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사사들
- 직분과 삶

1. 삼갈 - 작지 않은 작은 자
2. 돌라 - 선교사의 원조
3. 야일 - 직분과 사역
4. 입산 - 십자가의 원수
5. 엘론 - 직분과 삶
6. 압돈 - 불법을 행하는 자

사사기에는 많은 사사들이 등장하는데, 거의 무명의 사사들도 여섯 명이나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들에 대한 기록이 한 절에서 많아야 세 절 밖에 안 되는데도, 이들 모두의 이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사들은 각기 한 인물을 주제로 다룰 수 있지만, 이들은 그렇게 다루기도 그렇고, 아니 다루기에는 이들을 통해서 주시는 메시지가 너무 소중하여, 고민 끝에 이렇게 ‘무명의 사사들’이란 제목으로 묶어보았습니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하였는데, 여기 등장하는 사사들이 이러한 것들을 우리에게 풍족하게 채워줍니다. QT가 성경을 묵상하며 그 안에 감춰진 보화들을 찾아 누리게 하는 것처럼, 이 인물들이 그런 감동과 유익을 우리에게 줍니다. 짧은 이야기 속에 담겨있는 깊고 풍성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1. 삼갈, 작지 않은 작은 자

(1) 무시 당하는 삼갈
(2) 외모와 중심
(3) 감추인 보물 찾기
(4) 큰 것과 작은 것

삼갈은 그에 대한 기록이 한 절 밖에 없기 때문에 무시 당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 점이 바로 우리의 문제임을 지적해 주는 인물이 바로 삼갈이며, 작은 것의 소중함, 큰 것과 작은 것의 관점, 외모와 중심의 실체, 감추는 세계와 드러내는 세계 등을 생각하게 하는 인물입니다.

(1) 무시 당하는 삼갈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삿 3:31).

사사기 3장에는 옷니엘과 왼손잡이 에훗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고, 인색하게도 마지막 한 절에 삼갈의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옷니엘은 메소포다미아의 왕 구산 리사다임을 이겨 40년간 이스라엘이 태평하도록 공헌하였고, 왼손잡이 에훗은 모압 왕 이글론을 암살하였으며, 그 땅이 80년 동안 태평하였다고 성경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에훗의 후에 삼갈이 등장하는데, 그도 사사로서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하도 혁혁한 공로들을 세워서, 600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는 기록이 하찮게 보여 우리 시선을 끌지 못합니다. 게다가 ‘소 모는 막대기’라는 단어가 삼갈의 격을 낮춰보게 하고, ‘그도’라는 토씨가 삼갈을 다른 사사들의 대열에서 맨 뒤로 보내게 하고, 한 절밖에 안 되는 인색한 표현도 우리로 무심히 스쳐 지나가게 만듭니다.

삼손은 나귀 턱뼈로 1,000명을 죽였는데 유명인사가 되었고, 삼갈은 막대기로 600명을 죽였는데 무명으로 남습니다. 다른 사사들이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그런 틈바구니에 한 절로 언급하는 삼갈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여선지자이면서 사사인 드보라와 그녀를 도와 싸웠던 바락이 승전가를 부르는 중에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다”면서 삼갈 시대를 평가절하(平價切下)하는 듯한 발언을 해 버립니다(삿 5:6).

삼갈이나 야엘이 사는 동안 사람들이 큰 길을 두고도 침략군들이 두려워서 샛길로 다녔다고 해석할 수도 있으며, 실제로 대부분의 주석이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있으나 마나한 유명무실(有名無實)한 사람들이란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삼갈과 함께 언급하고 있는 야엘이란 여인은 이 승전가를 부르는 여선지 드보라에게 쫓기는 가나안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집으로 안내하여 진한 우유를 먹여 재운 후에 그의 살쩍에 말뚝을 박아 죽인 여장부입니다(살쩍은 sideburns, 즉 구레나룻 난 부분을 말합니다).

당시 전쟁에서는 많은 적을 무찌른 것보다 적장을 죽이는 것이 더 큰 공로로 인정받습니다. 드보라가 바락에게 적을 치라고 할 때에 '드보라와 함께 라야 가겠다'는 그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삿 4:9)고 하면서 적장을 여인이 죽여서 영광을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을 보더라도, 야일이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성경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드보라의 승전가 후반부에서 야일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다른 여인보다 복 받을 여인이라고 높여주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5:24 이하).

그렇다면 삼갈과 야일이 한 일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해석은 틀린 것입니다. 오히려 외적의 침입으로 공포에 떨고 있는 암울한 시대에 삼갈과 야일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으며, 그래서 성경도 칭찬의 대상으로 두 사람을 거론하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들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하찮게 여기게 되는가 하면, 옷니엘과 에훗과 드보라 같은 쟁쟁한 인물들의 이야기 틈에 살짝 끼워져 있으며, 성경이 한 절밖에 할애하지 않는 무명인사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또 다른 사사들은 시대적 배경과 전쟁 상황과 결과 등에 대해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여기 삼갈은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블레셋 사람 600명을 소 모는 막대기로 죽였다는 간단한 기록이 대비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외모와 중심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이새의 아들 중에서 왕이 될 인물을 택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새의 아들 중에 장남 엘리압을 본 사무엘이 그 인물의 출중함을 보고 탄복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비 이새가 아예 데려오지도 않은 다윗을 택하여 왕을 삼으십니다.

삼손이 1,000명을 죽인 것과 삼갈이 600명을 죽인 것의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삼손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삼갈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되는가 하면 사무엘이나 다윗의 아비 이새처럼 외모(外貌), 즉 겉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일반으로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신 1:17).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라고 하시면서 스스로 판단하기 어렵거든 하나님께 여쭈어 보라고 하십니다. 사사기에 많은 사사들이 등장하고 화려한 경력들을 자랑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화려함에 매료되지 말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겸손하게 구하여야 한다는 말씀이십니다.

성경에서 그 분량의 많고 적음도 외모일 수 있으며 보이지 않는 중심을 헤아려 살피듯, 하나님의 감추신 깊은 뜻을 찾아내기를 원하시는 심정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3) 감추인 보물 찾기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 2:4-5).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막 4:22).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드러내려고 숨기셨고 나타내려고 감추셨다는 말씀입니다. 야외예배에서 보물찾기를 하는데 보물을 감추지 않으면 보물찾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감춘 이유는 못 찾게 하려는 것 같지만 찾아내게 하려고 감추는 것입니다. 쉽게 찾아서 고루 돌아가기를 원하는 뜻으로 감추는 것도 있지만, 어렵지만 꼭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감추는 보물도 있습니다.

교사가 시험문제를 내면서 할 수 있으면 많은 아이들이 맞추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문제를 냅니다. 그러나 점점 어려운 문제를 내면서도 답을 찾아내기를 원하며, 특히 한 두 문제는 아주 어렵고 까다롭게 내면서도 몇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들이 풀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보배를 성경 곳곳에 감춰놓으시고서 우리들이 찾아내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함께 기뻐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삼갈은 한 절밖에 기록이 없지만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있지만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 년을 지내었더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사사로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사로서의 임무를 감당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심히 넘어갈까봐 한 번 더 기록하고 있는 것을 놓치지 말았으면 합니다(삿 15:20, 31).

그 외에 망나니 아비멜렉은 말할 것도 없고, 큰 용사 입다에게도 긍정적인 평가가 없는 것을 유의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옷니엘, 에훗, 드보라와 바락, 기드온, 또 여기 삼갈과 도도처럼 무명의 사사들이지만 모두에게 빼놓지 않고 긍정적 평가가 있는 것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동의하기가 어렵겠지만, 사사기의 인물은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로 확연히 나뉩니다.

아무튼 삼갈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자기 백성을 그 고통에서 구원하였으니 그 일의 크고 작음을 넘어 칭찬의 박수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 도구가 소 모는 막대기든 물맷돌이든 나귀의 새 턱뼈이든 간에...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41).

(4) 큰 것과 작은 것
우리는 큰 일, 위대한 일에 매료당하는 경향이 매우 짙습니다. 한강에 놓인 다리 이름에 큰 대(大)자가 붙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그뿐 아니라, 우리 교회도 그런 흐름에 많이 치우쳐 있음을 지적받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중앙교회, ■■제일교회, ◇◇큰 교회 등 이름도 크기도 대형화 지향적입니다. 인천에 있는 모 제일교회는 잇따라 교회를 개척하여 제2, 제3 해서 제7교회까지 세웠기에 그 이름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신문에 실린 어느 부흥강사진의 직책을 보니 총재, 상임부총재, 부총재, 명예총재, 증경총재 등 총재만 9명이고, 운영회장, 대표회장, 상임회장, 공동회장 등 회장만 13명이었습니다. 큰 일을 하려다 보니 큰 직분이 필요하였겠지만, 이름이 작다고 작은 일만 하겠으며, 작은 일이라고 하찮은 일이겠습니까?

바울 사도의 본래 이름은 사울입니다. 사울은 희망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의 이름으로 베냐민 자파에게는 자부심을 갖게 해주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이라는 큰 이름을 스스로 버리고 바울(작은 자)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결코 작은 일을 한 사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신약성경의 절반을 기록하였으며, 이방인의 사도로 여러 차례의 선교여행으로 수많은 이방인 교회를 세운 큰 사역을 해낸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어느 교회는 작은 것의 소중함을 찾고 지키자는 담임목사의 제안을 따라 작은 교회라고 이름을 지었다가 믿음이 없는 목사, 비전 없는 교회라고 무시 당하는 어려움을 겪다가 끝내는 어른 목사님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이름을 바꿔야만 했습니다.

부자들이 많은 액수의 헌금을 하는 틈에서 두 렙돈의 적은 돈을 헌금한 과부를 주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렙돈은 화폐의 최저단위로 하찮은 액수를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여인이 부자들의 많은 헌금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부자들은 많은 것 중에서 일부를 넣었고 이 과부는 가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십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서는 어떤 계산법을 적용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저도 많은 액수의 헌금에 마음이 쏠림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무릎을 꿇지 않으면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종이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탄식으로 기도합니다.

“주여! 작은 것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잊지 않게 하시고, 작은 것에 충성하는 종과 성도들이 되게 하소서. 큰 것에 매료되려는 마음을 붙들어 안돈시켜 주시고 작은 것에라도 ‘착하고 충성된 자’라는 주님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게 하소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세상에는 있어선 안 될 사람, 있으나마나 한 사람,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 등,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흔해 빠진 말이라고 스쳐지나갈 것이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야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거나, 원숭이가 조상이라고 생각하니 아무렇게 살 수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삶에 대한 평가를 반드시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한 절밖에 그 기록이 없지만,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블레셋이라는 공적(公敵)과 싸워 600명을 죽이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는 긍정적 평가를 통하여, 사사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삼갈에게 경의를 표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2-23).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