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람데오'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단독자임을 일깨워주는 말입니다. 이렇게 심오한 의미의 이 말이 오늘에 이르러서 개혁의 구호처럼, 교회 안의 유행어 같이 유포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의 코람데오는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임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러한 대표적인 예가 일명 '어전회의'라고 불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체험했던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섰던 이사야 6장 사건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을 경험케 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선 불완전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고백이 어떠한지를 이사야 선지자의 반응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이사야 6:5, 새번역)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는 이신칭의를 너무 값싸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런데 교권과 제도의 틀 속에 갇혀 있던 당시의 가톨릭 교회를 향하여 이신칭의를 외쳤던 마틴 루터가 말한 믿음은 오늘 우리가 말하는 믿음과는 간격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이신칭의를 외치기 전 그는 하나님 앞에 서 보는, 하나님의 현존과 遭遇(조우)하는 영적 체험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모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부딪친 후 하나님 앞에서 절망하는, 영혼의 고투와 절망에 대한 대답이다. 훌다의 질풍 같은 심판 예고로 인하여 경악한 양심 때문에 자신을 추스르지도 못하는 지경이 된 영혼들에게 비로소 이신칭의 교리는 힘을 발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인격적 현존 앞에서 살면서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는 교회라는 종교 흥행 집단이 고객을 호객하는 값싼 바겐세일 구호처럼 들릴 것이다." - 김회권(숭실대 구약학 교수) 2002년 장신대 종교개혁 특강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한 인격적 현존을 경험한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대두되는 화두가 '코람문도'(세상 앞에서)입니다. 매일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 앞에서도 참으로 신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보이는 형제를 사랑치 않으면 그 믿음은 거짓이라고 요한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나도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힘쓰고 있습니다."(사도행전 24:16, 새번역)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온몸을 불살랐던 바울이 로마의 총독 벨릭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습니다. 코람데오와 코람문도의 균형이 조화를 이룰 때 세상 사람이 감당치 못할 하나님의 사람이 됨을 성경과 교회사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코람데오를 경험했던 신앙의 선배들이 삶의 현장에서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흔적을 한국 기독교 역사는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을 목격했던 미국인 선교사 게일이 기록한 보고서인 '변환기 속의 한국'을 옮겨봅니다.

"처음부터 길선주 목사의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한때 완전 소경이었고, 당시의 시력도 극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위대한 권위와 권세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얼굴은 순결과 거룩함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는 길 목사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었다.
그는 세례 요한에 대해 말하였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는지를 말하였다.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부르고 계셨다.
과거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무서운 죄악들이 우리들 앞에 쏟아져 나왔다.
어떻게 이것을 떨쳐 버릴 수가 있으며, 어떻게 도피할 것인가 하는 것이 큰 의문이었다.
"오 하나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러한 영감이 내리는 순간에 길 목사는 세례 요한과 같은 존재였다.
회개하라고 외치는 소리는 무리들에게 던져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들은 회개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한국기독교회사 上, 252쪽, 김인수 지음,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

이러한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하심을 체험했던 당시의 교우들은 삶의 현장으로 돌아간 후 지금까지 유교적 관념으로는 전혀 죄라고 생각지 않았던 '축첩, 노비 소유, 조혼, 음주, 흡연, 아편복용, 아동 구타' 등의 죄악을 고백하고 참회하면서 첩과 소실을 정리하고, 노비를 해방시키는 등의 기독교적인 가치관에 따른 행동들을 정착시켰다고 교회사는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진정으로 코람데오와 코람문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요?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