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크리스천 한 분을 만났는데, 그분은 예수님의 재림이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더 오랫동안 살고 싶어 하는 소망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말이 정말 그분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는지 그냥 입으로만 하는 말인지는 내가 확인할 방법은 없다. 아무튼 적어도 그분의 표현만큼은 보통 일반 사람들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분이 한마디 말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재림이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고, 이 세상의 종말이 어서 속히 이루어져서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살고 싶기는 한데,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있다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7년 대환난'이 마음에 거슬린다는 것이다. 그 지독한 고통의 세월 7년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지 두렵고,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면서도 무섭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분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7년 대환난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일부 기독교 계통의 해석일 뿐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사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7년 대환난'에 대한 이해는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학자들마저도 7년 대환난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하기에, 과연 이 세상 종말의 때에 7년 대환난이 있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나는 계속해서 그분에게 말했다. 백 번 양보해서, 일부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7년 대환난이라는 기간이 실제적으로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기간은 너무나도 끔찍하고 괴로운 고통의 기간일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정말 끔찍한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그 기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가 있다면,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시 23:4). 오히려 그 기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더욱 깨닫는 기간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기간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삶에 아무런 고통이 없고 그저 행복한 나날들만이 있기를 우리는 소망한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가지는 기본적인 욕구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이 되기 전에는, 우리가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그날이 되기 전에는 항상 고통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가나안 땅을 향해서 나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40년간 고통의 행군을 해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광야는 우리 인생의 실존을 그대로 반영하는 곳이다. 그곳에는 물도 구하기 쉽지 않아서 사막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심한 갈증을 느껴야만 했던 곳이며, 먹을 것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곳이다. 낮에는 뜨거운 열사를 견뎌야 했고, 밤에는 한기를 견뎌내야 했으며, 그리고 야생 짐승들을 견뎌야 했던 곳이다.

하지만 그 광야는 결코 외롭거나 고통스러운 곳만은 아니었다.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셨고,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고, 하나님께서 물과 양식을 공급해 주셨다. 그래서 가장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을 수 있었던 곳이 바로 그 광야였다. 광야는 가나안으로 가기 이전에, 가나안에서의 축복의 삶을 미리 체험하는 현장이었던 것이다.

솔직히 이 세상의 종말에 어떤 일들이 구체적으로 벌어질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성경에서 예언하고 있는 것들이 바로 지금의 모습을 반영하거나, 이미 일어난 일을 반영하는 것이 많으며, 성경의 예언을 사사로이 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벧후 1:20~21). 하지만 정말 몇몇 일부 사람들이 과도하게 주장하는 대로 7년 대환난이 있다고 해서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할 것은 결코 아니다. 그 기간은 가장 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는 기간이 될 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지금 내가 처한 이 순간에(here and now)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할 것인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마 6: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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