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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지털 첨단과학문명의 시대에도 성서는 과연 우리에게 교훈을 줄 수 있을까? 논리적이며 과학적인 사고의 틀 속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그들이 과연 이해하려 들까?

성서의 구성은 동화적이며 문학적이며 철학적이며 신비적인 면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성서는 우리보다 1천 년 이상이나 앞서 살았던 신앙인들이 체험한 과거의 신앙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을 믿고 성서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신자들의 실존적 삶에 실천적 결단을 하게 하는 사실적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온다.

해서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들은 성서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재현해 내고 힘차게 세상을 살아간다.

성서의 대부분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러므로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유치한 환상소설에 지나지 않는다. 허나 성서가 진술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는 우리가 아는 과학지식으로 판단할 수 없는 초과학적 사건을 보도하고 있음을 알게 될 때 우린 겸손한 마음으로 성서에 귀기울이게 된다.

2.
신약성경 사도행전 12장에 다음과 같은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인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행 12:13-15)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교회는 기도하였다. 다음에 일어난 것은 의미하는 바가 깊다. 천사가 베드로의 옥에 들어왔다. 이것은 환상이 아님을 기억하자. 그것은 토요일 아침의 만화도, 황혼지대도 아니다. 이것은 실제로 이 단단한 지구 위 바로 여기서 또 다른 인간에게 일어난 일이다.

어떻게 천사가 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 어떻게 베드로의 쇠사슬이 벗겨졌을까?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일어난 일들이 보이는 세계에서 활동을 개시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결과임을 잘 안다. 똑같이 중요한 것은 교회의 기도를 통해 보이는 세계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영향을 미쳐서 베드로의 풀림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의 성경 이야기는 적어도 우리가 모든 상황에서 기도하도록 유발시켜야 한다.

이 이야기에서 두 번째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관계되는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들이 믿을 수 없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들 자신에게 한 말을 주목하자. "그러면 그의 천사라."

이것은 두 가지를 지지한다. 첫째, 초대교회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깨닫고 있었다. "그러면 그의 천사라"는 것은 그들의 첫 번째 반응이다. 두 번째로, 그것은 각 개인들은 지정된 천사를 갖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의 지도 아래서 신비주의자들이 아니었고 기괴하고 과도한 영적인 의식에 휘말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균형 잡히고 실제적인 접근을 한 우리들의 모범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천사들을 자신들의 삶의 부분이라고 믿었다.

구약은 이야기들과 보이지 않는 세계의 증거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 역사적인 사건들로부터 거리를 둔다. 우리는 결코 그것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정하지 않지만 구약에서 환상의 요소를 인식한다. 기적적인 이야기들은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성경의 영웅들은 만화 주인공 같은 느낌을 준다. 더구나 구약에서는 하나님조차 우리가 믿어온 하나님을 과장한 것처럼 보인다. 구약의 하나님은 더 능력 있고 인간의 사건에서 더 활동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구약의 세계는 부분적으로 환상적인 것으로 보이는 반면 우리는 우리의 현재 세계를 보다 현실적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성경의 사건들은 사실적이다. 만약 우리의 삶이 이러한 사실들을 반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리와 현실에서 우리를 멀리 하게 된다.

엘리사의 삶의 이야기도 또한 천사들을 비춰준다.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5-17)

엘리사는 선지자 학교의 지도자이며 선지자였다. 그들 학생들은 도시를 적의 군대가 완전히 에워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학생 중 하나가 군대를 보고 엘리사에게 말하기 위해 달려갔다. 엘리사의 반응은 두려움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놀라는 기색도 없이 엘리사는 단지 "이런 상황으로 인해 걱정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말했다.

이때 그 젊은이는 엘리사가 실성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에는 그들 외에 아무도 없었고, 밖에는 단지 적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엘리사는 미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젊은 제자보다 더 현실과 접촉해 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깨닫고 있었다.

엘리사는 하나님께 젊은이의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했다. 갑자기 그는 천사의 군대를 보았다. 하나님은 단지 이 사람의 머리에 꿈을 부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상징적인 심상을 창조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가 실제로 거기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그의 시력에 무언가를 행하신 것이다. 젊은이는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나는 그의 놀람과, 흥분, 두려움까지를 상상할 수 있다. 이 젊은이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본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그가 항상 알아왔던 혈과 육의 세계만큼 실제적이었다.

그러나 엘리사는 무엇을 보았는가? 어떤 사람은 엘리사는 다른 사람이 볼 수 없었던 육체의 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믿음을 가졌던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엘리사는 그의 눈으로 젊은이가 보았던 것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단지 그의 주위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깨달았다. 확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다만 그 젊은이였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한 깨달음은 많은 문제들을 고쳐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비관주의와 그들 자신의 말로 인한 결과들, 그들 혹은 다른 사람의 상황의 희생 등에 막혀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희생을 결코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매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이 전쟁에서 우리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연합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맛보는 것을 확신하는 것처럼, 그것을 확신하며 하루 24시간 이러한 앎 속에서 살아야 한다.

엘리사는 그런 영역에서 살았고 우리도 역시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과 압도하는 다툼, 잔인한 적들과 마주칠 때 우리는 희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패배로 끌
어당기는 부정적인 말을 내뱉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적보다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참고 : 딘 셔만, [영적 전쟁])

3.
성서의 내용이 이해할 수 없는 유치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라고 무시하고 배척하는 무신론자들이 있다. 반면에 성서의 이야기가 증명 가능한 진실이라고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는 열정적인 신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 우매한 일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지 않으려는 이와 오늘의 과학상식으로 그를 증명하려는 이들은 둘 다 모두 자기의 열정을 식히고 겸손히 성서의 상징과 은유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서는 영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무선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출 때 우리가 듣고 싶은 음악을 들을 수 있듯이 천상의 소리를 듣기 위하여 우리는 영적 주파수를 맞추어야 한다. 엘리사나 베드로의 교인들은 영적 주파수를 맞추
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교제할 수 있었으며 어려울 때 천사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일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체험할 수 있는 영적 사건들이다.

우리는 어디에서든지 자기가 있는 곳에서 영적 주파수를 잘 맞추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 주위에 시끄러운 잡음을 제거하기 위하여 조용히 마음을 정하고 영적 주파수를 맞출 때 우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위로 받을 수도 있으며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던가 술에 취한 듯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잘못된 사람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삼상 1:12-13)

신앙은 보이는 세계에만 만족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소망을 두고 교통하며,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을 초월하여 살게 한다. 해서 이 세상이 나를 버려도 마음 흔들리지 않고 영원 속에 소망을 두고 초월자(=하나님)와 동행하며 늘 평안한 마음으로 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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