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 치유 열풍이 부는 것은 세계적 조류와 맞닿아 있다. 고도의 정보화 시대와 병리적 사회현상 속에서 일개인은 무력화되고 외부적 변화에 인간의 영혼은 황폐화되고 있음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기독교에서 강력한 힘을 유지하던 성령, 부흥집회의 간판이 내려지고 모든 간판이 치유라는 간판으로 아무 검증 없이 올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적인 성찰 없이 모든 프로그램과 집회에 치유라는 말을 붙이다 보니 치유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병리적 현상이 배태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원래 깊은 생각 없이 좋은 게 좋은 거다, 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게 익숙한 우리지만, 그러한 모습은 점점 더 지성인들과 조금 생각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게 되는 원인임으로 미래선교와 기독교의 발전에도 득보다 실이 많다.

나 또한 치유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또 다른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목회자로서 이러한 비판적 시각은 나에게도 향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적잖은 사람들을 만나고 상담하고 치유하면서 처음에는 삶이 개선되고 희망을 찾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긍심을 가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치유라는 게 말처럼 간단한 게 아니라는 게 오랜 시간을 통해 체험적으로 느끼게 된다.

주님은 당신의 능력을 통해 혹은 말씀으로 많은 사람을 고치셨다. 우리는 그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많은 사람을 살리고자 노력한다. 이게 목회자의 심정이고 치유자의 자세다. 그러나 문제는 성경에 나타난 주님의 치유방식을 시대적인(상담, 심리치료 내지 의술의 발달) 상황 고려 없이 오직 성경적(?) 방식으로만 이뤄지는 게 더 나은 것이냐는 문제이다. 좋은 설교든 치유를 위한 강력한 설교든 그것만이 강력한 능력이다, 라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돌아보자는 것이다.

정신질환을 무조건 귀신 들렸다, 라는 식으로 대하던 시대도 있었다(도시화되면서 예전의 귀신들림 현상이 많이 없어지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그래서 기도원이나 교회에서 사탄을 잡는다는 식으로 묶어놓고 기도만 했던 시대가 바로 엊그제다. 그러나 지금은 세련된 성경말씀과 내적치유 프로그램으로 마음의 고통을 안고 있는 사람을 돕고 있다. 문제는 경미한 우울증 내지는 마음의 문제를 호소하는 사람보다 정신병까지는 안 가지만 신경증적 문제나 경계선 장애를 호소하는 기독교인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기독교인임으로 말씀집회, 치유집회에 매달린다. 그 매달림은 처절할 정도이다. 그런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도울 것이냐는 것은 이 시대의 사명인 것이다.

정신의학에서도 한 인간의 정신(마음)의 문제를 자로 잰 듯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나 정신질환이 순간적으로 생기는 것(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은 일부분이고 유전적이거나 오랜 습관이나 인간시스템적 관계에서 생성된 질병이 대부분이고 이 질병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이 이뤄진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정신과에서는 단지 현재 고통을 호소하는 신체적인 문제를 약물로서 일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주요한 일이었으나(정신물질의 밸런스 조절) 현재는 심리전문가에 의한 병리적 심리조사나 정신질환자의 주변환경이나 가족시스템을 파악하는 사회복지사가 협력하여 한 개인의 성장과 치료를 다각도로 돕는 것이 원칙이다.

이런 원칙하에 치료방식에 있어서도 약물뿐만 아니라 심리치료와 사회적응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치료방식이 발달되어 왔다. 문제는 의료보장제도가 세세한 프로그램까지 지원을 하지 못하는 관계로 대부분 정신과에서는 약물투여만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에서는 이런 치료방식에 대해 거부 내지는 인간적 방식이라는 말로 치부해 버림으로 오직 기도와 말씀만을 외친다. 더 나아가 이런 인간성장과 치유를 위한 심리적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목회자를 목회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않는 자로 매도해 버린다. 그런 프로그램이 교회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고도 치부해 버린다. 어릴 때 어떤 부흥목사님이 강조하였던 '감기 걸렸다고 판콜 사먹은 신자는 판콜만한 믿음의 신자고 어떤 병이든 하나님을 의지하면 주님이 사랑하는 신자'라고 외치던 논리가 아직도 우리에게는 당연시되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물에 빠진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구할 것인가? 기도만 할 줄 아는 목사는 기도만 할 것이고, 수영할 수 있는 목사는 수영을 통해 사람을 구하면서 주님에게 도움을 구하는게 당연한 일이 아닐까?(수영을 못해도 주변에 수영 잘하는 사람을 아는 목사는 그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구분은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의 논리가 아니라 자신의 자긍심을 위해 사역하는 자의 논리일 뿐이라고 보여진다. 관념적 신학으로 실제적 문제를 호도하는 행위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 더욱 그런 정신질환에 걸리게 됨을 본다.(물론 요즘에는 부유한 삶의 결과로 찾아오는 정신질환도 있지만 아직도 대부분은 불우한 가족환경에서 오는 정신질환자가 많은 실정이다) 그들이 기독교인일 경우에는 정말 필사적으로 신앙적 방식을 찾거나 일반인은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을 어디서 듣게 되는지 그 길만이 전부인냥 매달린다.

얼마 전 기도원에서 어느 할머님이 정신질환에 걸린 아들을 옆에 두고 밤낮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그 장면은 나의 가슴을 너무 아프게 하였다. 왜 그 모자에게 그 방법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권유하지 못하는가?

많은 치유프로그램이 있다. 그러나 모두가 성인을 위한 프로그램일 뿐이다. 그러나 이혼이 늘면서 그 자녀들은 어른보다 더 깊이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병들어가고 있다. 목회가 어려워질수록 그 자녀들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마음은 황폐화되어가고 있다. 그 자녀들을 치유한다는 프로그램이란 게 예전 찬양집회에 치유라는 단어만 붙어 있을 뿐이다. 강사가 나아와 감정에 호소하며 주님께서 그 마음을 치유할 것이라고 열심히 강조한다.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어설픈 강요와 신앙적 권면은 아픈 마음을 더 속 깊게 은폐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이다.

이제 교회도 일회성 집회를 통한 치유가 아닌 총체적인 자원을 발굴하여 마음의 상처난 자를 도와야 할 때이다. 심리치료에서도 인지치료 행동치료와 더불어 예술치료의 방식으로 인간을 돕듯이, 기독교에서도 어떤 자원이든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어떻게 총체적이며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할 때이다.

김세준 목사 / 크리스천마음연구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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