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97~98년에, 필자가 한국에서 살았을 때, 필자의 친구인 몇 명의 젊은 한국 지식인들은 심한 취직난을 겪었다. 그 때 그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없을까 싶어서 필자는 매일 같이 여러 신문들의 교수 초빙 공고를 찾아 읽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일까? 인문 계통의 교직원들을 상당히 많이 모집하는 한 지방 사립 대학교의 공고문의 '응모 자격'란에서, 박사 학위의 소지를 요구한 바로 뒤에 '순수한 ×××신앙을 가진 사람'만을 모신다는 말이 나왔다. 그것도 모자라 소속 단체의 '교인 증명서'까지 요구한다는 말이 뒤에 또 나왔다. 처음에 필자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도대체 아무리 종교적 재단이 세운 학교라 해도, 신학 관련 학과도 아닌, 일어일문과 등의 교수가 반드시 특정 신앙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 과연 합리주의적 현대 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학생들에게 특정 신앙을 심어주겠다는 재단의 취지는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여느 나라와 같이 한국의 헌법대로 개인 자유 선택의 '사적인 영역'으로 남겨져 있는 종교와, '공적인' 영역인 고등 교육이 서로 혼동되어 있다는 것이 민주주의 원칙에 과연 맞는가?

     '우리 종교인만이 교수할 수 있다'는 공고문을 읽었을 때 필자의 머리 속에서는, 대학교 교직원에게 '당성'과 '사상적 건전성'을 요구·검증했던, 옛 동구권의 전체주의적인 교육 체제가 자신도 모르게 떠올랐다. 그러나, 한 번의 큰 충격을 받은 필자는 그 이후 신문 공고를 계속 뒤지는 과정에서, 검증된(?) '교인'만을 위한 초빙 공고를 상당히 많이 발견하였다.

     한국이라는 형식상의 '민주 국가'에서 이와 같은 노골적인 위헌적 종교 차별이 버젓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던 필자는, “교인만 모신다”는 한 수도권 사립 대학교에 안면이 있는 유명한 러시아 전문가가 계약 교수로 와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기억났다. 그 분에게 전화를 걸어, “아니, 정말 전 교직원들이 모두 한 특정 종교만 믿고 있느냐”고 물어봤다. 그 분의 대답은, “믿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옛날에 정기적으로 레닌주의 사상 강연에 끌려갔듯이, 매주 다들 종교 의례에 가야 하지요. 안 가면, 왕따를 당하고 실직의 위험이 곧 닥치지요. 나는 다행히 외국인이라는 특수한 처지 덕분에 안 가도 별 큰일은 안 나지만, 그래도 주위의 눈치가 썩 좋지 않죠. 한 단체가 똑같이 움직여야 한다는 원칙은, 사실 옛 소련이나 여기나 뭐가 다르겠소?”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필자는 갑자기 호흡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전체 사립 대학교의 30% 이상이 특정 종교의 재단 소유인 한국의 특수한 여건에서 다른 종교에 속하거나 무신론자인 젊은 지식인들은, 이런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종교적 패거리주의'의 현실 앞에서 얼마나 많은 절망감과 소외감을 가져야 할 것인가? 헌법의 '신앙 자유'의 조항을 그대로 따를 뿐인 그들이 무슨 죄로 '3순위 자격'이 되어야 하는가?

     종교 신앙의 본질을 따져 보면, 진정한 신앙이라는 것은 남에게 결코 쉽게 보여 줄 수 없는, 아주 개인적인 부분이다. 기도하려면, 골방에 들어가서 남이 보지 않게 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바로 이를 의미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신앙의 증명서'를 요구하는 한국 일부 종교 계열 대학교의 자세는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적인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최소한 원수도 아닌 타종교의 신도 정도는 포용할 줄 알아야 되지 않는가? '황제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엄격하게 구분하셨던 예수의 정신을 진정으로 살리자면, 사회를 위한 교육과 개인의 영혼을 위한 종교 신앙은 엄격히 구별·분리되어야 되지 않는가?

     올바른 종교를 위해서라면 타종교인·무신론자를,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선교의 대상'으로 삼는 강요의 악습과, '우리 모두 다 같이' 식의 집단 동질성만 강조하는, 전근대적인 패거리주의는 하루 빨리 청산돼야 하지 않을까 한다.

     필자 : 박노자/오슬로 국립대학 교수·한국학
     (편집시간 2001년01월09일23시03분, 한겨레/ 사설·칼럼/ 야!한국사회, 숨막히는 종교 패거리주의)



2.

지난 월요일 수안보 모 호텔에서 우리지방 평신도 지도자 세미나(위로회)가 있어 잠시 갔다가 연회(노회)의 수장이 되시는 분과 저녁식사를 하다가 우연히 요즘 끝마무리에 접어들고 있는 '미-아프간 전쟁'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게 되다. 수장께서 말씀하시길 "다시는 요번 테러와 같은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번 기회에 미국에서 뻔때를 보여 줘야 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기독교에서 구호품을 많이 보내서 이 기회에 그 나라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다.

뻔때를 보여 주어야 된다는 말에는 폭탄세례를 퍼부어서라도 테러범들을 모두 잡아 죽여야 된다는 의미이고, 구호품을 보내자는 말은 폭탄세례에 피폐해진 난민들을 물질로 달래어 회교도인 그들을 모두 기독교로 개종시키게 하자는 기독교적 충성심에서 나온 말 이렸다. 기독교적 열정은 좋지만 병 주고 약 주자는 말로 들리기도 하는구나.

사회를 선도해야 할 종교 지도자가 사람을 선도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부족해서 무력을 사용해 뿌리를 뽑으라는 것인가. 예수께서도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기독교 한 교단의 수장이라는 분이 가난하고 힘없는 불쌍한 민족에게 검을 사용하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신앙적 열정으로 한 말이지만 너무한 말이 아닌가. 이런 모습이 어찌 이 한 분의 생각이랴. 혹시 기독교 신앙인 대부분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기 때문에 기독교가 지나친 배타적인 종교로 낙인찍히는 것이 아닌가.

어느 날 불교에서 설립한 대학에 다니는 한 크리스천 학생이 기독교 선교회 모임을 학내에서 가지다가 몰매 맞은 일이 있어 일간지에 보도된 적이 있다. 몰매 맞기 이전에 기독교 신앙을 가진 학생들이 대학 캠퍼스에 세워 논 불상에 빨간 페인트를 마구 칠해 불상을 망쳐 놓아 불교도 학생들과 승려교수들이 화가 나서 기독교 선교회 학생들에게 그런 어마어마한 보복을 했다는 것이다.

이게 뭣들 하는 짓인가. 이것이 정말 진리를 탐구하는 수도자들의 모습인가? 거리의 장사꾼들도 상도가 있는데 말이다.

얼마 전 한 아주머니가 절엘 간다기에 신도가 몇 분이나 되는가 물어 봤더니 700명 정도 된다나. 아니 산골짜기에 있는 조그만 절에 웬 신도가 그리 많은가 의문하니 매월 초하루에만 절에 가는 사람까지 더하면 더 많다는 것이다. 교회처럼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고 각자 좋은 시간에 가고 싶을 때 다녀오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교적부에 올리고 정규적으로 각자 스스로 기도하고 가는 사람이 그 정도 된다는 것이다.

이들이라고 타 종교인들에 의하여 자기 신앙이 위기를 느낄 때 방어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이들이 서로 서로 동아리를 만들어 자기종교를 포교하려든가 사수하려고 종교 이기주의적 열정을 벌인다면 오히려 종교 없이 평화롭게 사는 사람들에게까지 큰 혐오스러움이 되지 않겠는가. 참으로 걱정이 되는 구나. 대학을 다니는 지성인들도 불상에 페인트칠을 하고, 당한 편에선 몽둥이로 보복을 하기도 하는데 이들 보다 못한 평범한 사람들이야 말하면 무엇하겠나.

이번 평신도 세미나 강사로 초대된 분은 1967년도 경에 모 해병대의 소대장으로 월남전에 파병되어 전쟁을 치루는 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수천명의 적군을 총과 칼의 백병전으로 전멸시켰다며 당시의 전과를 슬라이드로 보여 주며 간증하다. 비춰진 슬라이드에는 참혹한 전쟁을 금방 연상시키듯 비참하게 총에 맞고 칼에 찔려 죽은 시체들이 온 들판에 즐비하게 늘어져 있다. 이게 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기게 된 것이라고 간증할 때마다 모여 앉은 평신도 지도자들은 감격에 겨워 아멘을 연발하며 은혜를 받는다.

나하고는 전혀 아무 감정도 없는 월남 민족을 죽이기 위하여 돈을 벌기 위해서 용병으로 파견되어 수천명의 병사를 죽여 놓고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겼다는 말이 과연 아름다운 신앙고백이 될 수 있을까. 그러한 공적 때문에 국내에 와서도 여러 무장간첩 색출 작전에 참여하는 기회를 가졌고 그러저러한 성과로 장군에까지 진급하여 지금은 전역장교이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여서 전역 후 8년 동안에 1500여 곳에나 신앙간증집회를 다니며 오히려 장군시절보다 더 유명해 지게 하셨다나. 그러니 여러분들도 나처럼 하나님 잘 믿으라는 말씀이겠지.

간증집회를 마치고 귀가하기 위하여 차를 가지러 호텔 밖에 나오니 첫눈이 펑펑 쏟아지는구나. 눈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언제 그리 많이 왔는지 소나무 가지마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서 그냥 눈을 맞으며 마냥 걷고 싶은 동심이 동하는구나. 거리와 집과 나무와 산들이 모두 하얗게 변하니 마치 새로운 세상에 온 기분이다. 저 하얗게 쌓인 눈이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소복이 내려 우리의 마음도 맑고 깨끗하게 변하였으면 좋겠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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