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주] 오늘(4일) 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경주에 있는 모 장로교회의 교인인데, 노회로부터 징계를 받은 장로들이 당회를 불법으로 접수(?)하고 그것을 저지하기 위한 공동의회 개최 시도를 노회가 헌법의 조항을 들어 불법화하였고 당회 자체도 동일한 근거로 공동의회 개최를 허용하지 않고 있으니, 어쩌면 좋겠느냐? 기윤실이 좀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필자가 기윤실 건강교회운동 총무로 있으면서 아마 수 차례 확인한 사례들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이 전화 때문에 우울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아, 또 많은 성도들이 이 문제로 피눈물을 흘리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교단 선거법에 대한 논의와 다른 논의들의 시급성으로 인해서 필명 '이 목사'와 성희찬 목사의 주장에 대한 상세한 답변은 몇 회 뒤로 미룬다.

교단헌법 개정작업에 대한 변명
이번 호에는 교단헌법 개정작업을 하면서 제기되었던 내외부적인 우려와 논의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전개해보고자 한다. 우선적으로 필자가 고려했던 것은 기윤실의 오랜 교회개혁의 전통과 노력들 속에서 교회개혁의 새로운 그러나 획기적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회고컨데, 기윤실의 초창기 활동은 주로 교회와 개개의 기독교인들의 검소와 윤리적인 생활에 대한 촉구와 한국사회의 퇴폐음란문화에 대한 고발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한 운동의 방향성은 깨끗한 총회선거를 포함한 공명선거운동으로 발전하였고, 결과적으로는 광림교회의 김선도 목사에 의해서 자행(恣行)된 담임목회자 세습에 대한 반대운동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개혁운동은 다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후임목회자 선정이나 목회자의 급여, 설교표절, 교회의 재정사용 등에 대한 공론화와 대안모색이라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 물론 지금도 우여곡절 중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사안별 적절한 대처와 대안 모색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활동에 너무 적은 효과, 극단적이며 과격일변도, 실제 개교회의 고통과 아픔에 무관심하다는 등의 자성과 비판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외부적으로 깨끗한 총회 활동에 대한 지나친 수동성 내지는 무용성(無用性)에 대한 소리가 높다. 총대들에게 호소문 배포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이야기다. 한편으로는 이는 기윤실에 거는 기대가 너무 크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변명 아닌 변명을 먼저 하고 교단헌법 개정작업에 대한 변명을 좀 해보자.

한국교회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는 구조를 갖고 있다. 입후보자가 총대가 아무리 방송에서 떠들고 위협을 한다고 해도 듣겠는가? 올해도 부정타락금권선거 상호비방전이 시작되었다는 보도가 있다. 이것은 개개인의 양심의 문제보다는 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마치 총회장이 한 교단의 수장이며 대표자로 여겨지는 상황과 수억 원을 쓰고 정치력으로 총회장이 되어야 그에 따르는 명예와 권력과 재물이 따르는 현실 속에서는 깨끗한 총회는 머나먼 딴나라 이야기일 것이다.

게다가 총회선거나 활동 자체는 주목을 받지 못한다. 개교회의 성도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것도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그들만의 총회라는 특징도 있다. 게다가 교계언론이란 것이 주독자층이 목회자들이거나 그냥 교계언론 후원자들이니 바른 정보와 보도가 전제되더라도 별다른 관심을 모으기엔 역부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단총회가 개혁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첫째는 올해부터 시작된 일부 교단총회장(선거입후보자)에 대한 검증작업이 크리스챤리더십포럼이나 CBS를 통해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교계 지도자의 자격과 능력에 대한 객관적인 검증이 전무했던 교계에서 입후보자들을 모아 그들의 견해를 묻고 답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였다는 점은 교회개혁의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인사청문회가 교계에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합의도출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는 선거제도 자체에 대한 개선의 노력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제비뽑기든 무엇이든지 간에 시도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서 선출방법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금권타락선거를 막을 수 있었다는 점은 기적에 가깝다. 또한 총회를 인터넷 생중계하자는 제안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깨끗한 총회선거를 위한 기독교단체협의회>의 단체적 결의와 언론을 통한 깨끗한 선거활동보도와 언론을 통한 연대활동(총회선거에 대한 집중보도와 문제제기) 그리고 총회에서의 호소문 배포가 지니는 의미는 지금까지의 경우와 다르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준비한 총회에 대한 개혁의 카드는 몇 개가 더 남아 있다. 그 하나는 건강교회정보센터와 교회개혁의 커뮤니티(community)를 형성하는 것이며, 교단헌법 개정작업인 것이다. 이것은 호소문 배포에 그치는 소극적이고 미미한 작업이 아니다. 2002년의 교계의 자정능력과 여러 가지 시도에 기윤실 나름대로의 시너지 효과를 주려는 주도면밀한 작업의 일환이라는 점이다.

자, 이제는 교단헌법 개정운동에 대한 오해와 반대에 대한 필자 나름대로의 변명을 할 차례다.

1) 사법연수생들은 일반법의 전문가도 아니며 교회법의 전문가도 아니다.

이러한 질문은 이 일을 기획하고 실행하면서, 그리고 초안작성 및 개정작업을 하면서도 자주 제기되었다. 이러한 의문은 사법연수생들이 실제 법조인(法曹人)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회법의 전문가도 아닌데 그들에게 일을 맡길 수 있으며 정당한 결과물이 나올 것인가에 대한 의혹이었고 7월 한달 연구를 하는 당사자들과 연구를 지휘감독하는 필자에게도 동일하게 제시되었던 고민거리였다.

필자는 기윤실의 건강교회운동의 실무책임을 맡은 총무였고 그들은 예비기독법조인이었다. 물론 교단헌법학자들과 관련 목회자들과 논의할 수도 있었고 일반 학자들과 법률가들에게 이 일을 요청하는 것이 우선적인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필자의 판단은 우선 문제제기로 그치자는 것이었다. 문제제기 차원에서 사회봉사를 나온 6명의 사법연수원생이 최선을 다해서 요구된 결과물들을 낸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충분한 이유가 있고 설득이 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보았다.

또한 구태의연한 시각보다는 새로운 시각과 접근이 필요했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 일은 주어진 기간내에 일단락되어야 했다. 상황적으로 일의 순서를 더 원활하고 효율적이고 신속히 진행해야 했다. 교단헌법 개정연구는 실무책임자의 판단과 사법연수생들의 기본지식과 집중력, 그리고 길고 지루한 토론과 고민과 연구의 산물인 것이다.

2) 일반법의 잣대로 교단헌법을 재단(裁斷)하려고 한다.

또 제기된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작업을 한다 하더라도 일반법을 잣대로 삼아 교단헌법을 재단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교회권력(정치)구조는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에 근거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성희찬 목사의 견해도 여기에 속할 수 있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기존의 장로교의 권력구조를 해체하려는 의도보다는 기존의 장로교의 원리가 한국장로교의 교단헌법에 정치와 치리의 국면에서 제대로 적용되고 있는가를 판단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한 원칙하에서 각론에 있어서 모순된 권력구조나, 발생하는 문제거리를 공명정대하게 그리고 약자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세부조항의 수정이나 첨가가 필요했을 때, 재정, 권력분배, 성폭력, 노동문제에 대한 사회법을 원용(援用)하였을 뿐이다. 교회를 위한 재정관리법, 교회를 위한 권력분배법, 교회를 위한 성폭력관리법, 교회를 위한 노동문제법이 사회법과 전혀 달라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교단헌법의 정신에 따라 우리가 분석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것이 옳다 그르다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법연수원생들의 연구논문은 여기에 그친다. 그에 대한 일차적인 보완작업은 필자가 지금 이렇게 하고 있는 중이다. 어떠한 측면에서 사회법보다 못한 것이 교단법이다. 이러한 교단법에 의해서 선출되고 신앙적으로 양육된 장로, 집사, 목사들이 한국 정치 경제 사회판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할 것인가?

3) 교단법을 고친다고 한국교회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일부 사람들은 "법의 개정이 문제냐? 사람이 문제지"라고 말하면서 교단법 개정 노력에 불신을 피력한다. 법은 정의와 질서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법은 질서를 세우고 악자(惡者)를 징벌하고 약자(弱者)를 보호하는 것이다. 즉 질서는 페어플레이(fair-play)를 내포한다. 누구나 법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약자가 보호되고 강자가 제한되는 것이 페어플레이다. 권력이 있는 자가 무한권력을 향유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페어플레이가 아니다.

일단 법 개정에 대한 마인드가 생성되기 시작하면, 반칙을 하려거나 하던 자들은 설 자리가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규칙이 모호하거나 부재한 상태라면, 누구나 힘센 사람이 규칙이 될 수 있다. 법이 있는데 지키지 않는 것과 없기 때문에 지키지 않는 것은 다르다.

4) 개정안을 낸다고 교단법이 고쳐지겠는가?

그것은 교단헌법 개정안이 나온 이후의 판단해야 할 문제다. 그후에 교계내 전문가들로 구성된 개정안위원회를 만들고 여론을 형성해서 교계 내에 공감대를 확산하는 것이 중요하고 기독교인들과 교계의 대표자들을 중심으로 당회, 노회, 총회에 압력을 행사하고 노회원들을 설득하는 일이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이다. 목표도 정해지고 방법론도 정해졌는데 허무주의나 무능력을 탓할 수는 없다. 더 이상의 소모전(消耗戰)은 없을 것이다!

5) 모범정관운동이 좋다!
필자는 개교회의 모범정관운동의 유용성에 대한 이야기를 백종국 교수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에게서 듣고 있다. 개교회의 모범정관운동은 몇 가지 점에서 태생적인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본다. 물론 교단헌법을 개정(改訂)하는 게 더 쉬운가 아니면 개교회의 정관을 고치는 것이 더 쉬운가를 물어본다면, 누구나 개교회의 정관을 고치는 것이 더 쉽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김동호 목사의 교회개혁 시도의 경우처럼 노회나 총회 차원에서 교단헌법과의 충돌문제를 야기(惹起)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첫째로 개교회주의를 촉진할 우려가 있다. 독립교회나 침례교 등이 아니고서야 교단이라는 조직체가 존재하고 교단의 최고규정인 헌법이 존재한다. 이 헌법이 좋든 나쁘든간에 이 헌법에 의거하여 교단이 운영되고 목회자를 양성하고 교회를 유지 운영하게 하는 것이다. 교단헌법의 모순점을 개교회의 정관개정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잘못이라고 본다. 이것은 형식상으로는 교단에 속해 있지만, 실제적으로 개교회자치(혹은 독립)를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로 교단(권력자들)에 의해서 악용될 수 있다. 힘있고 교인수가 많은 교회나 노회가 별로 관여하지 않는 교회들의 경우에는 교단헌법(즉 상위헌법)과 무관하게 혹은 배치(排置)되는 방향으로 개교회의 정관을 작성하거나 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상위법과 충돌될 가능성이 높아서 개교회, 혹은 일부 목회자의 독단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총회나 교권자들의 이해와 상황에 따라 개교회적 개혁의 노력이 오히려 억압되거나 부정적인 효과를 초래할 여지가 있다.

셋째로 개교회의 정관운동은 궁극적으로 교단헌법을 개정하는 운동의 시작점으로 되어야 한다. 개교회 자치나 독립교회운동으로 혹은 개정된 정관을 따르는 분리교파운동을 하지 않을 바에야 개교회의 모범정관운동은 이러한 정관개정운동의 마인드를 확산시키고 공감대를 얻어서 교단별로 교단헌법이 현재 허용하는 적법한 방법을 통해서(노회별 헌의) 혹은 교회나 교인청원 등의 방법을 통해서 교단헌법이 개정될 수 있는 노력을 병행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단헌법 개정운동은 비록 무척 어렵고 느린 것이긴 하겠지만, 노회원들과 총대들과 개교회의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설득하고 한국기독교 전반의 공감대를 얻는 것이 우선과제(優先課題)일 것이고 노회(총대)원들로 하여금 총회상정 헌의안을 만들어내서 헌법개정을 하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윌버포스가 영국국회에 노예제도 폐지안을 내서 통과시키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個)교회모범정관운동도 그 일환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번 작업을 기화로 기독교인들에게 교단헌법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고 그 부당성을 일깨우는 작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제 밥상은 차렸다. 밥상에 있는 밥을 잘먹고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다. 이제 독자들은 분연히 일어나 이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고 본다. 누군가가 희생적으로 주도해주길 기대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이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교회인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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