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기

나도 커밍아웃을 해야겠다. 나는 이성애자다. 동성애자들이 부르는 대로 하자면. 하지만 여자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자와의 성행위가 무진장 즐거움을 준다고 떠벌이는 에로 비디오를 볼 때면, 혹은 성행위를 통해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희열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비의교도들을 접할 때면, 소수자(?)로서 비참과 절망을 느끼기도 한다.

왜냐하면 나는 여자와의 성행위에서 미치도록 쾌감을 느껴보지 못한 이성애자이기 때문이다.(그렇다고 이성애자로 세뇌당해 동성애적 성향을 억압당한, 불쌍한 인간으로 보지는 말기를 바란다.) 여기저기서 성적 쾌감을 높이는 방법 어쩌구 하는 얘기를 들을 때면 귀가 솔깃해지면서 혹시 내가 성적 장애자나 무능력자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느끼고, 그러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성에 관한 한 대단한 경험과 실력이 있는 것처럼 구라를 풀기도 한다.

일테면 여자를 죽여줬다는 둥,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희열에 발버둥치더라는 둥. 그럴 때면 나의 순수한 영혼을 더럽히고 속이는 것 같아서 괴롭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내 영혼을 속이
고 싶지 않다. 떳떳하게 밝히겠다. 나는 성행위에서 여자를 죽여본 적도 없고, 나 스스로도 뿅가본 적도 없는 이성애자다.


2. 동성애자는 소수인가

'성은 취향이다'라는 말이 유행이다. 동성애자를 소수자 그룹으로 규정하려고 할 때, 흔히 동원되는 명제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는 것은 취향이란 단어 뿐이다. 그 말은 다양성이라는 얼굴로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일단 어떤 것이든 취향이고 다양성이라고 지칭되면 보호되고 지지되어야 할 인권의 한 유형으로서 우상화된다. 적어도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 인도적 차원의 인식과 실천을 하려고 애쓰는 진보적 인간이라면 당연히 고개를 숙이고 경배해야만 하는 것이다.

성이 취향이라는 명제에 근거해 보자면, 동성애자들은 소수자라고 말하기가 힘들 것 같다. 동물과의 성행위가 취향인 사람들이나, 시체와의 성행위가 취향인 사람들이나, 어린애와의 성행위가 취향인 사람, 그리고 자위가 취향인 사람(?)들 기타 등등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그들은 요즘에 와서 많은 기회와 권리를 누리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즉, 상대적 다수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동성애자를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려는 음험한 비약이라는 비난은 말아주기를 바란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성이 취향이라면 그 대상이 꼭 동성인간에만 한정되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은 또 하나의 파시스트적 오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소수에 대한 억압의 한 방식이다. 그런 식의 비난은 자기-동성애자-의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소수자-동물애자나 시체애자나 아동애자나 자위애자(?) 그외 등등-를 혐오의 대상으로 몰아부치는, 다수 지배자의 일상화된 술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성애자와 비교해 볼 때, 동성애자들은 분명 소수라고 말할 수 있다. 아무도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성애 논의의 비틀림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를 아무런 생각 없이 동일 범주에 넣고 출발함으로써 우리는 개념의 혼란을 격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동성애 논의가 인권 캠페인 수준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런 식의 분석에 숨겨진 함정이다.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얘기하는 성행위는 기반부터 다르다. 이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더 이상의 논의 진행이 혼돈을 가져올 뿐이다. 성을 성기 위주로 생각하지 말라는 동성애자의 말과 성기를 떠나서 성을 얘기하는 게 가당치 않다는 이성애자의 주장이 맞닥뜨리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성행위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생기는 것이다. 성행위는 오락적 요소가 있다. 즐거움을 통해 맺어지는 관계라는 측면을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다가 아니다. 성행위는 개체 죽음의 극복으로서 종족의 번식이라는 요소가 함축되어 있다. 동성애자들의 입장에서는 전자가 성의 본질이다. 하지만 이성애자의 입장에서는 후자가 본질이다. 성행위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물음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동성애 논의가 남의 다리 열심히 긁어주는 꼴이 될 수밖에 없음이 뻔하다. 결론이 나올 리가 없다. 이런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갈등'은 먹는 행위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생명체가 끼니를 걸르지 않으려 열심히 먹어대는 것이 개체의 생존을 위한 것이냐 즐거움을 위한 것이냐.

성행위를 종족보존 행위로 보는 측과 즐거움을 위한 행위로 보는 측을 같은 범주에 넣고 다수자냐 소수자냐를 규정하는 것은 '그릇된 집합의 오류'이다. 둘은 같은 유형으로서 비교범주에 넣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성애자들이 말하는 다수로서의 이성애자들은, 성을 종족보존 행위로 보지 않는다는데 동의한 이성애자들만이 해당할 뿐이다. 그렇게 규정했을 때, 과연 이성애자가 동성애자에 비해 얼마나 다수가 될 지 의문이다. 오히려 이성애자가 소수일 수 있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성적 충동에 이끌려 사창가를 찾은 사람들, 애를 못 낳는 사람들, 피임을 하는 사람들 모두를, '성=쾌락'이라는 명제에 동의하는 이성애자로 단정해버리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따라서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지배 유형으로서 동성애 담론은, 먼저 성행위의 정의에 대한 분쟁을 해결한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쉽게 결론을 낼 수 없는 문제다. 일종의 신념의 문제로 돌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성애 담론의 방향은, 성행위와 종족보존은 무관하다고 믿는 이성애자, 동성애자, 시체애자, 아동애자, 동물애자, 자위자 등등을 대상으로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성적취향의 대상영역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진지하게 이루어질 필요도 있다고 본다. 물론 그들은 성행위가 종족보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혐오의 대상이냐는 외침을 기치로 하여 함께 연대할 수도 있을 것이며, 성적 취향의 대상 영역에 규제를 둔다는 자체를 거부하는 데에서 의견의 일치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그들의 영역이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논의의 진행에서 혼란을 피하기 위해 '성=종족보존'이라는 등식의 믿음에 서 있는 사람들의 성적 행위를 '성관계'로, 그렇지 않은 경우를 '성행위'로, 아예 개념적 규정을 달리 하고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어떨까.


3. 호모 포비아 - 그림자의 공포

광고에 나온 모델들은 하나같이 아름답다. 특히나 화장품이나 의류광고에서는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 모델의 아름다움에 취한 사람들이 그 상품을 사기 때문이다.

모델의 아름다움 = 상품 = 나의 아름다움

내가 상품을 사는 행위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위의 등식이 성립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광고 시위의 주요 타켓이다. 사람들은 광고에 몰두할수록 모델과 자신을, 상품이라는 매개를 통해 일치시키려는 '동일시 착각'에 쉽사리 빠지게 된다. 광고의 흐름과 중간에 삽입되는 다양한 장치들은 동일시 착각을 강화하기 위한 장식품에 불과하다.

광고의 이러한 효과는 인간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어린애에 대한 애정, 노인에 대한 거리감, 장애자에 대한 경계 등도 '동일시 착각'이라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함으로서 생기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어느날 궁궐 밖으로 외출을 했다가 길에서 만난 늙은이와 병자들의 고통스런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 지금의 호사가 다 무엇인가' 라며 괴로워하다가 끝내는 출가의 길로 나섰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 나의 그림자로서 비춰진 것이다.

아이의 생명력이 나의 그림자로 비쳐질 때, 인간은 즐겁고 그 아이가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다. 늙은이의 맥없는 모습이 나의 그림자로 비쳐질 때, 인간은 죽음(두려움)을 느끼며, 상대와 거리를 두고 싶어한다. 힘겹게 움직이는 장애자에 대한 공격적 성향도, 실상은 자신에게 다가올지도 모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의 변형일 뿐이다. 그는 장애자를 자신의 그림자로 인식하고 있다. 장애자를 통해 다가온 장애라는 고통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히스테리적 공격성으로 표출되어 상대에게 보여줘야 할 동정의 감정을 압도해 버린 것이다. 장애자가 자신과 가까이 있을수록 동일시 착각은 더욱 강해진다.

동성애자에 대한 경계의 이면에 깔린 공포(호모포비아)는 죽음이다. 늙은이에게서 느껴지는 것이 개체의 죽음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이라면, 동성애자가 주는 그늘은 종족의 죽음에 대한 본능적 공포에 해당한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애착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과 연관이 있다. 삶의 과정에서 어느 순간, 자신이 성장이라는 오르막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내리막에 있음을 체감할 때, 자식이 보여주는 생명력은 부활의 복음이 된다. 바로 이 부활의 복음이 파괴되는 위기체험이 동성애자를 통해 유입된다. 동성애자에 대한 공포는, 동성애자가 자신(종족)의 그림자로서, 동일시착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발생하게 된다. 거기에는 지배력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다수자의 횡포라는 식의 설명만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심리적 메카니즘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4. 여자 동성애자보다 남자 동성애자가 더 껄끄러운 이유

자신이 저지르면 로맨스고 남이 저지르면 스캔들이라는 말이 있다. 똑같은 변용이 성적 행위에서도 가능하다.

'남이 하면 성추행이고, 내가 하면 친근감의 표시이다.'
성폭력은 근본적으로 심리적인 것이다. 내가 상대에 의해 성적 오락의 대상(혹은 수단)으로 간주되었다는 데 대한 인격적 분노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그래서 원하는 경우라면 성폭력이 아니지만, 내가 싫어하는 상대라면 당연히 성폭력이다. 상대가 어떤 의사를 가지고 했건 간에 그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다. 어쨌거나 행위를 한 쪽은 친근함의 표시였다고 주장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아예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기준을 세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남녀간의 신체 접촉은, 추행과 친근함의 표현이라는 경계를 항상 술취한 듯 오가기에 객관적 판정이라는 게 불가능하다. 그러니 접촉행위가 문제가 되었다면, 그건 이미 성추행인 것이다. 어느 한쪽이 원하지 않는 상황이었음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남녀간의 신체 접촉이, 처음에는 자기도 모르게 자연스레 일어났고 당연히 친근함의 표시였을지 모르나, 아무런 의혹도 받지 않고 되풀이되면서, 어느 순간 성적 행위로 심리적 전환이 일어난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해 봤을 줄 안다. 좀더 찐하게 접촉해보려는 충동도 덩달아 꿈틀거린다. 이런 상황에서는, 행위자를 향해 던져지는 '절제'라는 덕목 외에는 별다른 해결책이 없을 것 같다. 어느 순간 '이건 아닌데' 라고 상대가 느끼게 되면, 이미 상황은 엎지러진 물이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까지가 친근함이고 그 다음부터 성추행인지 구분할 수 있는 분명한 선을 공유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여자 동성애자는 나에서 있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녀가 나를 성적 대상으로 봐주지 않는다는 게 좀 서운할 수도 있지만, 혹시나 무의식중에 이루어진 나의 어떤 행동을 성적 추근댐으로 오인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나 조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에게 밀려 옆에 서있는 여자와 신체 접촉이 이루어 졌을 때, 혹시 이 여자가 나를 추행범으로 보는 거 아닌가 하는 고민 아닌 고민에 불편했던 경험이 있다. 여자들과 같은 생활 공간에서 활동할 때도 비슷한 상황에 직면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성애자인 여자들보다는 신체 접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리란 불온한 기대심리도 충족된다. 나를 원하지 않는 여자 이성애자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와의 신체적 첩촉에 대해 덜 민감한 반응을 보일 것이고, 성적 경계심도 덜 갖고 있을 것이기에, 오히려 상대에 의해 행해지는 자연스런 접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남자 동성애자의 경우는 다르다. 그의 행동, 손을 잡거나, 허리를 감싸거나, 가볍게 안거나 하는 모든 행동이 성적 행위로 간주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던 행동이 어느 순간, 어 저게 나를 성적 대상으로 보고 이러는 거 아닌가, 하는 의혹에 빠지게 된다. 즉, 나는 성추행의 대상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옆에 밀착해 서 있는 남자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않다가 불현듯 이 사람이 동성애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와 닿은 몸의 부분들이 내게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나를 유희의 대상으로 갖고 놀기 위한 행동이 아닌가 하는 느낌 때문이다.

여자 동성애자와 나 사이의 관계와 남자 동성애자와 나 사이의 관계는 비슷한 관계 설정이다. 그러나 성추행에 일방적으로 노출되는 쪽이 반대편으로 갈린다는 점에서 (내 입장에서 보면) 천국과 지옥이다. 내가 여자 동성애자와 함께 생활하는 공간에서라면 미안하게도 그녀가 일방적으로 성추행의 대상이 될 처지이고, 내가 남자 동성애자와 함께 생활하는 공간에서라면 반대로 내가 일방적으로 성추행의 대상이 될 상황인 것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여자 동성애자보다는 남자 동성애자가 더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5. 마무리 하기

나는 동성 상대에게서건, 이성 상대에게서건 성행위를 통해 지극한 경지의 쾌락을 맛보았다고 떠벌이는 인간들을 볼 때면, 결코 그들과 나는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절절한 단절감을 맛보면서도 외적으로는 상당한 정력가인 양, 성적 쾌감에 달관한 양, 떠벌이며 자신의 실체를 위장하던 이성애자다. 하지만 이젠 나도 나의 정체성을 밝혀야겠다. 내게 있어 성행위는 쾌락이기보다는 종족 보존을 위해 자연이 심어놓은 본능에 가깝고, 따라서 맹목적으로 성행위에 뛰어들었다가도 순간 번뜩 정신이 들어 '지금 모하구 있는 짓이야' 하면서 스스로를 자문해보곤 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며, 의무이기도 하다는 생각 하에 최선을 다해보려고 노력한다. 마치 아버지가 쉬는 날이면, 부모 도리를 다하기 위해 아이들과 열심히 놀아줄 때의 심정과 비슷한 것이다. 물론 전혀 즐거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부모로서 아이들과 놀아줄 수 있다는 자체가 기쁨인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뭔가를 한다는 자체가 역시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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