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에 독립투쟁을 하던 경상도 사람과 함경도 사람이 만났다고 한다. 함경도 사람이 밀봉을 한 비밀 편지를 건네주자 경상도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이게 뭐꼬?"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한 함경도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뭐꼬가 무시기?"

역시 경상도 사람도 함경도 사투리를 몰랐다.
   "무시기가 뭐꼬?"
   "뭐꼬가 무시기?"

그들은 이렇게 한나절을 서로 묻기만 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외국어뿐 아니라 한 민족의 언어 내에서도 사투리가 심하면 알아듣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뭐꼬가 무시기?"와 "무시기가 뭐꼬?"라는 말은 사실 같은 뜻의 문장이다.

'뭐꼬'나 '무시기'는 모두 '무엇'이라는 뜻의 사투리다. 즉 경상도 사람과 함경도 사람은 서로 "무엇이 무엇이냐?"는 물음으로 일관한 것이다. 그러니 대화가 이어질 리 없겠다. 이렇게 같은 내용의 발언이 사람마다 달라지는 것을 가리켜 소쉬르는 파롤(parole)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다양한 파롤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을 랑그(langue)라고 부른다. 굳이 번역하자면 파롤은 발언이고 랑그는 언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파롤은 말하는 사람의 일회적인 발언이다. 따라서 말하는 사람마다(그뿐 아니라 말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랑그는 변하지 않는다. 높고 새된 목소리의 "난 너를 사랑해"나 낮고 묵직한 목소리의 "난 너를 사랑해"나, 파롤은 서로 다르지만 랑그는 같다. 물론 "낸 니를 사랑한데이" 하고 사투리로 말해도 마찬가지다. 랑그란 발언을 할 때 말하는 사람이 따라야 할, 혹은 적용해야 할 규칙을 가리킨다. 누구든지 같은 언어로 같은 발언을 하는 사람은 모두 같은 랑그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랑그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문법 체계다. 하지만 랑그는 문법 체계와 똑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일부분으로 포함하고 있다. 랑그는 문법을 비롯해서 사람들이 언어 사용에 관해 무의식적으로 합의하고 약속한 규칙들의 체계 전체를 가리킨다. 장기를 둘 때 이따금 말들을 일부 잃어버려 부족한 경우가 있다. 이때 흔히 바둑돌이나 주사위 등으로 그 말들을 대체해서 둘 수도 있는데, 이처럼 대체 가능한 것이 파롤이다. 하지만 그렇게 대체되었다고 해서 장기판의 규칙 자체가 바뀌는 건 아니다.

랑그란 바로 그런 장기판의 규칙과 같은 것이다. 랑그가 없으면 파롤은 존재할 수 없다. 예컨대 "난 너를 사랑해"라는 말을 "사랑 너를 해 난"이라고 말하면 알아들을 사람은 거의 없다. 랑그가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랑그는 갖가지 특수한 양태의 파롤을 가능하게 해 주는 불변의 공통 요소, 바로 파롤의 수면 밑에 있는 '구조'다. 랑그가 본질이라면 파롤은 현상이다. 본질이 없는 현상이 있을 수 없듯이 랑그가 없다면 파롤은 없다. 반면에 본질은 반드시 현상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랑그는 그 자체로는 드러나지 않고 반드시 파롤의 옷을 입고서만 모습을 나타낸다. 이것이 랑그와 파롤의 기묘한 의존 관계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 프랑스의 언어학자-

기독교 신앙인이 추구하는 본질은 하나님이다. 이 본질을 체험하는 표현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예수를 바라보는 입장이 달랐으며 바울 또한 달랐다. 그러나 그들이 성서를 기록한 목적은 본질인 하나님을 증거 하는 데 있다. 그들이 예수를 이해하는 데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차이는 논쟁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가 서로 차이가 있지만 그러한 차이들이 믿지 않는 분들에게 다양하게 하나님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아닐까.

보수와 진보는 본질(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분명한 입장의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그 둘은 귀하고 천한 관계나 높고 낮은 관계가 아니요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상호보완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자기의 입장과 의견만을 앞세워 너무 요란하게 남을 비방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저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분들이며 하나님을 믿는 모습들인가 서글퍼질 때가 너무도 많다.

"저 달을 보아라"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니 달은 처다 보지 않고 손가락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손가락의 모양이 어떠니 하며 손가락을 나무라고 있는 이들에게 무슨 진리의 가르침이 가능하겠는가.

구약의 율법으로 근본주의자나 문자주의자가 된 분이 아니고 예수의 복음으로 자유를 체득한 자라면 모든 것을 포용하고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는 영적 거듭남이 있어야겠다.

내 것이 귀하면 남의 것도 귀한 줄 알아야지. 자기만 옳다는 몰지각한 기독교인들의 독선주의적 윤리관은 오늘의 세계인류평화에 오히려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독선주의자들은 이 지구촌을 떠나 멀리 별나라에나 가서 자기들끼리만 살아야 편한 게 아닐까. 예수께서 물론 당시 종교 종교지도자들에 대해 배타적이고 독단주의적인 말씀을 한 적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건 그 당시의 유대종교문화상황에서 잘 못된 종교지도자들이나 정치가들 혹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근본주의자들에 대해서 분노한 말씀이지 그걸 그대로 받아들여 교리화 시키고 종교이념화 시켜 놓는다면 또 하나의 잘못된 종교가 되어 사람들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재림하여 오신다면 또 다시 이들을 책망하실 일이다. 진정한 진리에는 종교도 이념도 필요 없다. 오직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고전13:13).  

주부영어교실에서 지루함을 없애고 즐거운 마음으로 영어를 배우게 하기 위하여 흘러간 노래 추억의 팝송 'Let it be'를 마음으로 정하고 음반 가게에 가서 간신히 구하여 집에 와서 틀어 보고 너무나 실망하다.

별로 비싼 것은 아니지만 돈이 아까울 지경이다. '비틀즈'가 이 노래를 불렀을 때는 참으로 잠언을 듣는 것처럼 마음에 감동과 위로를 받게 했는데 다른 가수가 그것도 뽕짝 가락으로 이 노래를 부르니 그렇게 천할 수가 없다. 천하다는 표현보다 차라리 혐오스럽다는 말이 나을 지경이다.

가사와 곡이 같은 것이라도 부르는 사람에 따라 이렇게 차이가 있으니 아무리 작사 작곡을 잘 하더라도 가수 선택도 중요하다고 생각이 되다.

성경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수의 말씀을 어떤 이는 뽕짝으로 해석해 내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클래식으로 해석해 내는 이도 있다. 물론 뽕짝이 좋은 사람도 있고 클래식이 좋은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성경을 해석하여 선포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여러 사람들의 역사해석 방법들을 들어보고 연구해야 되지 않을까.
    
"뭐꼬가 무시기?"
"무시기가 뭐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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