본주의 체제 내의 인간군(群)의 양산은 권력과 자본의 과학이 개조해낸 세계의 모습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복제는 이미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었고, 생물학적 복제의 가능성만 남겨 놓고 있던 셈이라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DNA 복제의 현실은 자본주의 권력이 거의 최종적으로 도달한, 오랜 세월에 걸친 복제공정의 기술적 절정인 셈일 뿐이며, 사실상 우리는 오래 전부터 모종의 특정한 ‘정신적 DNA 요소의 분류’에 따라 전반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복제당해온 존재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점을 분명히 직시해야만이, 도처에서 자행되어온 갖가지 수준 및 종류의 복제현실과, 유전공학적 복제의 상관성을 파악하고 이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는 윤리적 근거를 보다 확고히 세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논의는 창조질서에 도전하고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을 농락하는 기술이라는, 과학윤리가 제기하게 되는 상식적 비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 복제기술의 보다 큰 맥락의 의미를 짚어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사고(思考)복제

유전공학적 복제기술의 발달 이전에 특히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권력의 의지와 자본의 주도권이 관철되기 위해서 추진되어온 복제의 양식은, 무엇보다도 ‘사고(思考)복제’의 형태로 존재해왔었다. 그리고 그것은 교육과 언론을 통해서 동일한 유형과 반응을 보이는 집단사고의 복제 메카니즘을 재생산하는 것을 그 현실적 목표로 삼아왔다. ‘파블로프의 개’가 증명해낸 심리역학은 체세포에서 추출한 DNA를 난자 안에 전기충격으로 주입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 방식으로, 동물이 아닌 인간의 두뇌 속에도 일정한 형질의 심리적 DNA를 반복적으로 투입시키면 얻어낼 수 있는 동일한 행동유형에 대한 연구라고 하겠다.

이것이 발전되면, 생김새와 유전형질은 다르지만 거의 같은 반응방식을 집단적으로 복제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되고, 그것은 지배체제에 순응하는 사회심리적 기재를 도출해내는 기반이 된다. 그래서 지배권력과 자본이 요구하고 기대하는 행동유형이 대세가 됨으로써 힘의 증대를 실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사고통제’(thought control)에 속하는 이 과학은 행태심리학이 그 절정을 이루었고, 약물투여를 통해 투여자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반응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도록 하려는 노력으로 연결되었다.

가령, 미국 CIA의 경우, 나치 독일의 인체 생화학 실험결과를 인수하여 이를 바탕으로 1953년에 심리통제를 위한 ‘MKUltra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던 역사가 있다. 이 계획은 ‘인간의 행위를 통제하기 위한 실험으로 생화확 물질을 비밀스럽게 사용하는 프로그램’이라고 규정되었는데, 마약성분이 있는 LSD를 실험물질로 사용한 이 프로젝트의 하부실험계획 142는 생물체를 대상으로 하여 뇌에 전기자극을 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동일한 반응과 사고체계의 복제를 통해서, 원하는 행위를 하도록 원거리 조정하는 셈인 것이다.

이같은 ‘사고복제’는 획일화와 관계된다. 이른바 ‘레드 컴플렉스’의 경우에서 보듯이, 냉전형 사고가 한국사회에 일으키게 되는 반응양식은 우리 자신이 생생하게 경험하는 바이다. 마치 집단적 복제가 발생한 것처럼, 남북관계의 긴장과 진보이념에 대한 한국사회의 지배적 태도는 냉전형 모델을 A형이라 한다면 이 이념적 DNA가 공동체 전체에 북풍(北風)이라는 ‘전기충격’으로 주입되어 A형이 아닌 것은 획일적 구도에서 제거해야 하는 반(反) 우생학적 형질처럼 취급해버리는 것이다. 무수한 A형이 일시에 복제되어 한국사회를 하나의 특수한 방향으로 주도하고, 그것이 대세가 되어 이와는 이질적인 형질은 인정하지 않는, 말하자면 복제의 대상이 되는 모델과 다른 것은 일절 용납하려 들지 않는 ‘복제의 폭력’이 생명의 자유로움과 다양한 개성을 위압하고 만다. 안기부법은 이런 의미에서 이 ‘A형 복제’만을 한국사회에 허용하려는 권력의 논리가 법제화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

한국의 ‘주입식 교육’도 말 그대로 지배권력과 자본이 투입하려는 특정 형질의 정신적 DNA가 복제되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러한 교육환경 속에서는 주어진 형질을 반복적으로 학습하여 자신의 것처럼 동일하게 복사하는 능력이 시험되고 그것이 결국 성적으로 출산된다. 교육된 내용을 얼마큼 그대로 다시 재생산해내는가 하는 두뇌의 복제능력이 가진 정교성이 검증되는 것이다. 물론 논술고사 등 최근 일련의 교육방식에서 추진되고 있는 노력들은 이와 다른 방향으로 교육환경을 변화시키는 데 역할을 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복제 메카니즘이 교육현장에서 가동되고 있어서 논술고사의 준비마저 기존의 일정한 모델을 복제하는 작업으로 전락하고 있기조차 하다.

전례없이 새롭고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반응한다는 일은 권력과 자본의 검증을 거쳐서 통과사증을 받지 못하면 주변부로 밀려나서 이단 내지 반체제적 유형으로 낙인찍히기 쉽게 된다. 창조적 접근이라는 것도 이들 기득권의 방법적 요구와 맞아 떨어져야 인정받고 조명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창조적이라도 그것은 우수한 복제품보다 낮게 평가된다. 한국사회의 유행병 같은 ‘신드롬주의’가 그 경향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돈이 되는 것이 신드롬의 목록에 1순위를 차지하게 되고, 권력의 논리에 저항하는 창조성은 수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누군가 신드롬적 현실의 최일선 주자가 되고 이것이 권력-자본의 동맹구조 속에서 화려하게 조명받으면, 엄청난 기세로 따라하고 복제된 문화현상은 급속도로 파급된다.

가수 등의 창법과 몸짓, 그리고 복장은 그런 경향을 매우 독특하게 보여준다. 취직 인터뷰에서도 복장과 두발, 그리고 자세, 특히 여성에게 있어서 용모가 일정한 유형으로 정식화(定式化)되어 있는 경향도 이 복제 메카니즘의 지배력이 가동하고 있는 현실적 증거라 할 것이다. 이러한 교육풍토와 생존 현장, 문화 현실에서는 다량생산의 공정에 투입될 서로 거의 유사한 순치(馴致)된 형질의 인간형이 다수화되고, 그 가운데서 제일 잘 복제된 자가 선택된다. 이는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작동시키고 있는 복제 메카니즘이 교묘하게 통제하는 사회의 질서와 통한다.

하여 앞서 언급했다시피, ‘유전공학적 복제’는 바로 이러한 경향이 그간 끈질기게 추구해온 질서의 최후 고지라고 할 것이다. ‘사고복제’가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서 유지해야 하는 일정한 한계를 갖고 있는 반면, 형질 자체를 출발부터 내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DNA에 대한 점령’은 지배체제의 복제 메카니즘이 가장 안심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전공학적 복제 가능성과, 그 결과에 대한 윤리적 논의는 이 기존의 복제 장치를 작동시키는 일체의 사회적 현실을 대상으로 출발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것부터 먼저 붕괴시켜 나가야 그 복제장치 가동의 종국적 결실인 유전공학 복제의 위장된 정당성을 무너뜨릴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이 복제과학 자체와의 싸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를 양태하고 전개시키고 있는 배후세력과의 정면대결인 것이다.

복제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행위

이 복제과학은 성서적으로 말하자면,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부추긴 악의 세력이 동산 중앙의 생명나무에까지 손을 대어, ‘독사의 자식’을 영원히 복제하려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행위이다. 하여, 인간복제의 이점을 주장하려는 모든 논리들은 사단의 교활한 계략이며 이는 인간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고 거짓 선전하는 행위이다. 인간복제의 꿈을 꾸는 경우, 이것은 피조물을 인간이 스스로 모델로 선정하여 이를 다수로 복사함으로써 대세를 장악하려는 의도이며 따라서 그 죄 된 모습을 유지하고 도리어 수적(數的)으로 증폭하는 악을 낳을 뿐이다. 혹 아무리 선한 인간을 모델로 하여 복사한다 해도 그 역시 타락과 죄의 가능성을 본질적으로 안고 있는 존재이기에 최선의 모델적인 존재로 삼을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 예수를 모델로 한 새인간 창조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반면, 인간복제의 과학적 추진은 지금의 상태와 수준으로는 복제되면 될수록 더더욱 문제가 많아질 뿐인 인간을 재생산하려든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재앙의 문을 여는 시작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신앙의 성장과정이라면 이 또한 복제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 차원의 능력을 기반으로 하여 인간의 전체적 인격과 존재의 성격이 변화됨으로써 새로운 창조의 통로를 거친다는 점을 간과한 형식논리에 불과하다. 복제는 그 형질의 이식이지만, 그리스도를 모델로 한 신앙 안에서의 창조는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특수한 성품과 개성적 운명에 하나님의 영이 결합되어 이룩되는 변화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DNA 형질에 의한 결정론에 묶이지 않는, 무한한 가능성과 창조적 미래가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획일을 거부하기에 일방적인 권력의지에 의한 순치에 저항하며, 동일한 규격과 모양의 생산이 아니라 다양한 유형의 깊이 있는 성숙을 지향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한한 구조로 만드신 창조의 질서에 자신의 자리를 각기 매우 독특한 개성을 발휘하면서 일구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바벨론에 끌려간 청년지식인들은 일정한 틀 속에서 바벨론 문명에 의해 사육되고, 그 문명의 이상형으로 복제되어가는 과정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다니엘은 왕의 양식을 거부함으로써 그의 체내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영적 능력을 지키려 했고, 그로써 바벨론의 복제 메카니즘에 종속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다.

사도 바울이 ‘세상풍조를 닮지 말아라’고 했던 것도 그러한 복제 메카니즘에 휘말리지 말라는 권고였다는 점에서, 신앙은 세상의 질서가 끊임없이 뿜어내는 복제의 장력(張力)과 하나님의 나라가 원하는 창조의 생명력 사이에서 인간의 선택을 바로잡아 주는 힘이라고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온통 미국이나 일본의 장력에 의해 그대로 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면, 기독교 신앙인들은 인간의 새로운 창조의 모델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이 사회에 제시하고 있지 못한 책임을 통렬히 느껴야 할 것이다. ‘복제의 욕망’을 압도할 수 있는 창조의 생명력을 전파하는 일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 결국 인간복제의 미망까지 낳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는 인간의 창조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셨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창세기 1장 27절 이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기초로 한 인간창조의 작업에서 축복의 면모를 기록하고 있다. 인간은 이렇게 축복의 존재라는 이 대목은 그런 복을 베풀 능력이 없는 존재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게 될지 모를 생명체의 운명과 날카롭게 대조된다. 복제된 인간은 축복받지 못하는 출발로 말미암아 그 생명의 미래가 어떤 지경에 놓이게 될지 암울하기만 하다. 이번 복제는 그 출생을 축복해줄 부모가 존재하지 않은 출현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문제로 되면 사랑으로 축복해줄 부모가 없다는 점에서 그 운명은 비극을 예감케 한다.

우리 생명의 참 된 부모이신 하나님을 망각하고 자기증대의 교만(교만은 언제나 자기확대로 연결된다)을 꾀하는 자들이 직면하게 될 저주이다. 또한, 인간의 생명성은 그 DNA에 대한 정복으로 우리 손에 장악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유전공학적 복제의 기본 전제는 인간의 생명에 대한 주도권을 인간의 손에 넘기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복제가 이루어지면 자연히 그 인간의 영원한 생명이 보장될 수 있다는 논리를 그 안에 담고 있다. 그러나, 성서는 생명의 주도권이 어디까지나 하나님에게 있음을 밝힌다. 무수한 복제로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은, 생명이 없는 원형질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숨쉬는 일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달려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창세기 2장 7절의 대목은 생명의 주도권이 소재한 자리를 증언하고 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재료로 쓰일 수 없을 것 같은 진토 내지 흙먼지로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바람이 불면 날아가서 존재의 형체조차 찾을 길 없을 이 흙먼지를 생명의 물과 함께 이겨서 오늘의 우리를 탄생시킨 분의 작업을, 우리가 대신해서 수행해보겠다고 덤벼드는 것은 인간의 재물과 시간과 정력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리는 행위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은 그분께 맡기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인간이 하는 것이 이 세상을 복되게 만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이 인간들이 동산 중앙의 생명나무에까지 손을 댈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시면서 아담과 하와를 축출하신 것이 얼마나 분명한 말씀인가? 동산의 생명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쫓겨난 주제에 인간의 생명을 관리해서 제손에 넣어보겠다는 이 야심은 또다시 인간이 어디론가 쫓겨나는 시작이 되지 않을까 두렵기만 하다.

시편 139편의 13절과 18절 사이에 있는 “주께서 내 속 내장을 창조하시고 내 모태에서 나를 짜 맞추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태어났다는 것이 오묘하고 주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깨어나 보면, 나는 여전히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라는 말씀은, 인간의 탄생 속에 담아 놓으신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고백하고 있다. 즉, 인간의 생명은 그저 우연적 소산이거나 인간의 조작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계획과 구상, 그리고 뜻이 담긴 것인데, 이를 그러한 섭리의 예비함과는 관련도 없이 삶이 만들어내겠다고 하는 것은 복제작업 주도자의 의도 아래 복제된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인간이 그 존재 자체로서의 존엄한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지의 대상물로서 이용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복제라는 양(量)과 수(數)로 측정되면 특정 형질의 인간은 지배자로, 또 다른 특정 형질의 인간은 피지배자로 구분되는 헉슬리의 경고가 현실이 될 수 있다.

한국사회의 경우 이미 이같은 형질구분(그것이 출신지역으로 결정되는 것이든, 학벌이나 가문 등으로 구별되는 것이든 간에)을 통해서 지배체제를 만들어가고 있는 판국에 이러한 현상이 추가된다면 인간은 더더욱 ‘조작(manipulation)의 대상’이 되고, 그 생명은 ‘쓰고 버릴 수 있는’(disposable) 가치로 하락하게 될 것이다. 영으로 거듭난 인간군(群)의 출현으로 대안을 결국 이제까지의 논의는 ‘현재의 인간형을 과연 복제할 의의가 있겠는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이에 대한 대답이 긍정적이라면 인류는 인간복제라는 고지를 향해서 기대를 걸고 힘있게 진군할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주체의 변화를 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인류의 군상이 인간복제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면 인류사회의 미래는 더더욱 비극적인 수렁으로 빠지고 말 것이라는 점이다. 권력의지와 자본의 동맹체제라는 지배구조 속에서 지원받고 추진되고 있는 유전공학의 발전이 앞으로 무엇을 위해서 봉사할 것인지는 분명하다. 기술적인 차원의 신기원이 열리기만 한다면, 이들이 주도하는 복제과학이 대세로 만들고자 하는 인간형의 모델은 세상을 아름답게 변혁시킬 창조적 생명력을 지닌 존재들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권력의지에 지배받고 있는 복제 주도자들의 의사에 순응하는 자가 아닌 인간형을 다수로 ‘생산’하려는 자들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오늘날 이런 복제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와 관련해서 여전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라고 하실 것이다. 육의 세계에 속한 존재의 행위가 가져올 사태의 본질은 ‘썩어 죽을 것의 증가’이다. 실로, 인간의 야망과 정복욕으로 태어난 생명체가 어떤 세계에 속하게 될 것인지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복제되지 않은 인간에게 있어서도 그 부모가 야망과 정복욕으로 기르면 어떤 모습으로 자라나게 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신앙은 우리에게 현재의 인간형을 복제할 의의는 어디에도 없다고 확고하게 가르친다. 갖가지 죄악으로 갈수록 괴물화되어가고 있는 인간의 복제를 향한 첫발자국을 뗄 이유가 없음을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복제’의 문을 열고자 하는 것은 무저갱 속에 갇혀 있는 사단을 불러내는 일에 다름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영으로 새롭게 태어난 인간형의 모델을 세상에 출현시키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작업임을 일깨운다. 이 작업이 부재하거나 빈곤한 자리에는 인간복제의 미망이 꿈틀대며 시대를 장악하려 들 것이다. 하여, 하나님의 영으로 아름답고도 새롭게 창조되어가는 인간형의 등장, 그래서 오늘날 인류의 현실을 괴롭게 하고 있는 기존의 죄 된 인간형을 대체해나갈 대안으로서의 능력있는 인간군(群)이 누룩처럼 곳곳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을 향한 갖가지 형태의 복제의지와 맞서서 벌어야 하는 이 맹렬한 주도권 쟁탈전은 그래서 단지 과학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인류의 생명 전체를 건, 인류의 미래적 모델을 놓고 벌이는 영적 선한 싸움의 전선(戰線)인 것이다. 이 싸움의 주도권을 우리가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오늘 우리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정의롭고 순결하게 거듭나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길 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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