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후임 목사. ⓒ뉴스앤조이 양정지건
새터교회 박후임(44) 목사와의 인터뷰는 교회 건물 꼭대기에 자리 잡은 그의 조그만 보금자리에서 이루어졌다. 기울어진 지붕이 다락방의 아늑한 느낌을 주었고 박 목사가 내온 녹차가 향기로웠다. 박 목사는 잔잔한 목소리로 새터교회와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예배가 매우 인상적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여성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데, 새터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분들은 우리 교회의 예배를 여성적인 예배라고 말한다. 아마 가부장적인 것을 배제하는 교인들의 문화가 예배를 통해 우러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본래 예배 시간에 아이들에게 먼저 설교를 하고 이후에 어른들에게 설교를 한다. 아이들 설교가 끝나면 아이들은 따로 분반공부를 한다. 이렇게 하면 아이들만 좋은 것이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아이들 설교가 더 은혜로울 경우가 많다. 설교 시간에는 항상 묵상을 하는 시간을 갖고 한 달에 두 번은 내가 설교하고 나머지 두 번은 전도사님들이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신다. 다섯째 주에는 평신도가 설교한다. 설교 시간에 목사의 말을 듣는 것보다 각자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능한 짧게 설교하는 편이다. 예배가 너무 설교 중심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한다. 설교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배의 모든 순서에 녹아져 있어야 한다. 설교는 남을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시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목회자가 받은 은혜를 성도들과 나누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아이들을 분리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이들을 공동체에서 제외하는 것이어서 합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새터교회는 1999년부터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사실, 어른 편하자고 아이들을 예배에서 제외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교회 교인들은 어린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편이다. 산모가 있으면 교인들이 둥그렇게 모여 배에 손을 얹고 아이를 축복하는 기도를 해줄 정도다. 기본적으로 교인들 사이에는 모든 아이는 '우리' 아이라는 생각이 있다. 이는 유아 세례를 받을 때에도 고백하는 말이다.

교인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인가.

교인들의 대부분이 20∼30대이다. 40이 넘는 사람은 적은 편이다. 탁아방·공부방을 통해서 식구가 된 사람도 있고 자원봉사를 하다가 식구가 된 경우도 있다. 지역 주민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1997년, 이 문제를 놓고 교인들이 대토론회를 벌인 일이 있다. 그 때 얻은 결론이 지역을 땅의 개념으로 보지 말자는 것이다. 이 지역은 공단배후지여서 유동 인구가 많다. 이 지역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고 이들을 섬기는 것이 우리 교회의 할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는 민중 개념이 넓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역 환경의 변화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박 목사가 내온 녹차와 고구마. ⓒ뉴스앤조이 양정지건
이 곳의 환경이 교회가 처음 들어설 때와는 많이 달라진 것이 사실이다. 외국인노동자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전문적으로 외국인노동자 사역을 하기에는 역량이 많이 부족하고 이 일을 이미 잘하고 있는 기관도 많다. 그러나 내년부터는 여성 외국인노동자와 함께 하는 프로그램을 하려고 한다. 외국인 여성들의 삶을 돌봐주고 그들의 자녀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준비중이다. 녹색가게를 열고 나서 외국인노동자들과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하나님이 이 부분에 대해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시는 것 같다.

여성성이란 무엇인가.

남성성과 여성성은 분리된 이원론이 아니라 전인적이며 평등한 것이다. 그동안 여성성이 눌려왔기 때문에 이 부분을 살리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남성 안에 잠재된 여성성을 살리고 여성 안의 남성성을 고양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일이다. 여성성은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죽어 가는 것들을 살리는 것이다. 여성의 부드러움과 상냥함, 배려 등을 교회와 예배를 통해 표현하고 싶다.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측면에서 한국교회를 본다면.

교회에 가면 일단 강대상은 높고 평신도석은 낮다. 고개를 들고 목사님을 볼 수밖에 없다. 이는 상당히 강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예배 시간에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막는 가부장적인 면도 많다. 일단 자리에 앉으면 움직이는 것조차 불편하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일률적인 것에서 오는 질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편안함, 따스함, 부드러움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예배당 구조 자체가 이웃과의 소통을 막는다. 앞 사람 뒤통수만 보는 구조가 경직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런 경직성에서 오는 엄숙함을 거룩과 경건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개개인의 신앙 고백과 표현이 없는 예배를 통해 자신을 내려놓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런 교회에서는 말씀 선포는 가능할지 몰라도 공동체성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 잘게 나누어야 한다. 만 명 교인을 말하는데, 만 명이 정말 교회가 될 수 있나?

교회에서 성령 하나님의 역동성보다 성부 하나님의 힘만 지나치게 강조되는 것은 큰 문제다. 성령은 여성성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교회는 생활·신앙 공동체이다.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와서, 교인들도 적고 모두 젊은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성인 교인 150명이 있어야 교회 운영이 가능하다는 말도 한다. 우리가 적은 교인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서로의 생활을 나누는 역동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 일년 예산이 3000만 원이 안 된다. 만 명 교인이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은 삶을 나누는 역동성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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