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의 지도자는 '섬김의 표상'이 되어야 한다.

지난 98년 교계의 한 잡지에 총회장 선거가 금권선거로 치닫고 있는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현실을 고발하는 어느 전도사의 양심선언문이 실린 적이 있었다. 이 잡지에 게재된 모교단의 금권선거 양심선언 폭로문은 사실 그 내용으로만 보자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어 왔으면서 그저 쉬쉬했던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양심선언문을 통해서 새삼 직면하게 되는 것은 오랫동안 관행처럼 굳어져온 교단내 금권선거의 현실에 대해 교회가 한번도 집단적인 통회를 공개적으로 뼈아프게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도리어 그러한 교단 내부의 비리와 부패가 밖으로 드러나 알려지게 될까 싶어 관련자들의 입을 침묵시키는 일에는 열중했는지 모르나, 진정한 자기 반성의 책무는 완전히 유기해 온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내용의 구체적인 부분에 들어가서 사실과 '다르다'느니 '같다'느니 하는 논란의 부질없음과 무의미함을 먼저 주목하게 된다. 사태의 구체적인 양상은 당사자의 경험 내용과 시각에 따라 상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핵심적인 문제는 교단 선거에 돈이 개입되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 세세한 액수나 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교단선거에 돈이 개입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그것을 백번 물러서서 선거과정에서 수고한 분들에 대한 의례적인 사례의 표시라고 한다 해도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다면 교회 헌금의 사용과 관련해서 그렇게 공개적으로 밝힌 적도 없다는 점이다. 교회예산 사용과 관련해서, 교단선거에 드는 돈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대한 수고비나 감사의 표시라고 개교회 회중 전체가 공동회의를 통해서 인정한 적이 있던가? 또는 그런 문제가 공적으로 제기되어 ‘아멘’으로 수용한 적이 있던가?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면서, 헌금의 사용과 관련해서 별로 떳떳치 않게 사용하고 나서도 아무런 공적 보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뭐라고 규정해야 옳을까?  

오늘날 교회가 이토록 불투명하게 교회의 재산을 사용하고, 그 사용의 용처도 선거승리를 위한 금권의 위력을 발휘하는 데 있다면, "내게 금과 은은 없으나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서라" 하던 베드로의 고백과 성령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들 교회에서 자리잡을 수 없지 않겠는가? 예수님의 이름이 역사하는 기적은 무릇 당연하게도 성령의 역사일진대,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금과 은의 힘을 믿고 있는 교회와 어떤 관련을 가질 수가 있을까?  

이제 우리는 이 문제를 논하는 절차로 우선 '교단선거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 논의가 바로 서지 않는 한, 교단내의 금권선거에 대한 유혹은 계속 존재할 것이며 그로써 교회의 미래는 암울해질 수밖에 없다. 돈의 힘으로 선출된 교단의 수장이 이끌어가는 상황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고난의 시대라면 순교 제1순위일 수밖에 없는 교단의 지도자.
사실, 교단 선거는 교단의 지도자를 선출하는 집단적인 작업이다. 교단의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섬김의 표상'이 되어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지도자의 본령이 무엇인지를 압축해서 보여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빛과 소금으로서의 신앙인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단선거는 고뇌에 찬 헌신의 과정이며, 자기를 십자가의 요구에 서슴없이 내어놓는 성례전(聖禮典)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때로 사랑을 위해 온몸으로 피흘려야 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는 길이며, 그로써 한국 교회가 겪고 있는 일체의 갈등과 대립을 위해 제물이 될 결단이 있어야 하며, 한국사회의 미래를 위해 어떤 고초와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든든한 모습으로 예언자의 살아있는 육성이 되는 사건이다. 그런 모습의 지도자를 선출하지 못하는 한 교단선거는 "긴 옷술을 달고 권위를 내세우고 장에서 인사받기 좋아하며 상석에 앉기를 다투는 자들"의 저열한 경연장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신 모습과는 정면으로 대립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교단선거는 그 선거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그 어려운 희생의 중책을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이 너무도 마음 아프고 미안하며, 그래서 그 앞길을 위해 간절한 기도로 보호해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절절함이 요구되는 일이다. 고난의 시대라면 순교 제1순위일 수밖에 없는 교단의 지도자,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모두를 대신해서 그 짐을 지고 뚜벅뚜벅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가는 신앙의 순결한 일꾼을 교회의 자랑과 감격으로 내세우는 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지도자에게는 괜한 사심(私心)이 없고, 오로지 자신을 바쳐 모두의 화해를 이루고 온유한 마음으로 영적 빈곤함을 일깨우면서 용기를 불어넣을 가슴 뜨거운 열정이 살아 숨쉬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자, 그렇다면 이러한 지도자를 선출하려면 그런 지도자를 길러나가는 교회 전체의 집단적인 성숙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아무리 수없이 선거를 치른다 해도 심하게 말하자면, "그 밥에 그 나물이라" 선거 결과는 모두를 실망시키고, 교단의 영적 진로는 밝아지지 못할 것이다.

금권선거의 말로(末路)

사태가 이러할진대, 하물며 이런 성례전의 작업에 돈이 끼어 든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렇게 해서 취해지는 지도자의 자리는 결코 하나님의 어린양이 존재할 수 있는 현장이 되지 못할 것이다. 고난의 현실 앞에서 자기를 내어주기보다는 희생양을 물색해서 자기는 보호하는 얄팍한 꾀가 뿌리를 내리고 말 것이다.

섬기기보다는 군림하는 것으로 낙을 삼을 것이며, 돈의 위력으로 확보한 이상 돈의 힘에 기우는 교회로 만들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돈에 머리숙인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과는 결별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주로 섬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일단 그렇게 되어 가면 한국사회의 미래를 위한 '예언자적 육성'은 불가능해진다. 돈의 힘을 믿고 살아가려는 사회의 부패와 타락을 질타하고 일깨워야 할 주체가 바로 그 죄의 질탕함 속에 교권적 생존경쟁의 승리가를 부르고 있다면 예언자적 육성은 출발부터 기대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돈의 우상'에 사로잡혀서 그것이 아니면 선거가 안된다는 타락한 현실주의를 내세우는 지도자가 이끄는 교단이 긍극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현장은 어디일까? 세속의 온갖 종류의 권세와 결탁하여 일신의 안위를 비는 특권주의 외에는 없다. 교단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도 모두 이 특권주의적 발상의 산물이며, 금권선거도 모두 이 특권확보의 과정인 것이다. 지도자의 희생이 아니라 지도자의 특권이 앞세워질 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의'를 주장하고 자랑하는 오만한 자들의 자리로 변질되고 만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순결한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은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금권선거의 가장 악한 죄의 결과는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환멸에 빠지게 해서 하나님의 교회와 말씀으로부터 유리시키는 것, 그것은 사탄이 가장 바라고 열중하는 일이 아닐까? 그러니 자기도 모르게 사탄의 도구가 되는 길로 빠지게 하고 있는 이 교단의 금권선거는 신앙의 공적(公敵)이다. 돈으로 사는 표로 지도자의 자리에 앉는 일은 그래서 교회의 영적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하수인이 되고 마는 것임을 깨우친다면 이런 일들이 계속 될 수 있을까?  

그러기에 금권선거는 사탄의 교회 파괴 공작이다. 금권선거에 관여하여 움직이는 모든 이들은 이 사탄의 교회 파괴 공작에 포섭된 사람들이며, 괴수 중에 괴수가 되는 지름길을 택한 자들이다. 예수께서 온몸으로 그토록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세워온 교회의 반석을 금권으로 깨어버리려는 가룟 유다의 후예이다.

이런 지탄이 거부감이 들 정도로 과격한가? 그렇게 여긴다면, 돈으로 지도자의 자리를 나꿔채는 것을 '온유하게 용납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우리들의 침묵에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죄를 따지실 것이기 때문이다.  

돈을 써서라도 어떻게든 당선되겠다는 이 무서운 집념은 교회의 미래를 병들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겨 직분을 감당해야 하는 신앙의 본질을 포기해버린 행위이며, 그로써 교회안에 사탄이 틈타게 만든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탄을 축출하는 작업에 우리의 믿음을 쏟아 부어야 하는 과제에 봉착한다.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축출하신 사역은 바로 이렇게 백성들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더럽히고 있는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었듯이, 우리에게도 금권선거라는 '잡귀들의 소동'을 잠잠케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한국사회를 온통 어지럽히고 있는 맘몬들의 수하세력들을 포박할 영적 권능을 교회는 소유할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이 능력을 갈망하지 않고, 또한 없는 교회는 세상풍조를 따라가는 세상의 추종자로 머물 뿐이다. 그런 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서 밖에 버리워져 밟히고 말뿐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각 개교회는 교회예산의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 기반이 존재하지 않는 한 금권선거의 구멍은 계속 뚫려 있게 될 것이다. 만일 선거를 치르는데 들어가는 행정경비가 있다면, 그 내역은 소상히 보고되어야 하며 그로써 부정한 돈 사용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할 수 있어야 한다. 영적 지도자에게 무슨 비자금(泌資金)이 필요한가?

둘째, 교권주의적 특권의식을 소멸시킬 평신도 운동을 전개하도록 한다.
교단선거의 폐해는 사실상 바로 이 교권주의적 특권의식에 그 뿌리를 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의식상태를 바로 잡아나가는 개혁운동이 펼쳐지면 군림형의 지도자는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평신도가 바로 깨이지 못하면, 한국교회는 회칠한 무덤이 되고 말뿐이다.

셋째, 금권선거로 당선된 교단의 지도자에 대해서는 증거가 분명할 시에는 탄핵대상이 되는 강경조처를 세워야 할 것이다.
그 정도의 각오가 없이는 금권선거의 폐해를 척결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근거 없는 음해나 중상모략 등으로 교단 지도자의 명예를 먹칠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엄정한 증거주의와 당사자의 충분한 해명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교회는 뼈아픈 성장의 과정을 겪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지금과 같이 은폐와 침묵의 일방적 강요의 구조에서는 교회 전체의 신앙적 명예가 추락하고 만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넷째, 교단의 수장은 선거출마 전 개인재산을 공개하고 청빈한 삶을 살고 있음을 모범적으로 보여야 한다.
정신적 지도자의 사적 생활은 공적 영역과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요구를 거부하는 지도자라면 교단의 수장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 의식풍토가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교회윤리장정을 만들어 금권선거 추방을 명시하고, 이와 관련한 선서를 교단총회와 선거과정에서 결단의 기회를 갖도록 한다.
이 작업은 교단선거가 그 동안 금권선거로 얼룩졌음을 자인하는 과정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을 시도하지 않으면, 금권선거의 올가미는 교회의 운명을 계속 타락시키고 말 것이다.  

실로, 금권선거의 말로는 곧 교회 자신의 자멸적 붕괴라는 점을 인식하여, 우리 모두의 집단적인 회개와 새로운 결단으로 맑고 순결한 신앙공동체의 건설에 우리들의 귀중한 열망을 담아내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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