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형규 목사가 4월 30일 성공회대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평생을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그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4월 27일 박 목사를 인터뷰했다. ⓒ뉴스앤조이 성낙희
자유 억압이 지금보다 노골적이던 시절, 한 목사가 학생들과 모의하고 있다. 독재 정권을 어떻게 무너뜨릴 것인지, 순수하게 무모한 주제를 놓고 머리를 움켜쥔 채 고민하고 토론도 벌인다. 학생들 중에는 훗날 정치 영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 이들도 있다.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고문과 손학규 전 대표, 이미경 의원도 그들 가운데 있다.

목사 이름은 박형규. 그는 당시 서울제일교회에서 목회하며, 정권으로부터 감시당하던 학생들을 불러 서울 외곽 한 신학교에서 마음 놓고 '거사를 도모하도록' 도왔다. 그렇게 인연이 닿은 신학교에서 2012년 4월 30일, 박 목사는 명예신학박사가 된다. 박 목사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목사로서 성공회대학교가 주는 학위를 받는다. 성공회대는 개교 98년 만에 처음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한다.

<뉴스앤조이>가 4월 27일 박 목사를 만났다. 기자가 만나 본 박 목사는 동네에서 편하게 마주할 수 있는 아흔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였다. 박 목사의 연륜만큼이나 그가 풀어놓은 이야기와 삶의 흔적은 한국 현대사와 교회사를 관통하고 있었다.

편하게 민주화운동해서 미안했다

박 목사는 박정희·전두환 독재 정권 시절 학생과 시민들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많은 이들이 피와 눈물을 흘렸고, 박 목사도 여섯 번이나 옥고를 치렀다. 그렇지만 자신은 심한 고문을 당하지는 않아 편했다고 했다. 한국전쟁 때 미국과 맺은 인연으로 박 목사가 감옥에 들어갈 때마다 미 대사관이 당국에 보호 요청을 했기 때문이다.

대신 박 목사는 몸에 가하는 통증 못지않은 아픔을 맛봐야 했다. 함께 운동하던 이들이 고초를 겪는 모습을 직접 목격해야 했다. 고문자들은 일부러 박 목사를 데려가 학생들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했다. "당신 때문에 저렇게 당하는 거야"라는 말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모든 게 자기 탓이라는 자책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을 인정하는 게 쉽지 않았다. 고문 받던 이들이 "목사님, 저희는 괜찮습니다"라고 오히려 그를 위로했다. 박 목사는 "괜찮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 견딜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전두환 정권 때는 그가 목회하는 교회도 탄압을 받았다. 당국이 눈엣가시였던 박 목사를 억누르려고 깡패를 동원했다. 깡패들은 박 목사가 목회하고 있던 서울제일교회에 침입해 난동을 부리고 폭력을 휘둘렀다. 교회에서 예배할 수 없게 되자 목사와 교인들, 그리고 일반 학생들까지 참여해 무려 6년 동안 서울 중부경찰서 앞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 사건은 독일의 시사 주간지 <슈피겔>이 크게 보도하면서 국제사회에 알려졌다.

▲ 독일의 시사 주간지 <슈피겔>이 서울제일교회의 서울중부경찰서 앞 집회를 크게 보도했다(사진). 영국 BBC 등 유럽의 방송 매체도 집회를 중계하면서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을 다녀갔다. ⓒ뉴스앤조이 성낙희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 함께 힘을 합쳐 독재 권력을 손을 들게 한 87년 6월항쟁은 잊을 수 없다. 당시 박 목사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민국본)에 참여했다. 민국본은 경찰 눈을 피해 서울 정동 성공회 주교좌성당으로 들어갔지만 포위됐다. 그는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를 찾아가 도움을 구했고, 김 총재의 차에 올라 주교좌성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김성수 주교를 만나 성당을 민국본이 사용하도록 허락 받아 민주화 운동을 이어간다.

결국 경찰에 붙잡히지만 박 목사는 호화로운 수감생활(?)을 했다고 한다. 목욕할 때 교도관들이 따뜻한 물을 줬고, 신문을 갖다 주기도 했다. 교도관만 쓰는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도 한다. 시민 여론이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 목사는 "이제 세상이 많이 바뀌는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

민주 세력 모래알 안타깝다

그렇게 피와 눈물, 투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졌다. 그러나 역사가 늘 발전만 하지는 못했다. 지금 이명박 정권은 용산참사와 제주 해군기지, 민간인 불법 사찰 등을 자행하면서 민주주의를 퇴보시킨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런데 이제는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대세다. 그는 "박 위원장 지지는 독재 정권의 그림자를 다시 보자는 것이다"고 했다.

현 정권에도 할 말이 많다.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 재임 당시 박 목사를 만나 "나도 민주화운동을 했다. 나도 크리스천이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박 목사는 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보면서 실낱같은 기대도 허물어졌다. "이 대통령이 돈과 권력에 집착한다. 크리스천이란 간판만 달고 기독교를 욕되게 했다"고 혹평했다. 그는 "이 정권의 잘못된 정치가 오히려 젊은이들을 일깨워 줄 것이다, 새로운 비전을 심어 줄 것이다"고 했다.

민주 개혁 진영이 지금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박 목사는 '풍요'를 지적했다. 경제 발전이 급속도로 이뤄질수록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에 더 집착한다. "보수 세력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모두 결집했는데, 야권은 결속력이 충분치 않았다. 서로 주도권을 챙기려고만 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지식인의 책임도 크다고 했다. 지식인들은 시대에 필요한 말과 행동을 보여야 하는데 적극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민주화는 추억이 아니라 여전히 실천해야 할 현실이라고 했다.

▲ 박형규 목사는 박정희 정권 때 CBS에서 상무로 일하면서 전태일 열사의 죽음과 김대중 당시 민중당 의원의 발언 등을 크게 보도하고, 결국 사표를 냈다. (네이버 블로그 갈무리)
대형 교회가 되는 건 자살 행위

박 목사는 독재 정권 때 목사 신분으로 민주화운동을 했다. 목사였지만 사회 불의를 지켜만 볼 수 없었다. 교회당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에게는 청년 학생들이 교인이었고 광장이 교회였다. 작고 빈약한 몇몇 교회만 함께했지만, 그들이 독재 정권을 이길 수 있는 밑거름이었다.

그에게도 대형 교회 목사가 될 수도 기회가 있었다. 50년대 서울 공덕교회에서 목회할 당시 교회 규모가 계속 커졌다. 교인들은 박 목사가 계속 있어 주길 원했다. 그러나 그는 사표를 냈다. "너무 커지면 마땅히 해야 할 설교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자신을 찾는 교인들을 피해 속리산으로 숨어버렸다. 4.19 혁명을 겪으며 그는 교회의 사회 참여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민주화운동 전면에 나섰다.

스스로 비우고 떠났기에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에 아쉬움도 크다. 그가 교회를 향해 외치는 소리는 "몸집을 불리려고만 하지 말 것", "가진 게 없고 있는 것마저 빼앗기는 이들을 돌아보라는 것"이다. 자신의 바람과는 반대로 가는 한국교회에 충고의 한마디를 남겼다.

"대형 교회가 되는 것은 자살 행위다. 예수는 큰 회당에서 늘 쫓겨나 광야에서 사람들과 함께했다. 어떻게 몸집을 키울까, 어떻게 현 상태를 유지할까를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교회를 개혁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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